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33-44) 신자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진짜 감사

2019 추수감사절기 설교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11:33-44)

 

예수님도 우시고 화냈다.

 

저와 제일 친한 친구가 교회 다니는 신자들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쳇말로 예수쟁이들은 무슨 일에나 하나님 은혜로 감사하며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위선적 가식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완전히 망가지고 본인도 병원에서 수술 받고 몇 달간 입원 후에 불구자가 되어서 휠체어 타고 퇴원하고도 하나님이 생명만을 건져주셔서 감사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반발했습니다. 누가 봐도 사고는 하나님이 냈거나 막아주지 않고 방치했고 생명을 살려준 것은 병원과 의사인데도 거꾸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니 정신이상한 광신자들이라고 비방했습니다.

 

여러분 올 한해의 삶이 정말로 감사했습니까? 혹시라도 제 친구의 비난에 양심에 찔리거나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현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기만 한데도 교회에선 범사에 감사하라 환난 중에 기뻐하라고 가르칩니다. 실제 신앙생활과 성경의 진리가 서로 겉도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믿음이 약하게 보일까봐 교회에선 담대한 척 표정관리를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은 해소되지 않은 채 자꾸만 쌓여갑니다.

 

죽은 나사로를 말씀 한마디로 무덤에서 걸어서 나오게 하신 본문 기사에서도 그런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큰 권능은 너무 귀하고 우리 믿음의 근본이 됩니다. 그러나 그 권능이 우리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새벽예배에서 오래 동안 기도하고 있는 제목 하나에도 하나님은 귀를 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당장의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인데도 그렇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만이 실천할 수 있는 계명처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절) 독생자 하나님이심에도 큰 불행 앞에 크게 슬퍼했습니다. 헬라 원어로 격한 슬픔을 속으로 삼키면서 흐느끼는 것입니다. 거기다 두 번이나 심령에 비통하게 여기셨습니다.(33, 38절) 헬라 원어로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부르짖을 정도로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그런 감정을 겉으로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당신의 속에는 오직 슬픔과 분노로만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님에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아무 것도 아니고 실제로 곧바로 나사로를 살려냈습니다. 그럼 구태여 이렇게 슬피 울고 크게 화낼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어쨌든 조문은 해야 하니까 울 수 있다 쳐도 초상집에서 격하게 화내선 예의에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나아가 주님이 곧 살려 줄 능력과 자신이 있었다면 나만 믿고 안심하라고 위로해주어야 정상적인 대응이지 않습니까?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

 

정작 더 이상한 점은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는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일부러 더 지체했다는 사실입니다.(11:4)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더라면 죽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미국에선 의사가 중병인 줄 알고도 치료비와 상관없이 적절한 치료나 조치를 해주지 않으면 의사 면허가 취소됩니다. 그렇게 따지면 결과적으로 주님이 친구를 죽인 셈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첫째 원인이 병이었긴 하지만 충분히 낫게 해줄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으니 주님의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지체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것입니까? 아니면 혹시 일부러 늦게 와선 나사로를 되살림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한껏 더 과시하려는 뜻이었습니까? 예수님에겐 인간을 농간 조종하려는 어떤 거짓 사술 위계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치사하고 비겁하며 더럽고 추한 것들은 절대로 주님 안에 공존하지 못합니다. 인간과 전혀 다른 당신만의 순전한 사랑과 긍휼로만 완전한 공평과 정의가 완벽하게 실현되도록 인간과 세상을 다스립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이전에도 죽은 자들을 살려냈습니다. 구태여 다시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여 메시아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틀을 더 지체했던 곳은 요단 강 저편 침례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입니다.(10:40) 나사로가 죽은 곳은 베다니였는데(11:1) 둘 사이의 거리는 하루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베다니에 도착해보니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났습니다.(11:17)

 

역산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 베다니에서 요단강 저편의 예수님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는데 하루, 그 소식을 듣고 주님이 이틀을 더 유했고, 주님 일행이 베다니로 오는데 하루 총 사일이 소요됩니다. 그럼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하러 출발하자마자 나사로는 죽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로선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전혀 감도 못 잡았지만 주님은 베다니로 출발하기 전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이틀을 일부러 지체했던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흘 째 되면 이 땅에서 완전히 떠나 음부로 들어간다고 여겼습니다. 마르다도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말했듯이(11:39) 나사로의 시신은 이미 썩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고대에도 완전히 죽었다고 여겼지만 간혹 의사나 주술사의 도움으로 되살아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흘이 경과된 후에는 그런 일은 없었기에 그런 인식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나흘 후에는 천하의 명의나 아무리 신령한 제사장이 와도 되살리지 못한다는 뜻이고 역으로 말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되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개념에 맞추어서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지체한 것입니다. 당신이 단순히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을 넘어서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본체임을 드러내려는 뜻이었습니다. 주님도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11:4)고 미리 그 점을 밝혔습니다.

