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Role Model이 아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6)
워싱턴 포스트 신문사에는 정치가, 학자, 영화배우, 운동선수 등 모든 유명 인사들의 자료를 모아 놓은 인물자료보관실이 있는데, 예수님은 순교자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어떤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구원 받은 이후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새로운 인생의 목표는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이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각기 신앙생활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칫 잘못된 평가를 하면 잘못된 신앙의 길로 빠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고 이단 교파에 빠져 있는 신자가 아닌 한 전혀 엉뚱한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반면에 마치 예수님을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인 역할모델(Role Model 이하 R/M)로 국한시켜버릴 위험이 상존한다는 뜻입니다.
R/M이란 항상 어떤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자기의 R/M로 삼는다는 것은 자기도 그 분야에서 그런 위치에 오르고 싶어서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농구선수는 마이클 조단을, 벤처기업가는 빌 게이츠를, 정치지망생은 빌 클린턴을 자기의 R/M로 선정해 모든 면에서 그 사람이 했던 대로 따르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R/M로 삼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주로 예수님의 어떤 특정한 분야만을 강조해서 그분의 정체성을 평가합니다. 도덕선생(랍비), 성결한 삶을 보여준 은둔자(에세네 종파), 극단적 진보주의 개혁파(열심당원), 구제와 자선에 힘쓴 사회사업가, (워싱턴 포스트 신문사처럼) 정치적 음모에 희생된 순교자 등등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평가에 바탕을 두면 그분을 닮아가는 신앙생활도 당연히 한쪽으로만 경도되기 쉽습니다. 가장 좋은 예로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같이 예수님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구제해준 분으로만 평가해 자기들도 평생을 두고 그런 일에만 전념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것으로 마치 봉사가 코끼리 만지듯 한 것입니다. 코를 만져보고는 긴 파이프로, 귀는 큰 부채로, 다리는 기둥으로 오인해서 코끼리의 모형을 단지 그렇게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전부를 합쳐야 코끼리의 완성된 모형이 만들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모든 평가를 다 망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면을 다 갖춘 초인(Super Man)이란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한 인간을 두고 한 인간이 평가해선 어차피 특정 분야에 뛰어난 R/M 이상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 혹은 다른 우수한 사람과 비교하고, 또 비교하려면 반드시 어떤 구체적 기준들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신자가 평가할 때도 성결한 삶, 순종하는 삶, 기도하는 삶, 전도하는 삶, 구제하는 삶 등을 나눠 평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분야에서 닮고 싶은 부분만 뽑아내고 강조해 R/M로서의 특정한 이미지를 그리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이 그런 식의 평가를 받아도 되는 것입니까?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었지 않습니까? 나아가 주(主, My lord)라고 했습니다. 나의 모든 삶과 살고 죽음을 주관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과연 우리 삶의 R/M로 삼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결코 없습니다. 오직 나의 전부를 그분께 내어드리는 것 외에 우리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기준으로 역사가 둘로 나뉘었습니다. 전 인류의 삶에 그분만큼 영향을 끼친 자는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특정 분야에 모범을 보인 것이 아니라 도저히 셀 수조차 없는 인간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한 개인이 그분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평생도 그분을 기준으로 둘로 나뉘며, 전체 삶의 여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며, 존재 자체가 바뀝니다.
다른 말로 그분은 우리 각자를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야 하는 모습으로 완전히 바꾸어주는 분이지 특정 분야에 전문가로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부터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 즉 존재, 삶과 생명마저 걸었습니다. 우리의 전부를 당신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특정분야의 R/M로 서기만 원했다면 그렇게 하실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바꾸고자 했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은 바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마음 놓고 부를 수 있는 자이지, 자선사업가나 사회개혁가나 도덕선생 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심히 아름답게 만드신 후 함께 동행 했던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분과 세상 앞에 부끄럽거나 두렵지 않은 그런 존재로 바꾸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자기의 주로 입술로만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고백하며 그렇게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땅에서부터 아무리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등불도 “화관으로 재를 대신하고,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는 자”(사61;3)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삶의 모든 부분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넉넉히 승리하기에 죄악과 사단과 사망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R/M이 아니라 그야말로 주입니다.
그런데도 간혹 신자들 가운데도 심지어 예수를 따르기 보다는 슈바이처나 테레사를 자기 R/M로 삼고 있고 강대상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그분들의 생전 업적을 평가절하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신앙 자체는 높이 평가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실제로 슈바이처는 인간 예수를 믿은 자유주의 신학자였고 테레사는 카토릭 신자였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 안에서 완전히 그 인생이 바뀐 자가 자기의 은사와 재능을 활용하여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또 그 분야에서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하셨던 “태도나 모습 등”을 모범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 당신이 신자의 R/M”이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자도, 도덕선생도, 사회개혁가도, 순교자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신자가 그분을 R/M로 삼을, 아니 닮으려고 노력해야 할 유일한 모습은 십자가에 죽으신 죄인을 향한 사랑과 희생입니다. 십자가 없이 그분을 닮으려고 아무리 따라봐야 그 모든 것은 인간적 공로요 개인적 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 앞에 붙는 칭호가 무엇입니까? 성자(聖子)아닙니까? 인간에게 과연 그런 칭호가 붙을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 붙을 유일한 칭호는 이 땅에서 어떤 큰 업적을 남겼든 말았든 오직 예수 안에서 용서 받은 죄인 아니면 예수 밖에서 아직 용서 받지 못한 죄인 두 가지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또 자신의 평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예수 안에서 용서 받은 죄인으로만 평생을 마치기를 기뻐하십니까? 혹시라도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까?
8/22/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