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36-38 베드로가 너무 좋은 진짜 이유?

조회 수 691 추천 수 43 2012.07.04 01: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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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너무 좋은 진짜 이유?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否認)하리라.”(요13:36-38)


정이 많이 가는 베드로

베드로는 참으로 정이 많이 가는 인물이다. 허물 많고 조급하고 자주 감정에 좌우되어 실패하는 모습이 우리와 거의 같다. 실은 아브라함, 야곱, 모세 등 성경의 위인들 모두도 그러했지만 그에게 정이 더 많이 간다. 아마 그 이유는 예수님과 삼년간 동고동락하며 직접 진리를 배웠고 또 기적을 목격하고도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또한 그토록 오래 예수를 믿었고 성경공부를 했어도 아직도 베드로 같은 모습을 버리지 못하지 않는가?

특별히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은 정말 우리에게 안도의 숨을 쉬게 만든다. 주님의 수제자도 목숨이 아까워 세상 앞에 세 번이나 굴복했는데 우리 같이 이름 없는 신자야, 그것도 지금 같이 살기 어려운 때에는 조금씩 그런들 하자 사항이 전혀 아닐 것 같다.

거기다 내가 그처럼 3년간이나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받았고 엄청난 이적을 보았다면 그보다는 나았으리라는 조금은 시건방진 생각도 가끔 든다. 실제로 시간과 경비를 분에 넘치게 희생해가며 교회와 성도를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이 있지 않는가? 물론 우리 대부분이 만약 그와 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똑같이 행동했으리라 인정은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했던 사건에서 겨우 우리 믿음의 연약함에 대한 위로만 조금 얻고 치운다면 너무나도 가난한 신앙이다. “내 심령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만큼 아직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너무 연약해!”라고 인정한 것 자체로 마치 영적으로 상당한 수준인양 속으로 헛된 자부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그런 시인만 계속하고 있지 그 단계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믿음은 자인(自認)한 그대로  아직도 정말 형편없는 수준에 맴돌고 있는 것밖에 안 된다.

바꿔 말해 성경이 본 기사를 기록한 목적과 의미를 신자들 스스로 너무나 낮추어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다. 당연히 우리 심령의 연약함을 깨닫게도 하지만 결코 그 단계로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신자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해준다.”(딤후3:15-17)

무엇보다 사복음서 모두가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에 이어서 기록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록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특별히 요한의 기록을 세밀히 살펴보면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그 둘을 아주 정미하게 대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 자신이 그렇게 의도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독자가 그렇게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바로 그래서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성경 자체가 증언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옐로카드를 똑같이 받은 유다와 베드로

유다는 돈에 눈이 어두워져 유대 관원들에게 주님을 기껏 은 삼십 냥에 팔아넘겼다. 삼년 간 동고동락 했던 스승으로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런 십자가 죽음을 당하게 했다. 그것도 마지막 만찬 때에 당신께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어서 빨리 회개하라는 신호를 받았음에도 그랬다. 만약 그가 스승이 로마 제국을 뒤엎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줄 것을 열렬히 기대했지만 마지막까지 주님께 그런 기미가 전혀 없음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쳐도, 도무지 인간으로선 할 바가 아닌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반면에 베드로는 마지막까지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열의에 가득 찼고 실제로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칼로 베는 행동으로 그 다짐을 실천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자기 목숨이 걸리게 되었음에도 주님이 그 큰 능력을 발휘하려는 의도를 전혀 보이지 않자 순간적으로 두려워져 스승을 세 번 부인했다. 그 순간 주님의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이 생각났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다.  

두 사람 다 주님으로부터 축구경기로 치면 옐로카드를 받은 셈이다. 그것도 잘못을 범하기 전에 앞으로 그럴 것이라는 사전 예고 내지 경고였다. 그런데 유다는 회개치 않고 배반했다. 레드카드를 받아 성경의 무대에서 퇴장 당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세 번 부인은 했지만 즉, 분명 옐로카드를 받을 반칙은 했지만 그 후로 동일한 반칙을 범하지 않아 레드카드는 받지 않았다.  

누가 더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지를 따지자는 뜻이 아니다. 유다도 주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자 양심의 가책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라고 타고난 흉악범이 전혀 아니었다. 돈을 밝혔다고 해도 은 삼십 냥이 평생 팔자를 고칠 만한 액수도 아니지 않는가? 베드로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도덕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유다의 당시 심령을 어느 누구도 확정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유대관원들이 잡아서 십자가 사형에 처하려 들면 스승이 엄청난 하늘의 능력을 보여주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기대를 했을지 모른다. 주님도 잡히시기 직전에 베드로에게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당장에 불러올 수 있지만 그럼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 않는가?  