 

그렇게 서글피 우셨던 까닭은 죽은 나사로와 누이들과 문상객들은 물론 모든 인간이 죄의 삯인 죽음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가 서로 자기만 최고로 높이는 바람에 세상은 시기 분쟁 저주로만 가득 찼고 그 결과 고난이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 인간의 처지가 너무 안쓰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격노하신 까닭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거짓으로 인간을 속여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함으로써 인간 세상에 모든 고난과 불행을 몰고 온 주범이자 원흉인 사탄이 너무 미웠기 때문입니다. 에덴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인간을 자기 노예로 삼고 온갖 죄악으로 더럽혀서 절망과 사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흑암의 세력에 대해 으르렁거리며 분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너무나 어리석게도 자기들이 겪고 있는 고난 불행 죽음 등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 원인을 모르니까 그 해결책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인간의 영혼을 파괴시킴으로써 그 도덕심과 종교심까지 왜곡되었습니다. 사탄에 미혹된 채 스스로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다는 교만에 빠져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있으니 주님으로선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직전에 주님은 누이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고 꾸중 아닌 꾸중을 했습니다. 그래서 누이가 본 영광이 무엇입니까? 지금 나사로를 살려낸 주님의 권능입니까?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살펴본 대로 이틀이나 지체한 주님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습니다. 나사로도 단지 잠시 소생한 것으로 얼마 안가서 죽었습니다. 주님이 병을 고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자체가 그분의 영광이 아닙니다.

 

신자가 봐야 할 하나님의 영광

 

이 사건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짜 결론은 따로 있습니다. 그 후에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듣게 되고 그들이 공회를 소집해서 주님을 그대로 두었다간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날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합니다.(53절)

 

주님이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멀리서도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미리 아신 주님이 이번에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이전에도 불치병이나 불구자를 고칠 때마다 주님은 그 사실을 비밀로 부치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공회가 그런 결의를 하자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고 에브라임으로 잠시 피신했습니다.(54절) 주님이 그들의 위협이나 당신의 죽음이 두려웠던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여호와가 애굽에서 당신의 백성을 어린 양의 피로만 구원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절기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려고 잠시 지체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 죽음의 모든 경과는 물론 시기까지 주도적으로 조정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당신의 사역의 구체적인 과정과 일정을 오직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목표지에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인간들의 죄는 당신께서 죽기까지 저주하고 아무리 극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당신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로 살다가 그 삯인 죽음의 멍에를 쓰게 되는 인간을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이 다하도록 너무나도 불쌍히 여기시고 최고로 슬피 우셨습니다. 인간을 거짓으로 미혹하여 자기 종으로 조종 농간하고 있는 사탄에게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이 다하도록 최고로 격렬하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의 흉계를 완전히 깨트려서 우리 죄의 근원까지 끊어주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직전에 주님은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셔서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41절) 나사로를 살려달라는 기도에 응답한 것만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서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42절) 주님이 항상 기도했던 내용은 죄와 흑암의 세력과 사망에 노예가 되어있는 인간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골고다 십자가로 올라가기 위한 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공사역 삼년 동안에 주님은 십자가 외의 일은 한 번도 계획하지도 않았고 실제 사역에 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심지어 당신께 병 고침을 받으려고 찾아온 사람을 외면하고 거부한 적도 있습니다. 새벽 미명에 항상 그러하듯이 기도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사람들이 주를 찾아왔으니 돌아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말했습니다.(막1:38) 병 고치는 것은 십자가 복음 안으로 초대해 영생을 주기 위한 준비요 주님에 대해 마음을 열게 하는 예비조치였지 그 자체가 주님의 목적도 영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죽음으로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신자 개인이든 공동체에게 부흥이 있던 반대로 불행이 생기던 오직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만 높여집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십자가 구원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가 비춰 나오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을 역사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그들에게 보여준 당신의 영광도 단순히 죽은 자가 아니라 나흘이 지난 시신을 살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영혼은 이미 음부에 가있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그 영계까지 다스려 천국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육신적 생명을 넘어서 영적 생명까지 절대적이며 완전한 사랑으로 영원히 감싸 안아주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신자와 그 공동체에게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자 끝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그 권능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는 것 하나 뿐입니다.

