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중매쟁이 예수님.

조회 수 415 추천 수 13 2009.11.15 01:13:24
영원한 중매쟁이 예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 아래 밟으리니 그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經營)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4-27)


중매결혼이 연애결혼보다 이혼율이 낮다.

서구사회는 연애결혼을, 타 지역들은 중매결혼을 선호한다. 최근 지역구분 없이 전 세계가 급격히 서구화 되어 가는 바람에 취향과 관습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그러했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중매가 연애결혼보다 이혼율이 훨씬 낮다고 한다. 단지 관습, 문화, 제도 등에 얽매여 이혼을 꺼리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결혼 생활의 만족도도 높다고 한다.

서구의 이혼율이 아시아나 이슬람 문화권 등에 비교해 월등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결혼의 만족도마저 높다는 것은 언뜻 이상하지 않는가? 죽고 못 살 것처럼 좋아해 하는 결혼보다 그런 감정이 별로 생기지도 않은 채 단순히 객관적 조건만 서로 맞추어 하는 결혼이 어떻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일부지역에선 아직도 부모가 정해준대로 결혼해 첫날밤에야 배우자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이러하다. 연애결혼은 오직 상대가 누구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사실은 연애 상대를 구할 때부터 그랬다가 결혼에까지 이어진다. 처음 상대를 봤을 때 외모, 신체, 성격, 지성, 능력 등 어떤 점이든 크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서로 좋아하게 된다. 또 그렇게 상대가 좋다보니 항상 같이 있고 싶어서 결혼한다.

문제는 결혼으로 이끌었던 매력적인 상태가 끝까지 변함없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거의 모든 경우에 매력이 줄거나 없어지며, 심지어 연애 때에 겉으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속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예컨대 가죽잠바 입고 오토바이를 몰아서 아주 터프한 줄 알았는데 순전히 자기를 꾀려는 위장이었고 오히려 소심하게 잔소리만 늘어놓는 타입인 줄 깨닫고는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다.

연애에서 가장 우선적인 선택 조건은 아무래도 외모다. 그러나 결혼해 생활고와 육아에 시달리며 나이가 들면 외모도 시들기 마련이다. 또 잘 몰랐던 다른 결점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외모만 중심으로 보았기에 다른 조건들은 무시 내지 간과했기 때문이다. 결혼이 단점과 허물이 숨겨진 지뢰밭에서 사는 셈이라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요컨대 연애결혼은 오로지 상대가 좋기 때문에 계속 함께 있으려는 시도다. 그런데 좋았던 점들이 줄거나 자꾸 다른 싫은 점들이 나타나면 함께 살아야 할 이유도 그만큼 줄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중매결혼은 어떠한가? 상대가 누구인가보다는 결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자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물론 집안, 학벌, 경제력, 성격 등이 서로 적절한지 맞춰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소 자기 이상형이거나 감정이 끌리는 매력적인 배우자를 만나 매일 구름 위를 걷는 듯이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꿈이 결혼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단순히 함께 가정을 이뤄보겠다는 목적이 최우선이다.

바꿔 말해 상대에 대한 기대치를 연애결혼에 비해 훨씬 낮게 잡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발견하는 장점은 아무리 작아도 좋게 보이는 반면에 단점이 나타나도 어차피 그러려니 했기에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자연히 결혼 생활 자체에 대한 실망감도 현저히 준다. 과년한 남녀가 연애하겠다는 것보다 결혼해 가정을 꾸리겠다는 것이 최우선인지라 중매결혼에서 이혼은 부모와 사회가 금하는 것 이전에 부부가 애초부터 꺼리는 일이다.  

결혼을 이어가는 동력(動力)이 연애결혼은 상대에게서 느끼는 매력인 반면에, 중매결혼은  가정이라는 관계 그 자체다. 결혼을 출발하는 동기(動機)도 전자는 서로 더 많이 오래 좋아하려는 것이라면 후자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자는 상대에게 실망하거나 싫어지면 헤어지기 쉽지만 후자는 어지간해도 그리 쉽게 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억지로 결혼한 신자

마찬가지로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도 연애나 중매결혼, 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신자가 하나님의 특정한 매력을 붙들고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금방 시들해질 수 있는 반면에 그분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우선시하면 어지간해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사업을 흥하게 해주시고, 자식을 일류 대학에 합격시켜 주시고,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일을 풀어주시고, 갑자기 닥친 환난에서 구출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너무나 좋다. 정말 매력적인 하나님으로 다가 온다. 그분이 없으면 당장에 죽고 못 살 것 같다. 신자 쪽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열심과 수고도 덩달아 아주 대단해진다.
      
