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21-24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3)

조회 수 472 추천 수 58 2011.07.02 04: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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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여기 계셨더면(3)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1-24)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로서 태초부터 영원까지 시간의 주인이므로 신자에게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의 절망적 실패도 되돌려 주실 수 있습니다. 또 모든 공간의 주인도 되시므로 비록 천국 보좌 '거기'에 계셔서 신자의 생각으로는 당신께서 부재하기에 일어난 것 같은 이해 안 되는 큰 환난 가운데도 사실은 지금 '여기'에서 신자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스스로 보고 느끼고 깨닫는 범위는 시공간적 영역에 묶이거나, 넘어선다 해도 겨우 윤리적 종교적 차원에 머뭅니다. 주님은 우리가 속한 시공간은 물론 도덕과 종교도 다 아우르되 그보다 훨씬 능가한 광대한 영역에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자유롭게 행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신자에게 부어지는 당신의 은혜와 권능도 당신의 그 광대하심에 근거하기에 자연히 우리 기대 이상으로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의 그분 되심을 온전히 믿느냐 여부일 뿐입니다. 온전히 믿으려면 그분을 온전히 알아야만 합니다. 물론 평생을 두고 알아도 그분을 다 알지 못합니다.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서로 헛도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나사로 사건의 주제는 예수님이 생명을 주관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진리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개인의 체험으로까지 승화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나사로처럼 실제로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구원뿐 아니라 육신적 생명마저 정말로 예수님의 은혜 안에 붙들려 있음을 절감하기에, 아무리 육신적으로 크고 위급한 사태가 닥쳐도 요동치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급한 중병에 걸려 생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처지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틀림없이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라는 뜻을 전해들은 것입니다. 아마도 그 병에 걸리면 곧바로 죽는다는 것을 누구나 상식적으로 아는 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4절)고 답하면서 하나님과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리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럼 당장 가서 병을 낫게 해주어야 하는데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留)”하고선 유대로 가자고 했습니다. 사람들 기대와 판단과는 달랐습니다. 어쩌면 제자들마저 천하의 스승님이라도 이 병에는 속수무책이구나 괜히 서둘러 갔다 못 고치면 망신이니까 나중에 변명거리를 얻으려 일부러 지체하는가보다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고 했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기별은 아직 받지 못 했고, 주님이 죽을병이 아니라고 했으며, 이틀을 더 유했고, 지금도 깨우러 간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그냥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조금 다른 시각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12-14절)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단순히 음부에 내려가 마지막 날의 부활 때까지 잠을 잔다고 믿었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진짜로 아무 의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비존재(非存在)적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각이 틀렸다고 야단치거나 당장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끔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을 그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나사로가 이미 죽었는데도 단지 잠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무식한 제자들이지만 그 말씀을 100% 문자적 의미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진짜 잠만 들었다면 구태여 멀리서 예수님이 깨우러 가실 필요 없이. 본인이 그냥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흔히 죽을병이라고 치부하는 중병에 걸리긴 했지만 예수님이 이제 내려가 평소처럼 치유의 이적을 일으킬 예정인가보다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잠이 든 정도의 병이라면 금방 고칠 수 있으리라고(12절) 반응했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사실상 그들이 죽음을 이해하는 수준에 맞추어서 말해준 것입니다. 다시 밝히 이르시되 즉,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말하기를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이해하는대로 영원한 수면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런 죽음에 대한 너희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올바르게 가르쳐서 너희 믿음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서 너희가 이해하는 방식 그대로 깨우러 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제자들은 그저 병을 고쳐줄 모양이라고 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은 한마디로 “너희는 죽음을 잠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럼 내가 그 잠을 깨우게 되면 바로 죽음에서 살려내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죽음을 잠이라고 여겼던 그들이 오히려 그런 의미일 줄 전혀 눈치도 못 챘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우리 또한 흔히 그러하듯이, 주님이 구사한 단어의 문자적 의미에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만 적용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인간들의 수준에 맞추어 주면서 말씀하셔도 그렇습니다. 복음서를 잘 살피면 주님이 삼년 간 이 땅에서 가르치신 의미를 당시 제자들이 제대로 온전히 터득했던 적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알아듣기 쉽게 당시의 문화와 관습에 맞춘 비유로 설명해 주어도 그러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가르침과 사역 모두가 당신의 광대하심을 포기하고 기꺼이 인간의 협소함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리 대단하고 신묘해 보이는 이적조차도 그분의 광대하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통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역으로 우리의 아무리 큰 고난도 그분의 광대하심과는 도무지 비교조차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그분의 낮추심은 동시에 그분의 자유함이기도 합니다. 또 광대하시니까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온전한 자유란 절대적 권세를 가진 자만이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위격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낮아져도 당신의 주권에 따라 자유롭게 낮아진 것입니다. 또 그런 낮추심 가운데도 당신의 궁극적인 뜻은 반드시 이루시기에 그 낮춤 또한 그분의 광대하심의 또 다른 유형(類型)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고난도 그분의 광대함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

