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습니다. 물론 역사기록의 정확성 내지 신빙성에 이의가 제기될 수는 있겠으나, 실제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 자체만큼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하지만 후손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가정을 설정하여 역사해석을 시도해 보는 것은, 후손이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자유 내지 여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세가 지나쳐서 역사해석의 왜곡현상을 초래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중국과 일본과 북한의 역사왜곡은 물론이요, 재미있는 TV 사극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 오늘은 아주 가볍게,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성경과 연계시켜 생각해 보는, 조금은 생소한 방법으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 가지 예를 들 수 있지만, 이야기 전개상 하나만 들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말의 욕설 가운데, 아주 듣기 나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화냥년’이라는 말입니다. 사전은 ‘서방질하는 여자’로 풀이하고 있지만, ‘성적으로 조신하지 못하여 거의 창녀와 비슷한 몸가짐을 지닌 여자’로 이해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 욕설은 조선시대 병자호란의 비극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인지라 간략히 요약하겠습니다.
♠ 병자호란 때 화친하자는 쪽(최명길 등)과 끝까지 싸우자는 쪽(삼학사 = 홍익한, 윤집, 오달제)이 대립하다가 항복하는 쪽을 택합니다. 결국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청에 항복한 조선은 엄청난 보상을 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공녀(貢女)입니다. 청나라 군인들은 예쁜 여인들을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가서 성적 노리개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다 싫증나자 쫓아냈습니다. 이국땅에서 버림받은 우리나라 여성들은 목숨을 걸고 수만리 고국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돌아온 여인들을 그 잘난 우리 조상들은 환향녀(還鄕女)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자기들(남자들)이 못나서 지켜주지 못한 아내와 딸들만 비난한 것이지요. 아무튼 이 ‘환향녀’라는 말이 변하여 ‘화냥년’이라는 욕이 되었습니다.
♠ 후손 입장에서, 삼학사의 주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물어 볼 필요조차 없을까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주장이 꼭 옳고 정확한 것만은 아닙니다! 맨먼저 지적되어야 할 점은, 그들은 현실인식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청과 조선의 전쟁수행능력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납니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하루빨리 항복하고 불쌍한 백성이나 살리는 것이 더 나은 방책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지적되어야 할 점은, 못 말리는 자존심입니다. 사실 자존심이란 그럴만한 능력을 지닌 자가 행사할 수 있는 하나의 자신감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속된 말로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내세운다면 이는 매우 감성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삼학사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겨우 붓 하나 들고 글줄이나 쓸 줄 아는 주제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을 논하고 있습니다. 피눈물 나지만 이게 정확한 현실이었습니다. 이때 상황에서는 항복하는 것이 더 나은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또 감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삼학사의 충정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육 받아온 그대로, 삼학사는 만고의 충신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 다 아시는 것을 지루하게 짚어봤습니다. 이제 성경 기사와의 연결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서를 곰곰이 읽어보십시오. 자세히 읽으면, 예레미야야말로 삼학사와는 정반대로,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길어질 것 같아 생략했습니다만, 예레미야는 구한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의 궤변과 비슷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참 선지자에 대한 실례라고요? 그렇습니다. 실례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이는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와 대립되었던 인물들의 주장이 더 애국적입니다! 삼학사의 주장과 더 많이 닮았습니다. 몇 군데만 살펴봅니다.
○ 7장을 보면, 성전을 여호와의 전이라 부르는 것이 거짓말이라 하면서(4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도 하지 말라(16절)고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대와는 정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금지하다니요?
○ 18장의 토기장이의 비유에 이어 19장에서는 오지병을 깨트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 오지병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급기야 20장에 가서는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질책하고 구금시킵니다. 이 당시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급한 시국이었습니다(마치 을사보호조약 체결 및 한일합방 사이의 시국과 비슷합니다). 이런 비상시국에서 소위 제사장이라는 자(예레미야도 제사장입니다)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덕담과 격려는 못할망정 망한다고 저주나 퍼붓고 있으니, 올바른(?) 정신을 지니고 있는 애국자들로부터의 꾸지람은 당연합니다.