문제는 연애결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항상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같은 문제를 두고 기도했더니 금방 해결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울부짖고 오래 기도해도 해결될 기미가 없다. 아니 사태는 더 심각하고 위험해지기만 한다. 한 가지 일만 그러면 다행이련만 다른 일이나 주변 여건마저 걷잡을 수 없이 꼬여만 간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읽어 보지만 별 은혜가 되지 않고 찬양을 불러도 감정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기도하고 싶은 생각마저 급격히 떨어진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믿음을 연단하려는가보다 참고 기다려보지만 차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닌지, 나를 잊고 계신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하고 주일에 교회 가는 일마저 짜증난다.  

하나님의 특정 부분에만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여러 품성 중에서도 전능성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분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실 때에는 한 없이 좋다가 조금만 등한히 하는 것 같아도 금방 싫증이 도진다. 심지어 찬양에 감정적 충만이 넘치고 기도와 말씀을 통해 은혜 받는 일에도 동일한 조급증은 발동된다. 뜨거운 종교적, 영적 체험이 없으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마저 냉각된다. 그분의 매력적인 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 보면 죽고 못 살 것 같아 결혼했지만 배우자의 단점들이 노출되면 금방 권태기가 오고 또 쉽게 헤어지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오히려 중매결혼과 같아야만 한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그것도 배우자의 얼굴도 전혀 못 본채 부모의 강요로 결혼한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찾을 생각도 없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아무리 하나님이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당신을 알 만한 것을 하나님이 저희 속에  보이도록 하셨고 또 창세로부터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했기에 전혀 핑계치 못함에도 그랬다. 인간 중에 의인은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었다. 그분과 완전히 등을 진 채 그저 쾌락과 죄악을 쫓아가기 바빴다.

하나님은 그런 와중에서나마 한 의로운 사람을 찾아오셔서 결혼하자는 언약(Covenant)을 일방적으로 맺었다. 인간은 지금껏 매력적으로 보이던 세상을 등지고 당신께로 향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그 이름을 창대케 해주고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신의 신부를 대적하는 자를 물리쳐 주고 신부가 밟는 땅을 전부 차지하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 불림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아브라함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최초 인간 아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만 하면 다른 모든 일은 임의로 할 수 있는 복을 베풀었다. 홍수 심판 후의 노아에게나, 출애굽 때의 모세에게나, 양치기 소년 다윗에게나, 당신께서 먼저 아브라함과 동일한 언약으로 인도하셨다. 당신과 결혼한 신부를 세상의 거룩하고도 의로운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 어느 민족도 보지도 알지도, 아니 상상조차 못한 큰 이적과 권능을 맛본 당신의 택한 족속조차 그 언약 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방의 우상과 결혼하거나 겉으로는 하나님의 신부인 척 하면서도 우상과 음란하게 바람을 피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더러 아내가 혼외정사로 낳은 아이들까지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여 키우라고 했다. 당신의 언약이 태초부터 한 점 한 획도 떨어지지 않았음을 그를 통해 계시하셨던 것이다.

급기야는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 오셨다. 당신의 변함없는 언약을 사람들로 직접 보고 듣고 만지게 하려는 뜻이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그러나 여전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요1:9-11)했다. 아니 영접 안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십자가의 완전한 중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은 생전에 스스로 선언한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또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약속한 대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리하여 성령의 권능을 입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했다. 그 전에는 죄악과 사탄에 묶여 스스로는 하나님의 언약에  도무지 참여할 수 없다가 이젠 넘치는 기쁨과 감사로 기꺼이 그분의 신부가 될 수 있었다. 나아가 다시는 이전에 좇았던 우상에게 눈길도 주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그리스도께서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히10:14) 해주신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엎드린 자는 깨끗한 흰 옷을 입은 하나님의 신부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결혼을 주선한 중매쟁이였다. 아니 당신이 바로 하나님 본체였으므로 사실은 그분이 신자의 신랑이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과정을 살펴보라. 하나님과 우리가 상호 좋은 점을 보고 이끌려 결혼한 것이 전혀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거나 찾지도 않았기에 그분의 좋은 점을 보고 이끌린 것도 사실상 아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고르시긴 했어도 우리의 좋은 점을 본 것도 전혀 아니다. 아니 우리에게 그분에게 매력적으로 비칠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그분을 볼 때나, 그분이 우리를 볼 때나 매력적인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분과 우리는 중매결혼, 그것도 신랑 쪽에서 무조건적으로 택하여 일방적으로 진행한 결혼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쪽에 그분에게 매력적으로 보일만한 구석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했다. 단지 우리를 지으셨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 심히 좋게 창조했는데도 사탄에 넘어가는 바람에 죄악의 비참한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나아가 아브라함에게, 아니 에덴동산에서부터 당신께서 세운 언약을 절대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본문을 보라. 당신이 생각하고 경영한 것은 반드시 이뤄진다고 했다. 단순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능치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신자는 사실상 없다. 또 그러지 못하면 사실상 하나님도 아니다.

