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상한 감옥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하나님과 예수 중에 누구를 믿는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 황당한 질문을 드렸습니까? 그럼 질문의 범위를 좁혀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까? 더 말도 안 되는 질문 같습니까? 두 분 다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데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질문이 뚱딴지같은 것이 아니라 본문이 제기하는,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제기하는 신앙상의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바울 사도가 자기 형제 친척 즉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소원하면서 그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복은 몽땅 다 받았다고 합니다. 우선 하나님을 아는 거룩한 백성이자 양자로 선택 받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도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통해 자기 민족의 장래를 보장하는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이룰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전수 받았습니다. 족장시대 이래로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율법대로 살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약속을 소유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믿는 자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예마저 얻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민족도 누리지도, 알지도, 심지어 상상조차 못하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니 오히려 부족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부족하다고 합니까? 바울이 자기는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죽어서 지옥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대신에 너희들만은 제발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서독 대사 겸 연방정부 고위 관료로 유대인이었던 아더 번즈가 백악관의 아침 기도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자기가 기도할 차례가 되자 “주님 유대인들로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옵소서. 회교도인들도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옵소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하나님만 믿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과 그 기도에 진정으로 동의합니까? 본문이 진리임을 확신합니까? 그럼 정말로 믿는지 한 번 테스트 해볼까요? 예수를 알지 못하는 주위의 형제 친척을 보면 내가 죽어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제발 예수를 믿길 바라는 애끓는 심정이 듭니까? 또 그런 심정이 큰 근심으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항상 남아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은 믿는데 아직 예수는 잘 모르는 교인을 보고서 말입니다.
본문을 역으로 말하면 유대인이 받은 그 모든 은혜가 다 없어져도 예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는 신앙에 절대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가지라고 자기 생명을 걸면서까지 애절하게 호소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예수를 믿는 신앙이 과연 어떻게 다릅니까? 어떤 측면에서 그 둘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까?
이상한 감옥과 죄수
닉슨 대통령 시절에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간 찰스 콜슨이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회심을 한 후에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해서 전 세계의 죄수들을 전도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인도의 어떤 형무소를 방문하여 죄수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높은 연단 위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죄수들은 복음을 거부하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듣는데 그곳의 죄수는 좀 특이했습니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고 비굴할 정도로 순순히 복종하며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콜슨이 “예수님은 어떤 흉악한 죄인도 용서하십니다. 지금도 살아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라고 설교하자 갑자기 모두 눈이 휘둥그레 해지면서 크게 놀랬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눈물 흘리며 우는 자들도 나왔습니다. 그곳은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untouchable)의 죄수들만 모아놓은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도는 지금도 Cast 라고 4백 개가 넘는 계급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낮은 계급은 너무나 비천하고 더럽다고 여겨서 사람들이 아예 접촉도 하지 않고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감옥에서도 화장실과 수도 시설조차 없이 비천하게 대우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인도 사회에선 영원히 추방자로 살아야 했고 할아버지 아버지 자손 대대로 세습되었기에 그 신분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은 제로였습니다.
나아가 힌두교에선 모든 사람이 전생의 업보를 안고 이생에 다시 환생한다고 믿습니다. 말하자면 이 땅의 삶은 전생에 지은 죄를 갚아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로선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서 (이 땅에 죄 값을 갚으러 다시 올 필요 없이)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 인생에 소망의 빛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콜슨 목사에게 갑자기 “연단에서 내려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성령의 미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설교단에서 내려가 그들과 악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간수들과 경비병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죄수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그렇게 더러운 놈들과 악수를 한다는 것은 자기들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해선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수들은 간수들의 제지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하나 둘씩 몰려와 너도 나도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에는 시체는 부정하니 절대 만지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 죄수들은 나면서부터 시체로 살아왔던 셈입니다. 시체끼리만 교제하던 자들이 평생 처음으로 따듯한 피를 지닌 진짜 인간을 만져본 것입니다. 비로소 자기들이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진짜 인간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인도 감옥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를 하려고 비슷한 예를 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납니다. 