 

영혼이 이미 떠났다고 믿은 두 누이 앞에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음부에 떨어진 나사로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세상과 인간은 절대로 줄 수 없는 아예 차원이 다른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정말로 문자 그대로 하늘 위를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는 달라야 한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무지 볼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신자의 감사는 불신자와 완전히 차원을 달리해야 합니다. 신자의 감사는 실제로 천국을 맛 본 것에 대한 감사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라고 했습니다. 세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죄인의 대표입니다. 자기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에게는 죄 많은 세리도 그러하듯이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까지 사랑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나 잘못을 범하는 형제를 비롯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려면 형식적 외식적 사랑으로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도덕성만으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기에 주님의 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일이 생기면 세리라도 감사할 수 있으니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환난의 때에 도리어 감사할 수 있어야 진정한 감사가 되고 그래서 불신자와 다른 감사입니다. 제 친구가 비난하듯이 종교적 겸손을 가장해서 외식적으로 감사해도 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런 가식을 뜨는 바리새인들을 유일하게 저주하면서까지 야단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뜻이 신자에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신자는 절대로 당신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물론이고 그분에겐 포기되어지거나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항 명도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선고를 받아서 세상에선 포기되었고 그들이 상종도 안하고 멸시를 받았던 세리 창녀 귀신들린 자 불구자들을 주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십자가상의 사형수 강도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낙원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제 다시 여러분에게 질문해보겠습니다. 올 한해 정말로 주님께 감사다운 감사, 신자가 마땅히 해야 할 감사를 했습니까? 혹시 다른 사람을 다 힘들어도 내 수입이 오히려 늘었고, 아이들이 큰 탈 없이 건강히 잘 자라주었고, 부모 말도 잘 들어서 성적도 올라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교회에서 직책도 맡아서 내 믿음의 보상도 받아서 감사합니까?

 

물론 그런 일들이 감사할 일이 분명하고 또 마땅히 감사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정도는 불신자들도 다 감사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은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 말고는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 믿는 것이 교회 출석하는 것이 그렇게 시시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껏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까?

 

이 감사의 계절에 신자가 진정으로 감사하려면 올해에 힘든 일이 아주 많았었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시편의 다윗처럼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께 나아와 울고 불평 원망 떠트렸다가 다시 소망 가운데 일어서는 일들이 있었어야 참 감사입니다. 믿음이란 나는 절대로 주님 안에서 포기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고 그런 앎 가운데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결코 무너져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과 죽음마저도 나를 죽일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잊혀지는 존재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이 나를 떠난 적이 없고 하나님 사랑에서 벗어난 적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좋은 일만 아니라 특별히 고난과 불행이 그랬고 또 그것이 더 완벽한 사랑에서 온 것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니 그렇게 믿기에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나사로의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32절)라고 불평 아닌 불평을 했습니다. 비록 나사로가 주님께 하인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죽었지만 그녀들로선 소식을 전하러 보낸 메신저가 이틀 만에 돌아왔을 때에 주님도 당연히 같이 올 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이들 뒤에 왔습니다. 주님께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주님도 당신의 능력으로도 낫게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거나, 자기들이 주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만큼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혹시 그 동안의 우리와 주님의 관계는 별로 의미가 없었고 주님께 우리는 벌써 잊어버린 존재로 여겨진 것은 아닌지 큰 실망이 묻어져 나온 불평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주님은 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답변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나사로를 살리는 것, 그것도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도 나에게 아무 문제가 안 된다.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런 데에 제발 믿음의 초점을 두지 말라. 나는 절대로 너희 두 자매는 물론 죽은 나사로마저 영원히 음부에까지 쫓아가는 한이 있어도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다.”입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8:38에서 사망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한 번만 맞아도 자칫 죽을 수 있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던, 말하자면 정말로 죽음의 문턱에서 주님 은혜로 살아난 그의 생생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확고한 고백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신자가 소망해야 할 주님의 영광의 실체이자 범사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눈물의 첫 추수 감사절

 

미국의 첫 추수감사절도 사실은 눈물의 감사 잔치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청교도 102명 선원 30명 타고 영국을 떠나 1620년 12월에 보스톤 남쪽 풀리머스 항에 도착했으나 너무 추워서 배에 삼개월간 남았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상륙했습니다. 그때까지 생존한 자가 겨우 반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 명 중에 한 명이 신대륙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아이들과 노약자들이 먼저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국에 남아있었다면 전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얻어서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도 하나님은 반 이상 죽게 두었습니다. 반이 죽었으면 모든 가정에 죽은 자가 다 있었다는 뜻입니다. 틀림없이 그들도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버려두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그분에게 잊혀진 존재는 아닌지라는 의심과 불만이 생겼을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상륙을 한 뒤에 기도를 더욱 뜨겁게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겉으로 감사할 거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풍토병과 낯선 기후 환경 등에 적응하기도 힘듭니다. 갈수록 하나님에게 원망과 불평이 넘칠 뿐입니다. 그러던 중에 전혀 예상치도 않게 한 인디언 추장이 옥수수 종자를 갖다 주고 그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비로소 굶어죽지 않을 방안이 마련된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첫 추수감사절의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첫 수확은 인디언 추장이 마련해준 옥수수 조금뿐이었습니다. 진수성찬을 즐기며 밴조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생존한 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미 죽은 가족들이 생각나서 그마저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빵이 완전히 눈물로 젖었을 것입니다. 첫 감사절은 감사절이라기보다는 제사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정말로 감사한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인디언 추장을 만남으로써 이 낯선 이국땅에서도 두고 온 고향에서처럼 정상생활을 이룰 수 있겠다는 소망이 비로소 생겼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왜 이런 시련을 아니 끔찍한 비극을 허락하지라고 그분이 우리를 포기했나보다 절망하며 눈물로 믿음의 몸부림을 쳤었는데,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진정한 감사를 했습니다. 하늘의 천국이 그곳에 임했고 그들도 나사로가 소생하는 영광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불신자 중의 불신자인 제 친구는 안타깝게도 이런 영광을 보지 못하고 이 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반드시 좋은 일이 생겨야만 감사할 수 있지 하나님이 어떤 죄인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긍휼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해 불평불만으로만 지새다 저희가 가게 되는 곳과 전혀 다른 곳에 가있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안타깝고 저도 사탄에 대해서 불같이 화가 치밉니다.

