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blue><b>예수님의 진짜 첫 번째 기적</font></b>
“<font color=brown>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니라</font>.”(눅4:28-30)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낭독하신 후에 강론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 아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 강론하니, 다른 말로 회당에서 설교할 자격도 없는 주제에 그러니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심령의 완악함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너희들 대신에 그분이 택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만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자연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즉,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분기탱천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주님을 죽이려는 최초의 시도가 유대종교 지도자들보다는 고향의 어른, 동료, 후배들로부터였습니다. 인자가 고향에서부터 배척당하고, 또 가족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려 오셨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그런 시도를 유유히 물리치고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신학자들도 간과해버린 최초의 기적입니다. 회당의 남자 어른들이 낭떠러지에 떨어트리려 힘껏 밀었을 텐데도 그 힘을 혼자서 이겨 내신 것입니다. 헤라클레스나 골리앗이 따로 없습니다. 분명 그분에게는 흠모할 풍채가 없는 가장 평범한 유대인 남자였을 텐데도 말입니다.
아무리 나사렛이 이름 없는 시골이라 해도 회당이 설립되려면 최소 열 가정은 있어야 합니다. 최대한 낮춰 잡아도 건장한 남자 어른 열 명은 되었습니다. 또 낭떠러지 끝에 밀리면 자기 몸을 지탱할 데가 없어 더더욱 힘쓰기 어렵습니다. 천하장사라 해도 뚫고 나올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독교 변증가 죠시 맥다웰과 빌 윌슨은 “He walked among us.”란 책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변증했습니다.(예수님은 실존인물인가?, 생명의 말씀사, 1991 번역출간, p309,310)
“나사렛의 집들은 주로 풍부하게 공급된 옥석들을 가지고 세워졌었다. 목수를 의미하는 헬라어는 석수(石手), 대장장이, 장인(匠人), 또는 ‘나무나 돌 또는 금속을 사용하는 건축가’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요셉과 예수는 목수 일보다는 돌로 집을 짓는 일을 더 많이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로 예수는 그 외모가 매우 강하고도 완고하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그의 영적인 권위와 함께, 의심할 여지없이, 그로 하여금 여러 차례 도보로 여행을 하고, 오천 명에 이르는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며, 자신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려 했던 성난 군중을 헤치고 나갈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분석이자 대부분의 신자들이 미처 몰랐던 예수님의 또 다른 단면입니다. 감성적으로 짐작하듯이 온유하고 연야한 체질이 아니라 아주 강건하셨던 것입니다. 또 그만큼 마지막 날 밤의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이 격심했었음을 반증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신분이 아닌 이상 고대 사람들은 다들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몸을 갖고 있고 또 도보 여행에 익숙한 것도 사실입니다. 주님을 밀치려 했던 자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강건한 몸과 완력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변증가는 성경기록의 무오류성을 입증하는 것을 소명으로 합니다. 인용한 책이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성을 증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예수님이 삼 년간 공사역을 정말 일말의 지침이나 쉼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반면에 결과적으로는 본의 아니게 성경말씀의 정미함에 손상을 입힌 꼴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추측대로 예수님은 목숨을 건지려고 젖 먹던 힘까지 내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곳까지 죽이려고 끌고 간 분기탱천한 자들 또한 평소 몇 배의 힘을 낼 것입니다.
반면에 본문은 어떻게 진술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니라.” 힘으로 밀치고 당기는 다툼이 있었다는 힌트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헤치고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가니라”는 단어에는 자기 갈 길을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신없이 힘들게 겨우 빠져 나온 모습이 아니라 아주 여유가 만만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하자면 예수님이 정색을 하고 그들을 쳐다보자마자 그들은 얼어붙듯이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신의 영적 권위가 그대로 들어난 것입니다. 복음서에 유사한 경우들이 나타나듯이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 넘쳤던 것입니다. 목수든 석수든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체험과 훈련이 당신의 사역과 이런 위급한 경우에 분명 도움 되었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분은 확실히 하나님 본체였던 것입니다.
