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에서 해방되어라.(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예수 믿은 후에 누구나 느끼는 영적 현상은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영혼이 부패하여 죄가 죄인 줄 몰랐을 뿐 아니라 죄를 좇고 즐기기 바빴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양심은 물론 있었지만 오로지 자기중심적으로 작동했기에 온전한 의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 그마저도 자기 자랑에 불과해 하나님 보시기엔 죄였을 뿐입니다.
구원 후에는 성경, 특별히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절대적 의에 비추어 무엇이 죄인지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내주하신 성령님이 신자가 미처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거나 더러움에 가까이 가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기에 영적 눌림과 깨우침이 생깁니다. 죄에 대한 이런 민감함이 없다면 사실상 거듭남 자체마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민감함이 지나쳐 죄책감에 너무 빠져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하나님 앞에 성결해지려 열성적으로 노력하다가 아주 작은 죄만 지어도, 혹은 죄 짓고도 곧바로 회개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심하게 자책합니다. 나아가 혹시 그분의 징계나 심판을 받을까, 심지어 구원이 취소되지나 않을지 두려워합니다.
본문은 그런 염려는 아예 틀렸다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신자라면 어지간히 다 알고 있는 영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납득하는 정도로 그쳐선 죄책감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합니다. 진리란 반드시 자신의 체험으로 실증되어져야 합니다.
물론 다시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죽어서 천국에 가봐야만 완전히 확증될 성질입니다. 그런 체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이 자신의 전인격을 걸고서 절감되어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뼈저리게 깨우쳐져야 합니다. 또 성령으로 거듭나는 자라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에 바탕을 두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7장은 믿은 후에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바울 자신의 비통한 고백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2-24)
그래서 그가 얻은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의 법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 언뜻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내용 같습니다. 구원 후에도 죄를 짓고 있는 영적 피폐함의 해결책이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길 것이며 또 그러는 것이 감사하다는 투이니까 말입니다.
바울이 모든 죄를 용서해주는 복음 안에 들어왔으니 계속 죄짓겠다든지,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육신적 연약함으로 인해 성화는 포기하고 단지 감사만 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 인간의 그런 연약함의 원인과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우선 인간의 본성 안에 숨겨진 죄의 권세가 너무나 강함을 체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열심과 의로운 행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력을 경주했어도 여전히 죄의 법이 자기를 묶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호라 곤고하고도 죽을 몸이라고 처절하게 고백할 만큼 죄와 계속해서 씨름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스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죄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철저한 자각이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져주지 않았다면 자기 인생에는 도무지 소망이라곤 없었다는 고백이 저절로 입술에서 새어나온 것입니다. 자기 속에 선한 것이라곤 단 한 톨도 발견할 수 없음을 알고선 자아가 완전히 다 부서져나간 처절한 실망의 탄식입니다.
그와 동시에 십자가의 광채가 자기 영혼 깊숙이 비춰져서 그 더럽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신 주님의 사랑을 양껏 체험했다는 환희에 찬 외침이기도 합니다. 자기 의지로 시행한 도덕적 반성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이 간섭하여 저절로 터져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영적 실체가 너무나 가난함에 대한 애통함과 그 가난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 예수님의 긍휼을 가슴 가득히 느낀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죄는 절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용서와 성령님의 지속적으로 깨끗케 해주시는 능력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신자가 죄책감에 묶일 이유는 없습니다. 영적 회개를 그만 두라는 뜻이 아니라 정죄감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마저 몸으로는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자인하면서 오직 예수님에게서 소망을 찾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같은 범인이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면 너무나 큰 교만이자 위선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해결해 주신 문제를 그분은 제쳐둔 채 자꾸만 자기 능력 즉, 제 딴에는 높다고 자부하는 도덕성으로 다시 깨끗케 만들 것이라고 끝까지 끙끙대고 있는 꼴이니까 말입니다.
바꿔 말해 중생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에 자신의 전인격을 걸고 반응했던 적이 있는 자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전혀 의심치 않습니다. 자아가 완전히 부서진 상태에서 예수님 외에는 속수무책임을 철두철미 느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은혜와 권세는 세상의 어떤 죄라도 덮고 남을 만큼 무한함을 압니다.
“나 같은 죄인”을 왜 사랑해주시는지 그 까닭은 몰라도 분명히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은 지성, 감성, 의지를 통해서 확실히 또 풍성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아니 그 앞에 서기는커녕 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하게 됩니다. 이처럼 실제로 성령이 간섭하면 일회적이든, 점증적이든, 때로는 반복적이든 자아가 완전히 깨어진 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차는 체험을 반드시 하게 됩니다.
당연히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자 생명이라는 고백이 아무 주저 없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이 자기를 대신해 죽으셨기에 더 이상 어떤 것으로도 그 대속의 은혜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영원토록 살아있는 절대적 진리가 됩니다. 또 그런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 외에는 이 땅에선 아무 소망이 없음도 날마다 순간마다 체험하기에 죄책감에 묶일 이유가 전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 이후에는 분명히 죄에 아주 민감해지긴 했지만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되지 못할 죄가 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설령 너무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쓰러졌더라도 미쁘신 그분 앞에 담대히 나오기만 하면 당신의 거룩한 의로 덧입혀 주심도 수도 없는 체험을 통해 알게 됩니다. 죄책감은 자연적 반응으로 따르지만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 예수님께로만 돌리면 곧바로 그분의 신령하고도 풍성한 긍휼이 우리의 전부를 감싸 안으십니다. 요컨대 죄책감에 묶여 있는 것만큼 신자에겐 헛된 영적 낭비가 없다는 뜻입니다.
9/2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