제자들로선 죽음은 영원한 잠이라고 여겼는데 예수님은 진짜로 마치 잠에서 깨운 것 같이  나사로를 소생시켰습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로선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모든 이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죽은 자가 정말 살아났다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한 경탄과, 말씀 한 마디로 그 이적을 일으키신 주님에 대한 경외감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모두의 벌린 입이 한참 동안 다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사건을 통해 느끼거나 깨우친 소회(所懷)는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해 그들에게 새롭게 가르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 육체적 죽음이 인간 존재의 멸절(滅絶)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물론 이는 유대인들도 어렴풋이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수면상태로 있는 즉, 일종의 존재의 휴지(休止)가 아님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잠을 깨워서 생명을 부어넣어 주어서 다시 존재로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신자는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하면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여러 의미 중의 하나는 영원한 생명(永生)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죽어서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존재로 이 땅에서부터 이미 변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은 단지 인간이 존재하는 형태가 새롭게 바뀌는 것뿐입니다. 생명이 멸절은커녕 휴지 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갖고 있던 지정의가 소멸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이 소멸되지 않으면 당연히 지정의도 살아 있는 법입니다. 인간의 경우 지정의가 없어진다는 것은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신자의 경우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당연히 영생도 없는 것이며, 그 반대로 믿음이 있다면 영생은 이미 확보된 것입니다.

죽음이 존재 방식의 변화라는 것은 이 땅에서 입었던 육체를 그대로 지니고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 육신은 지구상의 시공간과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되게끔 창조되었습니다. 지구라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혀 다른 영적 차원으로 넘어가려면 이전 모습대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천국에서 마지막 날의 부활을 기다리며 존재하고 있을 신자의 영광된 형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진리는 주님과 신령하고도 영원한 교제가 가능한 형태로 변한다는 것뿐입니다. 물론 지정의도 새롭게 변화합니다. 하나님의 수준으로까지 전지전능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이 땅의 모든 부끄럽고 추하고 악했던 요소들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천국에선 악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죄와는 전혀 무관하게 깨끗해집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 구원받은 신자의 죽음은 이 땅에서부터 이미 선물로 얻은 영원한 생명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거주하는 장소와 거주하는 방식만 달라집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잠을 자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잠자다 마지막 날에 깨어나도 여전히 영만 있는 셈입니다. 부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한 육신의 부활까지 이뤄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새로운 육신을 입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개념대로 잠자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깨워서 다시 이 땅으로 데려왔습니다. 죽은 지 나흘 되어 냄새가 나기에 그들 개념으로는 그 영도 육신 곁을 완전히 떠난 후였습니다. 다른 말로 주님은 천국에 가있는 나사로의 영혼까지 불러 내린 것입니다. 당신께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영역의 주인임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또 마르다가 마지막 날에 가서야 부활이 있다는 생각도 틀렸다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과 동시에 아니 예수 믿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 개인적으로는 마치 큰 병을 고침 받은 양 잠시 소생했다가 얼마 있다 다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생으로 유대인들의, 정확히 말해선 예수 믿는 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는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죽은 후에 음부에 내려가서 아무 의식 없이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님께서 보살피는 온전한 권능과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죽을수록 더욱 큰 사랑의 손 안에 붙잡혀 있음을 모든 이들로 확연히 알게 했습니다. 마치 이 땅에서 큰 환난에 처할수록 주님의 더 큰 사랑 안에 있듯이 말입니다.  

이는 또 주님 오시기 430년 전에 플라톤이 정의 내렸고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모든 불신자들이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악하고 그 속에 있는 영은 선하기에 죽음으로 영이 더러운 육체와 결별하고 다시 영원한 세계로 돌아간다는 그 생각 말입니다.

주님은 그와 달리 육체의 부활이 있음을, 아니 그것이 진정한 마지막 날의 부활임을 드러내었습니다. 육체도 주님이 창조하신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죄로 더렵혀진 것은 인간의 존재 전체이지 육체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존재 전체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영혼육 전부를 바쳐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야 그를 믿는 자에게도 영혼육을 깨끗케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가 부흥했던 까닭

이제 곧 아리마대의 무덤에서 주님은 부활하실 것입니다. 나사로 사건을 통해 당신께서 가르치신 부활의 도는 더 확정적으로 선포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는 바로 그 도(道) 말입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앞에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들이 전혀 무력함도 입증해 보일 것입니다.  

나사로와 당신의 부활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고 또 그 신령한 권세가 모든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전해졌는지, 초대교회의 메시지는 오직 그 진리를 알리는 데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또 그 부활 메시지만으로 교회는 걷잡을 수 없이 부흥했습니다. 부활 생명을 전하는 복음은 염병처럼 모든 이들에게 번져나갔습니다.  