복음서를 당시의 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고증을 동원해서 아무리 앞뒤로 합리적으로 분석해 봐도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님이자 인간이라는 결론 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영적 수준으로는, 아니 네 복음서 뿐 아니라 신구약성경 저자들 모두가 이렇게 완벽한 한 가지 결론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주관하시어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으니 마땅히 그런 결론 외에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회당 사람들을 힘이든, 영적권위든 제압하실 수 있었던 주님이 왜 꼭 벼랑 끝까지 가서야 그 권능을 내어보이셨느냐는 것입니다. 회당에서부터 미리 그들 사이로 지나올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 답이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입니까? 그럼 꼭 마지막에 아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해야만 당신의 신비함과 경이로움이 더 두드러지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벼랑 끝의 극적 모습이라야 누구라도 분명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고 또 쉽게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즉, 극적인 효과를 더 올리려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제발 깨달으라는 것 아닙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지금의 경우는 예수님이 단순히 자기들이 알았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가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풀어서 강론한 내용이 정말로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진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 당신이 바로 구세주임을 확인하고 당신 앞에 겸손히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이 사람들을 양쪽으로 쫙 가른 후에 그 사이로 걸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당연히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유유히 걸어 나오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또 마치 엘리사가 아람 군대를 눈을 멀게 해서 꼼짝 못하게 했듯이, 아니면 게하시의 영안을 열어 불 말과 불 병거가 자기들을 가득 호위하고 있음을 보게 했듯이, 주님은 나사렛 사람들의 영안을 열고 닫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너무나 신비한 일이 자기들 눈앞에서 홀연히 벌어졌음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주님이 떠나간 후에야 깨달았을 수 있습니다. 방금 일어난 일의 경위를 도무지 짐작조차 못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잠시 그 자리에 멍하게 서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정황설명이 없는 까닭도 당시 사람들이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모세 같은,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일으킨 일과 흡사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식했던 못했던 여호와 하나님을 들먹이는 목수의 아들을 죽이려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 벼랑 끝에 가서야 예수님이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시는 이유도 다시 말하지만 제발 그 사실을 깨닫고 제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엎드리는 것만이 모든 인간이 행해야만 할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미처 몰랐던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세상의 어떤 것도 그분의 은혜와 권능의 물결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닷물도 가르고 산들도 옮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더러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명하신 근거이자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사람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고 가족들끼리도 원수로 만들려고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당신을 겸손하게 믿고 따르는 자와 완악하게 거부 배척하는 자 둘로만 말입니다. 십자가상의 두 강도가 좌우로 나뉘듯이 모든 세대의 모든 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을 수밖에 없는 천하의 죄인 됨과 연결시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만 나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참으로 유감스럽고도 불행하게도 벼랑 끝에 내몰려 곧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운명 아래 놓인 자가 정작 자신들인 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날 예수를 단순히 요셉의 아들, 위대한 스승 선각자 종교 창시자로만 아는 자들의 운명 또한 그러한 줄 불행하게도 저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지금 그들을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온 우리 또한 실은 바로 그 벼랑 끝에 서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 그 자리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아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자들입니다. 당신을 믿는 택한 자만 구원을 주신다는 진리를 말도 안 된다고 반발 비난 저주했었습니다.
그랬던 우리를 그분은 이천년 전에 나사렛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나왔던 바로 그 동일한 권능으로 당신께서 당신의 십자가 아래로 옮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당신의 원수를 오히려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리로 바꾸어주었습니다. 이 어찌 평생을 두고 감사할 은혜이지 않습니까? 세세토록 그분만 경배해도 모자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지금 혹시라도 현실적인 인간적인 벼랑 끝에 몰려있다고 그분을 도리어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목수 요셉의 아들보다 더 힘이 없는 것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 같았던 나를 당신의 친구로 삼아주신 것만도 우리에게는 첫 번이자 가장 큰 기적인데도, 거꾸로 우리는 그분을 나사렛 목수로 다시 바꿔버리니 이 또한 세상에서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엄청난 기적이 아닐까요? 지금도 그분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닌 불 말과 불 병거로 우리 사방을 호위하고 계신데도 말입니다.
6/13/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