본문은 당신께서 마음먹은 바를 이루지 않고 넘어가는 법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구약성경 전편에 걸쳐 수도 없이 예시, 상징, 예언, 약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때가 되면 틀림없이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마저 있다. 일차적인 뜻은 물론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한 나의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26절)이라고 했다. 당시 앗수르가 멸망한 것 하나로 온 세계와 열방 전부의 계획이라고 간주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십자가로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뜻이다.

어떤 사본에는 25절의 멍에와 짐을 제거해 줄 대상인 “이스라엘에게서”라는 말이 없다. 그럼 예수님이 수고하고 짐 진 자들로 당신께로 나오라고 하신 말씀(마11:28-30)과 자연히 연결된다. 또 26,27절의 내용과 견주어 봐도 앗수르는 흑암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담이 타락할 때부터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하신 그 약속이, 또 그 약속을 바탕으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에게 일방적으로 맺으신 언약이 때가 되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말씀을 주목해 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앗수르 같은 이방족속이 감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멸망시킬 수 없으며 도리어 자신들이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사탄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절대로 훼방할 수 없고 오히려 당신의 사역을 이루는 조역이 된다.

그럼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부인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10:28,29) 작금 기독교계 내에서도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과 완전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정말로 귀담아 들을 경구이지 않는가?

온전한 결혼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과 신자는 예수님의 일방적 중매로 결혼한 사이다. 하나님 쪽에선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사실은 당신의 독생자의 보혈로 맺어진 결혼이기에 그 관계가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이혼하자고 하거나 바람을 피울 리는, 사실은 따로 바람피울 대상도 전혀 없지만, 만무하다. 그분은 단지 그 관계를 더욱 아름답고 거룩하게 가꿔가길 원할 뿐이다.

그럼 신자도 그 관계를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기며 가꿔나가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분과 연애결혼한 양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주어야 자기도 사랑하려 한다. 심지어 자기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줄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열심히 더 사랑하면 당연히 그분의 사랑도 더 많이 받으리라고 오해한다. 그러지 못하면 심심찮게 그분의 사랑을 의심한다. 스스로 측정한 그분의 사랑의 강도에 맞추어 자신의 강도도 조절하려 든다. 그러다 자꾸 의부증 증세가 도지면 침묵의 시위를 하거나 잠시 별거하는 것도 예사다.  

바꿔 말해 그분을 오직 한 가지 이유와 근거 즉, 능치 못하실 일이 없기에 사랑한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면 경영한 것을 못 이루는 법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명명백백한 진리를 믿는 것을 두고 구태여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도 있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오히려 비정상일 뿐이다.

성경이 하나님이 능치 못하는 일이 없다고 선언하는 가장 중요한 뜻은 당신의 독생자마저 아낌없이 죄인을 구하려 죽이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신께 경배는커녕 도리어 배역하여 당신의 대적 사탄의 노예가 되어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죄인을 구하러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또 모든 굴욕과 핍박과 고난을 감수하고, 나아가 가장 저주 받은 모습으로 죽으신 것이야말로 당신의 영광에 비하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아니 인간으로도 능치 못하거나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 십자가의 도가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으로 비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5-8)

신자들이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교리로는 잘 믿는다. 그러나 처음 믿었을 때에 한번 이해하고 감격한 것으로 그친다. 이후의 실제적인 삶에는 적용을 잘 하지 못한다. 삶에 적용하라고 해서 언제 어디서나, 예컨대 일터에서도 성경 읽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연애결혼이 아니라 중매결혼으로 맺어졌고 그래서 절대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의 구원 교리를 부정하는 것만이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보혈로 화목케 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질 수 있다거나 최소한 변화 내지 수정될 수 있다고 이해 내지 염려하는 것도 십자가를 부인하는 셈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바로 나를 대신해 죽기까지 했는데 그럴 수는 결코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좋아서 그 좋음을 이어가자고 한 연애결혼은 싫어지면 그만이다. 중매는 처음부터 상대에게 장단점이 있음을 즉, 싫은 면도 인정하고 시작했기에 싫은 점이 보인다고 특별히 더 싫어지는 것도 아니고 구태여 헤어질 이유도 없다. 오히려 살아갈수록 서로의 장점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기에 정은 더 끈끈하고도 많이 쌓이는 법이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궁극적 목적이 있기에 서로 인내하며 어떤 고난이라도 함께 힘을 합쳐 이겨갈 수 있다. 연애결혼이 감정에 치우쳐 오르락내리락 하기 쉽지만 중매결혼은 훨씬 이성적 인격적이라 어지간해선 요동치지 않는다.  

