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인 채로 남을 기독교 신앙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9-11)
예수님의 재림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하는 신자가 많습니다. 상상만 해도 정말로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우주선이 날고 첨단통신기술로 지구촌 어떤 오지의 일도 곧바로 전 세계에 실황화면으로 중계될 수 있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재림의 모습에 관해선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4:16)라는 설명이 거의 유일하지만 본문에도 유사한 힌트가 나옵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으니 반대로 유추하면 됩니다. 두 구절이 동일하게 뜻하는 바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공중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문제는 자꾸 호기심과 상상력이 발동되어 UFO 같은 그림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공중에서 재림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가시적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확연히 보고 알 수 있는 모습입니다. 당연히 육체의 모습을 갖추고 오시되 신천신지에 적합한 신령한 육체일 것입니다. 초림의 부활 때도 제자들이 문 닫고 모인 방에 홀연히 나타나셨고 또 엠마오의 제자들이 미처 못 알아보았듯이 신령한 부활 신체의 예표를 드러내었지 않습니까?
초림의 육신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인을 구원하기에 합당해야만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고통을 직접 체휼하고 죄악에 시험 받아야만 하는 인간의 육신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까지 완악하게 당신을 거부하는 자들을 심판하고 또 그때까지 복음 안에 남아있는 자를 완성시키러 오시는 재림의 육신은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은 완전히 독생자 하나님다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습과 그 모든 역사는 인간의 너무나 어리석고 짧은 지식으로는 가히 짐작도 못하는 신비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신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 당신의 재림은 특별히 더 그럴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열성적이고 과도한 관심이 바로 성숙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진짜 그 관심만한 세기와 열정을 가지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또 그런 류의 관심은 그분의 하나님다우심을 제대로 확인하여서 그분을 온전히 경배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 아니라면 전혀 무익할 뿐입니다.
그런데 초림 시의 승천 기사에도 우리의 그 쓸 데 없는(?) 호기심과 상상력이 여전히 발동되려니 문제입니다. 과연 얼마만한 높이까지 올라가 사라졌을까?, 얼마나 빠른 속도로 올라갔을까?, 높이 올라갈수록 추울 텐데 과연 보호 장치 없이 올라갈 수 있었을까?, 올라가면서 제자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을까?, 등등 온갖 그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실체는 당신만의 신비 가운데 영원토록 머물러 있기에 인간에게도 영원토록 신비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신비에 속한 것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더 깊이 알려고 해선 안 됩니다. 알고 나면 관심은 물론 믿음까지 떨어진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의 신비는 아무리 해도 알 수 없기에 괜한 상상으로 오히려 온전한 경외감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뜻입니다.
승천을 바라보는 제자들도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다가 천사들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빨리 가서 예수님 말씀대로 기도하면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독려한 것입니다. 동시에 제자들의 인간적 기대나 관심은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받아 누리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독이 될 뿐이라고 깨우친 것입니다.
제자들로선 승천은 그야말로 신기하고 놀라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활보다 더 충격적이었을 수 있습니다. 완전히 죽었던 회당장의 딸은 물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세마포에 감긴 채로 무덤에서 불러내어서 살리는 이적을 그들은 이미 목격했습니다. 또 수차 당신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스승의 부활에 놀라워는 했겠지만 이미 상당히 준비된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당시에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서 공중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정말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었습니다. 폭풍우 가운데 물 위를 걸으신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물 위를 걸을 때는 어쨌든 발을 디딜만한 받침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 계속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 디딜 물체 하나 없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은 진짜로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면 하늘로 거꾸로 올라가는 것도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꿔 말해 네 복음서에 기록된, 특별히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가르침을 실제 증험으로 단번에 확증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그 정신까지 당신의 몸으로 완성시켰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 가르친 내용도 당신의 몸으로 완성시킨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을 때는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도 못했던 천국의 영적 진리를 승천하시는 모습으로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완전한 확신 가운데 서서 어떤 핍박이 닥쳐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실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 조처였던 것입니다.
