♣  렘35:19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차분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버렸던, 감춰진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자는 세상에 드러나고 알려져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깁니다. 요셉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그의 삶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지 오늘날의 성도 개개인을 예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측량할 수 없으신 하나님을 어느 한 국면만으로 판단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때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이것(무명상태)이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감춰진 은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한 예 중의 한 곳입니다.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5장은 매우 특이한 구조입니다. 전체적인 흐름과 잘 조화되지 않습니다. 마치, 요셉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갑자기 끼어든 유다 이야기(창38장)와 유사하게, 삽입 구절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레갑 족속은 조상을 명령을 약 300년 동안 철저히 지킵니다. 그들이 평생 지켜야 할 강령은 5가지였습니다.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집을 짓지 말라. 파종하지 말라. 포도원을 재배치 말라. 장막에 거하라.”입니다(6-7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이야 긍정적일 수 있겠으나 나머지 4가지는 기초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억지일 수 있습니다. 파종하지 말고 포도원 재배하지 말라는 것은 농사짓지 말라는 것인데, 이것은 먹지 말라는 것과 동일합니다. 품을 팔거나 구걸하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집 짓지 말고 장막에 거하는 것 또한 너무나 불편한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요나답의 명령은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말라는 무분별하고 가혹한 내용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레갑의 후손들은 엉터리(?) 명령을 잘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민망스러울 정도로 부러워하시며 극구 칭찬하십니다(14절, 16절). 그러면서 축복하시는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레갑 족속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레갑 족속은 원래 이스라엘 지파가 아닙니다. 이방인이었는데 이스라엘에 편입된 귀화민족입니다. 원 뿌리는 겐 족속이고 겐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두라의 아들 중에 미디안이라는 사람이 있었고(창25:2; 대상1:32), 후일 모세의 장인인 르우엘의 아들 호밥이 바로 미디안 사람이며(민10:29-32) 겐 사람이라고도 불렸습니다(삿1:16).

학자들은 “겐 족속은 미디안 족속 중의 하나인데 주로 홍해의 동남지역에서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어느 성경의 각주입니다. “겐 사람은 아말렉 족속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유목민이다(삼상15:6).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였지만(출17:8-16) 겐 사람들은 이스라에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았다.”

정리하면, 모세의 장인 이후부터 겐(레갑) 족속은 이스라엘에 동화되어 살아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겐 족속의 기원이 불확실하다고 여기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모세 시대로부터 예레미야 시대까지 약 950여 년 동안, 레갑 족속은 이스라엘에 속하여 살았으나 결코 상류 귀족층이 아니었습니다. 영향력이 거의 없는 비주류였습니다(6-7절).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 비주류 귀화민족의 서러움은 곧바로 증명됩니다.

불과 얼마 후 남왕국 유다가 멸망합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상류 귀족층만 사로잡아가고 빈천한 자들은 남겨 두었습니다(왕하24:14). 분위기로 볼 때, 레갑 족속도 포로에 포함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70년이 더 지난 후, 포로에서 풀려나 유대 땅으로 돌아옵니다. 2차에 걸쳐 돌아온 숫자는 약 5만 여 명에 이르고 그 계보와 이름이 제법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레갑 족속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 포로에서 돌아온 인원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약간의 이견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1차 49,897명(스2장), 2차 1,754명(스8장), 3차 49,942명(느7장)이 귀환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1차와 3차 귀환 인원수에 있어서 유대인 42,360명 및 노비 7,337명은 동일하고 단지 노래하는 자만 45명(200명 대 245명)의 차이가 날 뿐입니다. 따라서 2차에 걸쳐 약 5만여 명이 귀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습니다. 이 부분은 별도로 검토해 봐야 할 듯합니다.

한 마디로, 레갑 족속은 오늘 본문 이후 성경과 유대 역사에서 완벽하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레갑 족속의 대가 끊겼으니 하나님의 약속이 틀렸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틀리실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려면 무언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뒤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됩니다. 영원과 전지와 전능과 공의와 사랑과 인내 등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밝히지 않고 상당 부분을 가려놓으신다. 그리고 모든 일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신다.’는 속성도 빠뜨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신비’라는 속성입니다.

가려놓으신 속성의 대표적인 사례는 엘리야 시대 때의 7천인입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이스라엘의 숫자가 7천이라 하셨지만, 사실 성경이 밝히는 사람은 엘리사와 그의 사환 게하시 등 2명뿐입니다. 나머지 6,998명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몽땅 가려진 것입니다(7천이라는 숫자를 문자적으로 받으면 곤란하겠으나, 그러나 설명을 위해 이렇게 표현해 봤습니다).

