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근무했던 회사에 ‘○ 택도’라는 특이한 별명을 지닌 분이 있었는데 이런 사연입니다.
그 양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 주장만 내세울 뿐 부하직원의 발언을 경청하거나 의견을 수용하는 데는 아주 인색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택도 없는 소리”를 입에 달고 지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되뇌곤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택도’는 ‘턱없다.’(이유/수준/분수에 닿지 않는 데가 있다)에 보조사 ‘도’를 붙여 일종의 강조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보통 ‘턱’을 ‘택’으로 발음한곤 합니다.
아무튼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의미입니다.
기독신앙을 지닌 성도들에게는 진리 자체가 되는 성경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택도 없는’ 허황된 소리가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안티기독교 활동의 대표주자격은 누가 뭐래도 도올 김용옥 씨일 것입니다. 이분의 저서들과 주장들을 보면, 한 마디로 ‘성경은 택도 없는 신화요 이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택도 없는 비지성인’으로 규정하는 것 같습니다.
헌데, 이들의 주장을 가만히 들어보면, 기독신앙에는 정말 ‘택도 없는’ 사항들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데에 성도들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무수한 예 중에서 2가지만 보겠습니다.
첫째,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교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신분을 버리고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초림사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적 사고로 볼 때, 전혀 말이 되지 않는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빌2:7절의 “자기를 비어”의 ‘비어’는 헬라어로 에케노센(ekenosen)인데, ‘비게 하다/파괴하다/무효로 하다’의 뜻인 ‘케노오’(kenoo)에서 온 말로서, 응당 누릴 수 있는 권리 등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포기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 「①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 ②독립적인 권위 행사를 포기, ③하나님의 대권적 권능을 포기, ④존엄과 주권의 표지를 포기, ⑤하나님의 속성 즉 무소부재와 전지전능 등을 포기」.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말인데, 인간의 사고로는 공감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현상입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실생활을 통해 살피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보통사람(凡才)이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면 좋은 현상으로 평가받습니다. 발전지향적(상향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능있는 사람(天才)이 빈둥거리며 제 구실을 못하면 비난받습니다. 쇠퇴지향적(하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상향성을 추구하지 하향성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노력하여 부자되면 칭찬받고, 부자가 가난해지면 손가락질 당합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불교의 주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무지한 인간이 정진하여 도를 깨우쳐 부처가 되는 것은 발전하는 것(상향성)입니다.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 딱 들어맞기 때문에 흔쾌히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리는 전혀 반대입니다. 창조주의 지위를 포기하고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하향성)은 인간 사고방식과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인간이 수용하기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택도 없는’ 일의 전형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를 성도에게 적용한 것이 곧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의 직접 명령입니다(마16:24). 자기를 비우고(포기하고) 대신 성령님을 채우라는 뜻입니다. 말은 쉽지만, 이것은 인간적 시각으로는 희생과 양보와 손해와 망각과 멸시를 뜻하는 것입니다. 드러나는 것(상향성)이 아니라 감춰지는 것(하향성)이기에,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전부이고 최고입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의 가치도 사라지고 만사의 의미도 상실됩니다. 오직 ‘나’만이 가치의 전부입니다. 일일이 증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가치관이 교회에 침투하여, 이제는 기독신앙마저 번영신학과 긍정신학이 활개 치고 있습니다. ‘나만큼은 잘 살아야 한다. 나만큼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성경 원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순수한 세상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관으로는 ‘자기부인’이라는 성경원리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너무나 엉뚱하고 무지몽매한 환각이라고 비난받을 뿐입니다. ‘택도 없는’ 일의 또 다른 전형인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신앙을 반대하는 불신자들의 주장을 접했을 때, 성경에 근거한 기독신앙을 명쾌히 설명할 수 없어 심히 난처했던 경험이 있는지요! 오히려 저들의 논리가 더 합당한 것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는지요!
만약 없었다면 이는 권장할 일이 아니라 크게 반성해야 할 현상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진지한 숙지(알려고 하는 것)의 노력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 교리가 ‘택도 없는 소리’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인간 측면에서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한, 아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성경적 기독교는 인간측면에서 분명 ‘택도 없는’ 것입니다.
헌데, 진실은 바로 여기에 존재합니다! 분명 ‘택도 없는’ 데, ‘택이 있다’는 성경의 살짝 가려진 진리를 아는 순간부터 신앙의 길이 출발됩니다! ‘택도 없는 말’이 ‘택이 있는 진리’로 전환되는 이 오묘함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결단코 일어날 수 없는 ‘택도 없는 일’입니다! ‘택도 없는’ 의문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기독신앙의 진수에 도달된다는 기막힌 역설이 신비로울 뿐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택도 없는 길’ 가는 은혜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