 

차도 다 찌그러져 못 쓰고 병원비도 엄청 많이 나왔고 불구자까지 되었어도 제 친구의 비난과 달리 신자는 종교적 겸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가 그분에게 그만큼 귀한 존재이므로 건져 주셨다는 그 은혜를 말입니다.

 

사고 이후로도 지금과는 전혀 다르고 더 풍성한 믿음 소망 기쁨 감사의 생활로 인도해주실 것을 확신하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숨만이라도 건져주셔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더 큰 은혜에 대한 가슴 떨리는 기대로 충만해져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엉덩이에 뿔이 나는 신자

 

당신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를 이제 곧 당신을 십자가로 매달기로 결의할 재판장에서도 따뜻한 눈길로 그윽이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대면하여서도 한마디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은 이미 이전의 잘못을 다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거푸 물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나를 부인한 것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내가 잘 안다. 너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잘 이해한다. 그렇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 심정에는 지금도 전혀 변화가 없지?”라고 용서를 넘어서 도리어 위로해주신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새로운 임무까지 맡기며 격려해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때로는 남들이 다 잘되지 않아도 내 혼자 잘되는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 저절로 감사도 생깁니다. 그러나 불신자라도 그럼 다른 이들에게 미안해서라도 혼자 감사만 하지 않고 가진 것을 나눠줄 것입니다.

 

신자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불신자는 대체로 현실의 풍요에 대한 감사로 그친다면 신자는 주위에 나눈 것으로 감사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에게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격렬하게 드러내신 예수님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서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자가 주님께 드려야 하고 드릴 수 있는 참 감사입니다.

 

쉽게 말해 교통사고에서 목숨이라도 건져주신 은혜에 대해 이제 살려준 이 생명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고백이 따라야 신자의 감사가 완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제가 담임했던 유학생 교회에서 정말로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남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 신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딴 박사학위로 대학 강단 대신에 장애자를 위한 직업을 얻어서 그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올 한해에도 어려운 일이 많았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런 가운데 얼마나 자주 많이 울었습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이자 신자가 정말로 감사해야 할 내용입니다. 단 절대로 그 자리에 쓰러져 넘어져 있지 않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확인하고 다시 일어섰어야 합니다.

 

만약 단순히 언젠가 좋은 일로 대박 터뜨려 주겠지라는 믿음만으로 끈기 있게 기다리든지, 단순히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꿔서 긍정적 낙관적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 억지로 감사하든지, 감사의 절기이니까 신자라면 당연히 감사해야지 등으로 그치면 그야말로 불신자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는 일이 끝나야만 웃을 수 있습니다. 엉덩이에 뿔이 절대 나지 않듯이 울면서 웃으면 비정상적인 일로 인간이 행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와 다릅니다. 나사로의 장례식장이, 미국의 첫 추수감사절이, 교통사고로 대수술을 받고 불구가 되어서 휠체어 타는 곳에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감사와 기쁨이 절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 주님이 큰 영광으로 함께 임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자는 체험으로 익히 압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사람과 달리 울다가도 주님을 바라보고 웃고, 주님을 바라보고 웃으면서도 너무나 감격해서 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을 아직도 외면하거나 모르는 주면의 이웃이 너무 불쌍해서 슬피 우는 자가 신자입니다. 바로 그곳이 주님의 영광이 임하는 천국입니다.

 

요컨대 신자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진짜 감사는 숨이 턱턱 막히는 절망과 좌절의 골짜기에서, 나아가 죽음 바로 앞 문턱에서도 주님의 그분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긍휼과 사랑과 권능을 절감하고 그분의 품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고 또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귀해서 저절로 감격의 눈물이 속에서 솟구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감사가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아가 골고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울어야할 슬픔을 이미 다 감당해주셨고, 우리가 터뜨려야 할 분노도 전부 다 감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11/3/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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