상세 설명을 하지 않으신 대표적 사례는 욥의 경우입니다. 잘못한 게 없다고 항변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38장부터 41장에 이르기까지 눈물 쏙 빠지게 몰아붙이시는데, 놀랍게도 욥의 주장에 대해서는 쓰다달다 답변하지 않으십니다. 전혀 엉뚱한 것만으로 야단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꾸중을 알아들은 욥의 영성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을진대 하나님의 속성인 ‘신비’도 믿어야 합니다. 신비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레갑 족속의 역사는 성경에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후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멸절되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비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오늘까지 잘 보호하고 계실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상태로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참 성도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밝히 드러나서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인이어야만 참 성도로 인정받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역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 가운데서 참 성도를 찾기는 무척 어려울는지 모릅니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싶습니다. 참 성도들은 영혼 속에 울려퍼지는 이 세미한 음성을 분명 듣고 있을 것입니다.


‘가려지고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크다.’는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 현실교회의 실패를 참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일 것입니다. 소망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순태

2011.03.23 14:29:16
*.75.152.191

앞의 두 글을 삭제했습니다. 올리고 난 이후 줄곧 영이 편치 못했습니다. 결국 아내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알만한 사람들(목회자들)이 성경을 교묘히 이용하여 어리숙한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직설적인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그냥 편한 내용, 성경을 읽으면서 깨우침 받은 것, 잘 이해가 안되는 것 등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운영자

2011.03.23 14:50:52
*.108.161.206

제가 요즘 옳고 맞는 말인 것은 분명한데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때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아니 그냥 그대로 하면 오히려 나쁜 결과만 낳게 되고
꼭 해야 한다면 같은 내용을 선한 방식으로 바꾸어서 해야 한다는 것을
개인적 삶에서 철두철미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는, 성경 진리를 그대로 전하거나 글로 쓸 때일 것입니다.
그것도 성경을 정말 성경대로 정확히 해석했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집사님 잘 하셨습니다.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는 것이 바로 성령의 눌림이겠지요.
현실 교회의 실패를 참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인
가려지고 감추어진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집사님과 집사님의 이 사이트에서 더 자주, 더 여실히 증거되기를 소원합니다. ^^

김유상

2011.03.23 19:55:11
*.234.18.85

진폐와 위폐를 가리기 위한 가장 좋은 훈련은 위폐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진폐를 익히는 것이라는 설명에 꼬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거짓을 알아 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잘 모르는 자는 당연히 거짓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목회자 상을 보여 줌으로써 거짓 목회자들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분별력을 길러 줄 수 있으리란 믿음에 근거하여, 형제님의 어려웠을 결정에 격려와 경의를 보냅니다. 하지만 뭇 형제자매들을 경성하고 경계시키는 파수꾼의 외침은 그때 그때 올려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상혁

2011.03.23 22:12:30
*.108.161.206

아멘!아멘!

김순희

2011.03.24 13:04:32
*.165.73.38

개인적으로 레갑사람들이 참 궁금했었습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요.^^

하나님 나라는 폭포수처럼 콸콸 흘러내는 그런 물줄기가 아니고 보일 듯 보일 듯 가녀린 그런 물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여여히 흐르는 그 물줄기.
마치 우리 홈피교회 처럼요.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1 [묵상] 사랑(1) (마5:21-48) 정순태 2011-04-23 811
140 [단상] 택도 없는 소리 [1] 정순태 2011-04-15 590
139 [이의] 리브가의 유모가 어떻게 야곱과 함께? [2] 정순태 2011-04-07 2562
138 [목자상] 07. 소명(사명/부르심) 신학의 오해(2) [3] 정순태 2011-04-02 1179
137 [목자상] 06. 소명(사명/부르심) 신학의 오해(1) [1] 정순태 2011-03-26 3093
» [묵상]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은혜 [5] 정순태 2011-03-23 620
135 [묵상]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2] 정순태 2011-03-11 661
134 [re] [답글] 홀아비 사정은… [2] 정순태 2011-03-13 547
133 [독후감] 오강남 박사님과 박신 목사님의 책을 읽고 [3] 정순태 2011-03-05 899
132 [칼럼 재개의 변] 애정이 없으면 비판도 없다! [12] 정순태 2011-03-01 563
131 [절필] ‘맑은바람소리’ 칼럼을 끝마치며 [6] 정순태 2010-01-02 937
130 [단상] 교회는 내부고발자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정순태 2009-12-12 924
129 [단상] 선점(先占)이 장땡이다? 정순태 2009-12-05 817
128 [단상] ‘혹시나?’가 ‘역시나!’로 정순태 2009-11-28 803
127 [단상] 성직자(?)의 사례금에도 세금을? [1] 정순태 2009-11-21 881
126 [목자상] 05. 권위와 권세의 의미 정순태 2009-11-14 3474
125 [단상] 진정한 미인의 아름다운 유언 정순태 2009-11-06 881
124 [단상]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가? [3] 정순태 2009-10-31 1403
123 [목자상] 04 ‘목사’ 직분의 개관(Ⅲ) 정순태 2009-10-24 1015
122 [목자상] 03. ‘목사’ 직분의 개관(Ⅱ) 정순태 2009-10-24 1453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