조상들의 죄가 자동적으로 유전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단이 인간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이 세상을 죄악과 죽음으로 조종하고 있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접촉할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그분의 의를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선(善)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악(惡)은 아주 가까웠습니다. 나면서부터 영적으론 시체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졌기에 쥐꼬리 같은 양심은 남아서 선을 행하려 노력은 많이 해보았습니다만 성공한 적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탐욕과 갈증과 허무를 메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솔로몬처럼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차지해도 그렀습니다. 바울 사도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 즉 그는 “예수 없이는 세상의 왕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라도 당장 그 보좌에서 내려와 만왕의 왕이자 참 왕이신 예수를 믿으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없는 인간은 사단이 죄악과 사망으로 울타리 쳐놓은 흑암의 감옥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헛되고 헛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올라가는 종교와 내려오는 종교
여러분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와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타 종교에선 인간의 공적과 치성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선하기에 노력하면 스스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력(自力)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종교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의 내면이 철저하게 썩었으며 사단에게 묶여 있기에 절대로 스스로는 그 감옥에서 탈출 못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 당신께서 세상에서 칭찬 받는 의인들이 아니라 사단의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구원하려 직접 이 땅에 내려온 종교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는 누가 더 착하게 사는지 경쟁하거나 아니면 서로 존중하며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서로의 출발이 완전히 정반대로 다르기 때문에 종착점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틀린 것입니다. 불신자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진리가 틀림없다는 것만이라도 인정해야 합니다. 다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타 종교인들과 불신자들도 하나님은 인정합니다. 심지어 유일신 창조주도 믿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해질 수 있다고 자신하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며 유독 기독교를 싫어합니다. 자기들더러 죄인, 그것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데 좋아할 리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제대로 믿는 신자라면 세상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8:2)라고 치료를 요청했습니다. 흔히들 그가 “원하시면” 즉, 예수님이 말로만 해도 아니 속으로 원하기만 해도 문둥병을 치유할 능력을 소유한 분이라고 믿었다는 그 믿음에만 초점을 둡니다. 물론 대단한 믿음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간과해선 안 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율법에도 규정되어 있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선 불가촉천민에 해당됩니다. 사회에서 격리 수용되어 자기들끼리만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 날도 사실상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 받은 존재로 구원과도 아예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8:3) 고쳐주었습니다. 고름이 질질 흐르고 썩어 문드러진 코와 손마디에 예수님은 직접 손을 댔습니다. 이 세상에는 없는 하늘의 절대적 사랑으로 어루만졌습니다.
또 나으라고 하지 않았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문둥병이 네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네 아비나 그 조상의 죄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본체시라 현대에도 불치병이나 다름없는 문둥병을 고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이 그분의 영광입니까? 천지 만물을 말씀 하나로 창조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며 생명 자체를 주관하시는 분에게 문둥병 정도 고치는 것은 정말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전지전능하심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당신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대신 죽으시는 것이 영화롭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바로 이것, 즉 십자가에 드러난 영원한 참 생명의 광채뿐입니다.
그분의 보혈의 공로를 확신하는 자는 더 이상 불가촉천민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한 말은 “나는 단지 너의 병만 고쳐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너를 그 더럽고 추한 자리에 계속 머무르게 할 수는 절대로 없다. 네는 죄 사함을 받아 얼마든지 거룩하고 의롭고 신령한 자가 될 수 있다. 이제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 안에선 죄인, 세리, 창녀, 고아, 과부, 문둥병자, 앉은뱅이, 소경, 귀신들린 자 들의 구별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중에 그분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깨끗함을 주기 원하지 않는 자도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대신에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그 수고와 짐을 다 내게 맡기라”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고 또 실제 경건하게 사는데 둘 째 가라면 서러운 유대민족이 구원을 얻는데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족속이라는 사실만 붙들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타 민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렸고 양념의 십일조까지 바쳤으며 구제와 선행에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또 선하게 사는 데는 정말 세계에서 일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나 깨나 하나님께 바라는 소원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 더 풍성하게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반면에 인도의 그 이상한 감옥의 죄수들이나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한 문둥병자의 평생소원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 응답 받아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빼앗겨도, 아니 빼앗길 것도 없었지만, 그만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평생을 불가촉천민으로 사는 것도 감수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오직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참 사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시체로 태어나, 또 시체로서 평생을 허무와 갈급한 가운데 살다가, 마지막까지 시체로 죽기는 너무나 억울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과 죄악과 흑암뿐인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아름답고 진실하며 선한 것이 정말 없느냐고 절규했던 것입니다. 영원한 빛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서 몸부림친 것입니다.
기꺼이 죽을 이유가 있는가?