결혼 주례사에 가장 단골로 등장하는 권면이 무엇인가?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로 양보하고 인내하며 함께 힘을 모아 잘 살라는 것 아닌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헤어지지 말라는 말은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부부에게 가정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단순히 결혼의 중요성과 이혼의 잘못을 강조하자는 뜻이 아니다. 죽음 즉, 생명 다음에 가정이라면 남편이나 아내나 각자의 삶과 인생보다 오히려 더 귀중한 셈이다. 대신에 자신의 삶과 인생이 가정보다 더 귀하다고 여기면 이혼은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할 수 있다. 성경적 결혼이란 부부가 되는 순간에 각자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기 전까지 그 새로운 하나로 가야 한다. 자식을 포함한 가정이야말로 하나님께 받은 이 땅에서의 그분의 기업이다. 또 그분의 뜻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맺어준 관계이므로 신자가 죽을 때까지 그 관계가 절대 끊어질 리가 없다. 자기 생명 다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아니 생명을 주고 앗음 또한 그분이 주관하시는 것이니까 당연히 그분이 모든 것의 출발이다. 신자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이기에 신자더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고 명하실 수 있다.

그런데도 신자가 그분이 해주시는 일에 일희일비하면 그분과 아직도 연애하고 있는 것이지 결혼한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분을 열심히 사랑한다고 해도 사실은 그분이 주는 보상을 바라고 하는 사랑이다. 혹시라도 결혼했다고 착각한다면 예수님이 당신의 보혈로 일방적으로 맺어준 중매결혼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능력만 보고 좋아서 스스로 결혼한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기념일마다 선물을 사주어야 남편으로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과 같다. 선물 받고 사랑하지 못할 자는 없다. 선물 없이도 항상 남편으로 존경, 감사, 사랑해야 진정한 사랑이다.
  
끊을 수 없는 관계라면?

신자가 하나님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면 그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젠 그분이 어떤 환난에서도 다 지켜 주시고 신자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시는가? 전혀 아니다. 사도바울이 그 관계를 다른 어떤 것보다 죄의 문제와 연결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구원 받고도 자꾸만 죄에 넘어가는 자신의 영적 가난함이 괴로워 한탄했다. 그러다 깨달은 바는  십자가의 은혜 안에 들어온 자신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 오히려 성령에 의지하면 죄를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는 부활의 소망도 갖게 되었다.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얼마든지 함께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말로 신자가 된 목적이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환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구원을 주신 이유가 신자로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 그 자리에 이르도록 세상의 어떤 것도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만약 끊을 수 있다면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성경은 지금 “영화롭게 하셨다”고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를 영접하여 의롭다 칭해줄 때에 이미 구원의 영광스런 완성을 하나님 쪽에서 확실하게 보장해 놓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우리와 먼저 일방적으로 중매 결혼하여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기에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권면이 있다. 신자도 당신을 목숨 걸고 사랑하라는 권면인가? 신자가 그분을 사랑해야 함은 십자가 사랑의 보답을 훨씬 넘어서는 차원이다. 하나님은 신자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어 기필코 영화로운 자리로 이끌어주시는 분이므로 정말 생명을 다해 마땅히 사랑할만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아 누리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1,12)

하나님이 때가 되어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생명을 바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해야 논리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또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표시라고 한다.

특별히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서로 사랑하라는 이유로 삼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본성이 바로 사랑이라는 뜻이다. 또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주위에 실천하고 있으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8절)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알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며, 서로 사랑하면 남들에게도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여기고 유지하라는 것이다. 또 다시 생명을 바쳐 사랑해야 한다고 너무 앞서 나가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과 연애가 아니라 중매결혼 했듯이 다른 모든 사람도 중매 결혼한 것으로 여기면 된다.

물론 그 중매쟁이는 하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남편이나 아내를, 가족과 친척을, 친구와 성도들과 맺어진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예수님이 붙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매해 준 사이이기에 신자 쪽에선 절대로 먼저 그 관계를 깨지 못한다. 예컨대 예수님이 이혼하지 못할 이유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19:6)고 말씀하셨지 않는가?  