두 사람 다 마지막 날 밤에 스승이 행하는 모습에 불만이 있었다. 도무지 갑갑하고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둘 다 옐로카드를 받은 까닭이다. 물고기 다섯 마리와 떡 두덩이로 오천 명을 먹였고, 말씀 한 마디로 폭풍우도 잠재우고 죽은 자도 살리는 권능을 가졌던 자라고는 전혀 여겨지지 않았다. 로마제국을 전복할지는 몰라도 최소한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스승이 칼 들고 앞장만 서주면 자기들은 목숨 걸고 뒤따를 각오했던 것이다.  

그 둘이 달랐던 점은 따로 있다. 스승을 이해할 수 없어 불만이 생기자 유다는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시행해버렸다. 베드로는 끝까지 스승을 믿고 기다리려 했다. 제자들 모두 도망갔어도 대제사장의 관정에까지 숨어서 따라갔다. 비록 목숨이 아까워 입술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 마음은 스승을 배반한 적이 없었다. 스승이 이 일에 과연 어떻게 대처하실지 끝까지 지켜보기로는 했다.

당시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함부로 앞에 나설 수도 없었다. 이미 한 번 그랬다가 당신의 일에 방해만 된다고 스승으로부터 야단맞았지 않는가? 대신에 그는 어서 빨리 주님의 큰 능력으로 이 사태를 반전시켜 주길 기대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따라갔을 것이다.

위급한 일이 생기고 자기 뜻대로 해결되지 않자 유다는 주님과 그 동안에 이어왔던 관계를 스스로 단절시켜 버렸다. 베드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리고 또 자기가 죽게 되자 반강제적으로 그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유다는 육신과 영혼 두 차원 모두에서 자기가 그 관계를 끊었지만, 베드로는 비록 육신으로는 부인했어도 자기 영혼만은 주님의 품 안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것이다. 그가 통곡하며 흘린 눈물은 바울도 실토한 것처럼 자신의 영혼과 육신이 서로 빗나가는 것에 관한 처절한 절망이 겉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베드로의 체면을 세워주신 주님  

요한의 두 사람의 대조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진짜로 더 중요한 사항이 남아 있다. 유다는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단에 완전히 묶여 있었다. 사단은 자기 노예가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과 정반대 쪽의 구렁텅이에다 완전히 밀어 넣을 생각뿐이다. 죄의 삯인 죽음에서 절대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사단은 또 그러기 위해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한다. 이미 악의 노예가 된 자로 사람들 앞에선 도덕적 의인으로 드러나게 만들기도 한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듯이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을 보자 유다는 그것을 팔아 차라리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한탄했지 않는가? 또 살펴본 대로 조국이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예수님을 따랐을지 모른다. 거기다 사단은 돈이라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매력적인 도구를 수시로 동원한다.

유다는 자기 양심에 찔려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구원이 전혀 불가능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진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과 삼 년간이나 동고동락했지만 사실상 그 스승과 어떤 관계도 맺어진 것이 아니었다. 종교적으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것처럼 보여도 유다 같은 자는 얼마든지 많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다시 말하지만 주를 부인하긴 했지만 배반은 하지 않았다. 그 영혼만은 주님을 어떻게 하든 모시려 했다. 끝까지 주를 포기 하지 않았다. 그에 상응하여 주님 또한 그를 한 없이 사랑했다. 무엇보다 그를 위해서 죽었다. 유다의 배반 예언과, 베드로의 부인 예언 사이에 요한은 무슨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가?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요13:31,32)

유다가 나가서 배반하면 즉,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당신과 성부께서 영광을 얻는다고 한다. 유다의 배반 때문이 아니라, 사단이 세상을 죄 아래 묶고 있는 권세를 깨트리고 죄인의 구속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유다는 그런 구속의 영광을 박차고, 그것도 주님의 반복되는 권고를 무시하고는 나갔던 것이다. 반면에 베드로는 부인은 했어도 끝까지 주님을 따름으로써 그 구속의 영광 가운데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33-35절)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을 보라. 구속의 영광을 맛본 베드로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 말씀(예언)하시는가? 유다를 포함한 주님을 대적한 유대인들은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따라가게 된다고 한다. 또 그렇게 주님 가신 곳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알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지막 날 밤에 베드로는 이 땅에서부터 목숨 걸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러나 아직 십자가 구속의 영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도, 또 그 가는 방식도 몰랐던 것이다. 스승을 세 번 부인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영적 실체가 얼마나 연약하고 추한지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추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스승이 세 번이나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줌으로써 자신과의 관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신실하게 이어오신 분이 오히려 주님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에는 정말로 주님의 복음을 자신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때까지 증거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철저히 준행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그를 예수의 참 수제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육신으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그를  한 번도 떠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수제자임을 모든 세대 모든 사람이 부인하지 못하게 만들어주셨던 것이다. 베드로의 땅에 떨어진 체면을 주님이 다시 살려준 셈이다.    