여러분 정말 이해타산과 감정적 친밀도를 속에서 다 제거한 후에 텅 빈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십시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다 불쌍하고 애처롭지 않습니까? 현실적 경제적으로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모두의 심령에 상처, 시기, 질투, 눌림, 초조, 염려, 분노, 저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영혼에 고름이 질질 흐르고 썩어 들어가는 심령을 저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그 부패한 곳에 직접 손을 내밀어 대셔야만 깨끗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이국땅으로 부르시고 이민 교회로 모이게 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생소하고 힘들며 사방이 꽉 막힌 곳이지 않습니까? 서로 참 사랑으로 힘을 합쳐야만 그나마 생존이 가능 한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정말 억지로라도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여건 안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민 교회 안에 더 상처와 분쟁이 많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다들 하나님만 혼자서 열심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살기 힘들고 어렵다는 핑계로 그저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 애씁니다. 교회 봉사 성실히 했다는 구실로 왜 내가 아직 이 모양 이 꼴이어야 하느냐고 하나님에게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기 바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유대인처럼 나는 은혜 받을 자격이 충분한데 왜 안 주느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이 내 소원대로 해주면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만들어 놓은 감옥에서 탈출해 나왔을지는 몰라도 우리 스스로 종교적 열성으로 울타리 쳐진 이상한 감옥을 만들어서 들어 앉아 있는 셈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진짜 실체가 어떠한지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세상과 사람에게서 입은 손해와 상처만 들고 나와 고약과 반창고만 발라달라고 징징 짭니다. 거룩과 의와 선을 갈망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 아래 자신의 전부를 발가벗겨 내어드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인생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이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분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내면의 자아가 철저하게 완전히 부서져야 합니다. 자기 속에선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나올 수 없으며 모든 선한 것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나라는 존재를 하나님이 왜 이 땅에, 그것도 지금 현재 이 모양 이 꼴로 보내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에 대한 나의 계획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내 삶의 소망과 가치를 과연 어디에 둘 것인지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이 땅은 절대로 환난과 상처가 끊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염려와 고난이 한시도 그치지 않습니다. 잘 믿는다고 세상에서 항상 형통한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은 항상 그렇습니다. 미국 이민 와서 사는 우리에게는 그 어려움이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것 하나만 붙들고, 그것 하나만을 위해서 살며, 또 그것 하나만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서 붙들어야 합니다.
그 절대적 진리는 전 우주를 통 털어 딱 하나뿐입니다. 존귀한 하나님 본체인 예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불가촉천민에 불과했던 나 같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에게 당신의 사랑으로 아무 조건 없이 깨끗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셔서 거룩과 의와 선으로 열매 맺는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죽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자는 제대로 살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자입니다. 모든 인생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잘 죽도록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잘 사는 것입니다. 어떤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며 죽을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인생은 항상 허무해질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죽을 준비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을 자신이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시어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염려 불안 초조에 괴로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하늘의 거룩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기에 이 땅은 단지 나그네로 지나갈 뿐입니다.
하나님만 믿는 신앙은 자기의 잘난 것으로 하나님께 들고 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받아 내려는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으론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때로 응답이 되는 까닭은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잘 모르기에 알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이 땅과 각 인생을 주관하는 이가 따로 있음을 확신시켜 주려고 응답해 준 것일 뿐입니다. 계속해서 자기 뜻대로만 이뤄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목적과 계획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한테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고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처음 얼마간은 기도 응답이 되겠지만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가 노력해서 얻으려 할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러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소원하는 것은 오직 그분의 거룩과 의와 선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를 깎고 깨고 부수어 계속 낮아지기만 하면 또 자기 속의 더럽고 추한 죄악과 탐욕을 버리기만 하면, 그 낮아지고 버린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자동적으로 채워짐을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바뀐 인생이 너무 귀하고 아름다워서 더더욱 그분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싸움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평생을 두고 지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 얼마든지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것은 그 환경과 여건을 풍성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자신이 더 거룩하고 신령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범사가 잘 된다고 영혼이 잘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어떠하든 감사하게 되고 풍족하든 궁핍하든 이겨낼 수 있는 법입니다. 비록 우리가 때로는 나태해지고 세상을 향한 욕망이 다시 꿈틀거려서 그분의 의와 거룩을 외면할지라도 하나님 당신께선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도록 필요하다면 환난을 당케 해서라도 우리를 기어이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종교적 열성이 어느 정도이건, 도덕적 품성이 어떠하든, 믿음이 얼마나 뜨겁든, 영성이 어떤 상태에 있든 간에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특별히 신자를 다루는 원칙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11/18/2007
(LA 아름다운 교회 주일 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