승천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지상 사역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각종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치료해주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상처 받은 자의 한숨과 눈물을 닦아주시며,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저주 받은 죽음을 대신 담당하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던 그 동안의 모든 지상 사역의 의미를 한 마디로 정의(定意)하신 것이 바로 승천 사건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3-15)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대속 죽음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을 바로 인자가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 사건으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끔 최종적으로 보증하신 것입니다.
나면서 소경 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어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그 소경은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어 이 땅만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까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 이후로, 또 앞으로도 영원히 인자가 공중으로 올라가 사라진다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오신 이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다른 가능성은 절대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혼자 스스로 떠서 공중 높이 오를 수만 있다면 즉, 자기 노력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도 아니며 누구라도 성경의 모든 기록을 부인 거부해도 무방합니다.
십자가 처형 직전의 마지막 날 밤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요16:5,6) 지금 승천하기 직전에도 제자들이 여전히 그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로선 부활하신 스승이 자기들과 끝까지, 최소한 로마가 무너질 때까지라도 함께 있어주실 것이라고 착각 내지 기대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바로 그 생각조차 틀렸음을 가르치기 위해 모두 보는 앞에서 인자의 모습으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지금이 너희와는 인자로선 마지막 만남이며 이후로는 완전한 이별임을 확실하게 깨우치시려는 것입니다.
제자들 보는 데서 하늘로 올라가신 가장 기본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간단합니다. 제자들도 이후에 올라갈 데가 분명히 있음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땅과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궁극적 진리인 당신의 모든 가르침을 승천으로 마감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지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온전한 참 실체로서의 천국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한 고대 문서가 “우리가 들어갈 통로를 마련하고 우리가 머무를 곳을 준비하시러 육체로 승천하셨다”고 기록한 그대로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하늘에서 내려오신 바로 그분이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승천을 영어 한절로 설명하면 “See you again, very soon!”입니다. 당신께서 떠나심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이 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제자들로 깨우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십자가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온전하게 확신케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늘에 각자의 처소가 이미 마련되어 있음에 전혀 의심치 않게 해주어서 세상의 어떤 핍박과 멸시와 환난 가운데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활과 승천의 현장에 참여하였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선 예수님처럼 어떤 박해에도 끝까지 견디는 담대하고도 신령한 여생을 보냈지 않습니까? 또 그 이유는 이미 완전히 확보된 천국의 자기 처소를 소망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스승의 승천을 염려와 함께 하염없이 신기해하며 바라보다가 천사의 꾸중까지 들었던 자들이 말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주님의 승천은 성육신, 사역, 가르침, 십자가 죽음, 부활 그 모든 것의 마침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도착지점이 천국의 처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예수를 믿은 자 모두는 육체의 부활과 함께 신천신지에서 주님과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입니다. 물론 그 전의 이 땅에선 천국에 내 이름의 문패가 달린 처소가 이미 마련되어 있기에 세상의 어떤 환난과 핍박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기독교가 참으로 큰일입니다. 이미 천국 처소를 소유했기에 영원히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는커녕 죄에서 구원조차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유와 그에 따른 믿음의 소망을 아예 모르거나, 믿지 않거나, 알고 믿으면서도 구태여 외면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땅의 궁핍과 멸시와 박해가 너무 싫고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단지 이 땅의 문제와 상처를 일시적으로 치유해주기에 바빠졌습니다. 예수 믿는 신앙은 절대 그렇게 가볍거나 가난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자기 처소를 그리며 이 땅에서부터 거룩하고도 아름다우면서 넉넉하게 승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침표인 천국, 재림, 부활이 빠진 기독교는 끝까지 미완성인 채로 남을 것입니다. 최근의 세태가 흘러가는 모든 양태만 보아도 천국 소망 없이는 솔직히 넉넉한 승리는커녕 신앙을 유지하는 일조차 힘들지 않습니까?
8/1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