사람 사이에도 좋은 일만 있어서 사랑해선 안 된다. 그러면 조금만 나쁜 일이 생기면 순식간에 그 관계에 금이 가고 깨어진다. 상대에게 잘해 주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지만, 사실상 뒷전이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모든 자와의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는 것만이 목적이 되는 것이 더 우선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종들이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며, 상전도 종을 사랑하는, 그 모든 일들을 오직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했다.(엡5:22-6:9) 기도의 응답과 관계없이 주님 그분만 사랑해야 하듯이, 최소한 상대와의 관계를 절대 깨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헌신의 바탕에서 남을 대해야 한다.

사랑에 대한 환상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너무 분홍빛 환상을 갖고 있다. 불신자는 애틋하고 충만한 감정이 수반 되어야, 신자는 거기에다 숭고한 희생정신까지 첨부해야 사랑이라고 간주한다. 물론 옳긴 하지만 우리 모두는 사실 그 정도로 사랑할 실력이 턱없이 모자란다. 심지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마저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데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죄의 본성까지 남아 있는 인간끼리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에 성경이 사랑을 설명하는 중에 가장 두드러진 특성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13:4)로 시작하여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절)로 마친다. 한 마디로 상대를 참아 주는 것이다. 둘 사이에 감정이 충만해지라거나 서로 잘 섬기라고 하지 않았다. 그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부부가 가정을 아름답게 가꿔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유일한 비결이다.

신자더러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핍박하고 멸시하는 원수라도 어쨌든 하나님이 붙여준 자라는 것이다. 원수와 신자 사이에 예수님이 중매쟁이로 개입되어 있다.

원수까지 구원할 지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모른다. 그보다 당신의 자녀를 당신께서 영화롭게 만들어나가기 위해 그 원수를 만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참 사랑이 무엇인지 배워서 다른 사람에게도 똑 같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원수마저 끝까지 참으면서 그 관계를 끊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나 쉽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잇는 영원한 중매쟁이다. 그분과 우리는 세상 어느 것으로도 끊을 수 없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는 모든 사람, 겪는 어떤 사건에도 그분의 사랑과 권능이 함께 하지 않는 법도 절대로 없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적 환난이 겹쳐도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환난을 통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

다른 말로 신자에겐 도무지 두려울 것이라곤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당신의 신부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신부를 아름다고 거룩하게 꾸며줄 책임은 그분에게 있다. 신자는 오로지 자신이 그런 관계로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 관계를 정말 아름답게 이어갈 소원만 더 키우면 된다. 이벤트를 꾸미고 선물을 주시는 것은 전부 그분의 책임이다.

그럼에도 선물이 없다고 남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 붓고 잘못한 결혼이라고 후회하면서 별거 내지 이혼의 여지가 생긴다면 법적으로는 몰라도 내면적으로는 온전한 결혼이 아니다.  조건부로 잠시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과 연애 결혼하겠다고 덤빈 결과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부를 예수님의 십자가 강제 중매로만 선택하시고 받아들이신다.

혹시라도 당신은 지금 하나님과 열심히 연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말로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결혼을 했다 이혼했다 반복하지 않는지? 아니면 그분과 이미 중매 결혼한 사이임을 정말로 확신하고 있는가? 그래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그 관계를 아름답게 가꿔가고 있는가?      

6/27/2009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5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 운영자 2009-11-16 677
24 예수님은 Role Model이 아니다. 운영자 2009-11-16 417
23 어떤 이상한 감옥 운영자 2009-11-16 333
22 온전케 하는 주님만 바라보라. 운영자 2009-11-16 415
21 할례의 신기한 능력 운영자 2009-11-16 378
20 누가 나를 죄로 책(責)잡겠느냐? 운영자 2009-11-16 436
19 거룩한 기억상실증 운영자 2009-11-16 408
18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 운영자 2009-11-16 467
17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는 예수님? 운영자 2009-11-16 342
16 로마에는 꼼짝 못한 비겁한(?) 예수 운영자 2009-11-15 430
» 영원한 중매쟁이 예수님. 운영자 2009-11-15 415
14 Simply Good, Jesus 운영자 2009-11-14 427
13 당신의 비석(碑石) 명은? 운영자 2009-11-11 469
12 예수님의 진짜 이름을 아는가? 운영자 2009-11-10 531
11 성경에 추잡한 사건이 많은 이유 운영자 2009-11-04 447
10 가나 혼인잔치의 또 다른 비밀 운영자 2009-10-30 675
9 교회 내 법 없는 자들의 횡포 운영자 2009-10-30 495
8 예수가 하나님인 진짜 이유(2) 운영자 2009-09-22 550
7 예수가 하나님인 진짜 이유(1) 운영자 2009-09-22 642
6 예수는 아빠가 둘이었다. 운영자 2009-09-22 615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