○ 25장에 가서는 한술 더 떠서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통치를 받게 된다고 선언해 버립니다(11절). 구한말 우리 조상 가운데 한 명이, “조선은 앞으로 36년 간 일본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 얼른 한일합방하자”라고 주장했다면 그는 만고의 역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바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28장에서는 나무 멍에를 가지고 바벨론 포로의 불가피성을 주장합니다. 보다 못한 선지자 하나냐가 나무 멍에를 꺾어 버립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아예 쇠 멍에를 만들어 버립니다(13절). 변개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선포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이지요. 이외에도 무수합니다만 나머지는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자, 예레미야의 예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우리들은 예레미야가 참 선지자요 그를 반대한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경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 측면에서 누구의 주장이 더 그럴듯한가에 있습니다.
♠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예레미야는 삼학사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을까?’하는 측면입니다. 비록, 현실인식이 미흡하고 감성적일망정,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격려와 위로와 권면을 할 수는 없었을까요? 삼학사처럼, 또는 구한말의 민영환 대감처럼 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의 패망만큼은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나라의 패망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이완용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 성경에는 이와 반대되는 사례가 없을까요? 아니, 있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민족을 위해 나섰습니다(에4:16).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며 충절을 지켰습니다(단3:18). 또 모세도 자기 목숨 대신 민족을 선택했습니다(출32:32). 바울도 그랬습니다(롬9:3). 죽는 한이 있더라도 꽥 소리는 하겠다는 뜻입니다.
♠ 이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예레미야 활동 말기 상황은 적국에 의해 조국이 망하느냐 살아남느냐가 결정되는 급박한 시기였습니다. 이때 모든 사람들의 상식에 의하면, 결코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국민들을 격려하는 것이 옳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정반대로 ‘자발적인 항복’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성경 말씀이니까 무조건 지당하다고 여기고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예레미야는 분명한 매국노입니다. 이완용이보다 더 나쁘고 친일파보다 더 악질적입니다. “세상에~~~자기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예레미야는 매국노처럼 비춰집니다. 예레미야를 반대했던 이들이 더 애국자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눈에는 매국노로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는 분명한 애국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망해야 했습니다. 응당 망해야 할 조국에 대해 순순히 망하자고 말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눈물의 의미가 이해되실 것입니다. ‘망해야 산다.’는 역설의 진리는 성경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다반사이며 시편 23편도 그 중의 하나이며 갈보리 십자가가 그 극치인 것입니다.
♠ 현실 교회에의 적용입니다. 우리는 막무가내로 교회와 신앙을 옹호만 하려 합니다. 하지만 교회든 신앙이든 망해야 할 때라면 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깨우칠 수 있는 교훈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목격되고 있는 교회상들은 망해야 할까요? 안 망해야 할까요? 저는, 교회를 막무가내로 변호하려는 거룩한 성도들보다, ‘교회가 망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목사님 장로님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이것이 현실 교회에 대한 진정한 반성일 것입니다).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
오늘 형님이 올리신글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셔서 쓰신글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분석으로는 정말 부정적인글이지만.
성경에 등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사람들의
하나님말씀을 선포한 내용을 보면
부정적이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내용을
전하고있다는 점을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적과 부정적 특히 하나님이 화나셨을때 그 화나신 내용과 그말씀을 싫든좋든
전하게 되는 선지자들은 인간적인눈으로는 정말부정적인 표현들과
대부분 냉혹할정도로 살벌한표현들이 쓰이고있다는점을
살펴본다면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항상 명심하고 살아야할것같습니다.
그리고 모든감정표현하심의 공통주제는 하나님품으로 돌아오라는 메세지이니,
우리로서는 이해하고 설명하기힘든 내리사랑이라 말할수있는것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