정말로 주님의 영광을 보았는가?

지금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과 성부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신다. 논리가 어긋나도 너무 어긋나는 말씀이지 않는가? 정말로 영광을 얻을 자는 바로 신자이지 않는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하는 비겁함의 절정(?)을 보여준 베드로야말로 너무나 큰 영광을 얻은 것 아닌가? 그렇다. 베드로는 너무나도 그 영광이 귀해서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마저 영광스런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거꾸로 매달렸다고 하지 않는가? 자신이 주님과 도무지 견줄 바가 되지 못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도덕적으로 우월했고 영성이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릴 때까지 그분을 따랐다.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배반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늦게나마 불쌍한 영혼을 주님의 사랑으로 죽기까지 사랑하는 일로 실천했다. 베드로가 주님께 받은 또 다른 영광은 바로 이웃을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는 권능이었다. 다른 유대인들은 받지도 못한 새 계명을 준행하는 영광이다.

예수 믿어 신자 된 영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실감하는가? 나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추한 죄인을 구원하시려 태초부터 예정하시어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신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주님 가 계신 곳으로 우리가 따라 올라갈 수 있다. 그곳에서 주님을 얼굴로 대면하며 세세토록 왕 노릇하면서 경배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이다. 신자는 이런 놀라운 영광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다.    

그런데 그와 동일한 영광을 이 땅에서도 얻을 수 있다. 하늘의 영광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 더 풍성하고도 아름답게 얻을 수 있다. 그러지 못할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바로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이웃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영광이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임을 만인이 보고 알도록 하는 영광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라는 인증을 받는데, 말하자면 베드로와 같은 반열의 신자가 되는데 어찌 영광스럽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 신분, 자격, 위치, 계급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내 주위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 말이다. 유다처럼 사단의 종이 되어 완전한 흑암의 멸망으로 떨어질 뻔했는데 천국보좌의 거룩한 빛 가운데서 영원토록 주님과 교제케 되었지 않는가? 최악의 죽음에서 구원 받아 최상의 생명을 이미 받았는데 그렇게 못할 이유나 근거가 어디 있는가?  

우리가 수시로 죄 짓고 실수하는 일을 베드로의 부인 사건에 대입하여 위로만 받고 치워선 얼마나 가난한 영성인지 이젠 실감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평생을 두고 세 번, 그것도 한 번의 일에서 부인했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가지 일로 수십 번씩 부인한다. 그나마 서로 비슷한 경우를 갖고 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유다였다가 베드로가 되려고는 하지만 아직도 너무나 멀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세번 부인하는 베드로만 보고 내가 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기가 막힐 정도로 가난한 수순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이미 주님의 영광 가운데 들었다. 주님 가신 곳에 따라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에 예비된 영광이다. 이 땅에서 주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영광도 함께 얻었는데도 전혀 실현할 생각을 못한다. 아니 그런 영광을 소유했는지, 나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조금 힘들고 이해 안 되는 문제가 닥치면 주님을 부인하기 바쁘다. 육신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고, 영혼마저도 때때로 그러지 않는가?  

작금 신자들 사이에 영성 훈련이 아주 유행(?)이다. 주로 기도, 찬양, 묵상, 금식, 침묵, 절제, 말씀 등의 방법론에 집중되어 있다. 영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다. 훈련은 그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럼 다른 것 없다. 가장 먼저 베드로처럼 육신과 영혼이 어긋났던 것을 바로 잡아 일치시켜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이해 안 되는 일이 겹쳐도 절대로 주님의 사랑과 권능에서 벗어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종교적 방법론이 영성이 올바르고 경건하게 세워지게 만드는 일차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영광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정확하게 말해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는 것이 먼저이자 더 중요하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 죽으셨고 언젠가 주님 계신 곳으로 올라갈 것이며 또 그러기에 이곳에선 어떤 악한 것에도 영향 받지 않고 주님의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주님과의 관계 즉, 영성은 이미 주님께서 확고하게 올바르게 세워주셨다. 골고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의 보좌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이 땅의 죄에 찌든 영혼의 깊은 내면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취도록 연결시키셨다. 바로 그 십자가 사랑 앞에 날마다 완전히 항복하고 엎드리는 것 외에 별다른 영성훈련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또 그럴 때에 진정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권능과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영성이다.

요컨대 진정으로 주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자는 영성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성을 실현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바로 주님이 사랑했던 모습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말이다. 여러분은 이 놀라운 영광 가운데 거하는가? 다른 말로 베드로가 좋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우리처럼 실수와 잘못을 자주 범해서인지, 아니면 우리도 그처럼 주님의 영광을 온전히 절감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음을 증거하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권능을 얻었기 때문인지, 둘 중에 어느 쪽인가?

6/13/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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