현장에 있던 두 자매와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육신의 죽음이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시작임을 종교적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목도한 체험적 앎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특별한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 앞에 곡을 하고 있는 중에 예수님은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흐느꼈습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 아래 묶여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인간들을 향한 너무나 안타깝고도 긍휼한 심정이 속으로 삼키는 울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울고만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인간을 묶고 있는 외적인 곤경들은, 심지어 죽음까지도 주님은 얼마든지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죄와 또 그로 인한 무지였습니다. 특별히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기에 지금 깨우러가겠노라는 당신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영적 무지가 더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 할 때에 제자들은 부활의 도를 바로 세우려는 스승의 진의는 전혀 몰랐습니다. 핍박 받을 것이 빤한데 왜 다시 가느냐고 말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절)고 대답했습니다.

당신께서 세상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요8:12, 9:5) 제자들더러 빛이신 당신과 함께 다닌다면 어떤 세상의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죄악으로 가득 찬 이 땅에서 인간의 상실된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 진리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인간을 향해 가장 안타까이 여기시는 것이 바로 당신의 당신 되심을 모르는 영적 무지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왜 수많은 질병, 고난, 억울한 일, 이유 없는 고통,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갈증과 허무함 등등을 겪는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였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 바로 믿는 자에게는 죽음으로 바로 부활이 시작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6-19)

부활이 인간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 된다고 해서 이생에서의 고통과 어려움을 천국에서 보상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를 넉넉히 승리케 만들려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택하여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가진  믿음도 단순히 이 땅의 고난을 이기는데 유용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입성하는 자답게 거룩하게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죄에 찌든 세상 앞에 드러내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신자의 삶과 인생에 허용하는 어떤 형통이든 고난이든 오직 그 뜻을 이루려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5-59) 한마디로 부활이신 예수님이 모든 인생 문제의 해답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거하고 계신 또 다른 여기

나사로를 소생시킴으로 주님이 궁극적으로 이룬 것은 정작 무엇입니까? 당신의 약속대로 제자들의 믿음을 당신께서 심어주었습니다.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것은 잠에서 깨우는 정도로 당신께는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보다 그럼으로써 당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무엇보다 제자들로 믿게 할 것이므로 친구의 죽음이 오히려 기쁘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물론 제자들의 믿음은 오순절에 가서야 온전한 믿음으로써 능력을 발휘하게 되겠지만, 자기들 스승이 진짜로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는 확신은 이 순간에 생긴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은 그들의 머리속 생각까지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0-12)

나사로 소생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그 되어가는 모든 형편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예수님과 부활에 대해 스스로 깨우침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의적으로 이틀을 더 유하시지 않았다면, 또 제자들이 이해하는 죽음 수준에 맞추어서 대화를 이끌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직접 살려내시지 않으셨다면, 부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한 차원 높게 변화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에만 매료되었지 부활의 도에 관한 진리는 온전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그들을 죄의 의와 심판에 대해 하나님의 사정을 알게 해준 후에야, 온전한 부활 진리를 붙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심어주고 깨우쳐 주셔서 부활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결국 어떤 뜻이 됩니까? 주님의 ‘여기’에는 인간의 영혼 속까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점유하고 있는 인간 외부의 시공간의 주인일 뿐 아니라, 인간 안의 영도 주님이 점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의 여기가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초대하기를 기뻐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그 사람의 영에 역사하셔서 예수님의 부활진리부터 깨닫게 해줍니다. 또 그 영에 영원토록 내주하셔서 신자의 이 땅의 삶은 물론 육체의 죽음 이후의 삶까지 온전한 은혜 가운데로 이끕니다. 나아가 성령이 내주하시기에 당연히 이미 영생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선포하신 그대로 생명이자 부활입니다. 신자의 육신의 죽음도 그 부활 은혜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예수님의 광대함은 시공간의 주인이라는 점을 뛰어넘습니다. 하늘과 땅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 모두를 그분은 주관하십니다. 특별히 인간 내면의 깊숙한 맨 밑바닥에 좌정하시어 우리 영을 통치하십니다. 우리 심령에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 채우십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신자 각자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오직 내 혼자만 있는 양 그분은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채워서 우리를 그 거룩에 점차 물들게 만들어 당신의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또 그 일에 필요하다면 당신께서 어떤 사건과 사람과 자원이라도 동원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진정한 광대하심입니다. 또 신자의 온전한 믿음도 바로 그런 거룩하고도 광대한 역사에 자신의 모두를 온전히 집어던져 넣는 것입니다.

참 신자라면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한탄이 현실의 고난이나 문제를 당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거룩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에 저절로 토해져 나와야 합니다. 당신이 주님께서 정말로 함께 있어주길 바랐던 혹은 바라는 '여기'는 과연 어디입니까?

7/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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