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있었네
오늘은 열왕기하 5장을 묵상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양합니다. 먼저는 본문의 중요 등장 인물들을 봅니다. 아람 왕과 군대장관 나아만,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어린 소녀와 나아만 장군의 아내, 또 나아만 장군의 종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과 선지자 엘리사와 사환 게하시도 있습니다. 제법 많은 인물들이 등장을 합니다. 대부분은 이 본문에서 엘리사와 나아만과 게하시에 대하여 집중을 합니다. 저는 오늘 먼저 이름도 없이 적국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한 어린 소녀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살았었는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은 여전히 악조건입니다. 그것은 원수에게 포로로 잡혀왔기 때문입니다. 이 소녀의 나이가 몇살인가는 추측만 할 뿐이지만 어린 소녀라고 한다면 약 열살이상 열일곱살을 전후로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의 난리가운데 소녀의 부모는 어디론가 도망을 갔던지 죽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헤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간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이 소녀는 포로로 잡혀왔는데 다행인지 아람의 군대장관에게 종으로 끌려온 것입니다. 그리고서 나아만 장군의 아내의 몸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물론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가 있었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더구나 이 소녀는 여주인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소녀였지만 사마리아의 장군의 여주인에게 신임을 두둑하게 얻었다고 하는 것은 평소에 이 소녀의 삶과 주인을 향한 진실한 태도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말이 안통하고 문화가 다르고 신분이 차이가 난다해도 그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는 누구나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소녀의 신앙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 입니다. 이것은 어느날 갑자기 주어지는 신앙이 아니라 매우 어려서부터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단지 무서운 하나님이나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만이 아니라 삶의 주인되시고 고아와 과부의 보호자 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사귐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진실하고 거짓없는 사랑의 관계로 만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어떠한 환경이나 문제를 당한다해도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와 사도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굳게 신뢰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신앙인들이라면 조건이나 상황 때문에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과 삶의 자리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계적인 대 경제난으로 모두들 절망과 근심으로 요동하고 있는 때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관리가 잘 안되는 현실입니다. 곳곳에서 사회적으로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순간적인 판단의 미숙으로 돌이킬 수없는 재난을 당합니다. 본인도 불행하고 주변 이웃들까지 공포와 두려움과 손해를 겪는 불상사들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소위 묻지마 라고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오죽하면 그랬을까하는 측은지심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그런 사건들을 정당화 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을 향하여 무조건 심판과 정죄만을 일방적으로 할 수도 없는 것은 사회 구조적인 모순과 악순환의 풀수 없는 고리들 때문입니다.
이제는 남의 일이라고만 무관심할 수 없을 만큼 우리곁에 너무나 가까이 왔기 때문에 서로 조금씩만 나누며 손 잡아주며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야할 중요한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의 이기에 의하여 희생양으로 몰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속에서 정의와 공의와 도덕과 사회적인 양심이 극도로 마비되어 가는 현실과 일류 경쟁의 가속화 속에 병들어 버리는 학생들의 미래도 심히 걱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하기전에 사실은 이 땅의 교회가 마당히 품어야 할 숙제입니다. 최근 기독교인들의 우울한 사건을 접하면서 정말 새롭게 정신을 차리고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고 전심으로 돌이켜서 회개해야할 때입니다. 물량적인 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성도들의 삶과 영성에 대한 관심에서 빗겨난 것을 돌아보고 다시한번 영적인 부흥을 위하여 참회하고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렇게 기도의 자리로 가는 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엄청난 기도의 양이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교회마다 기도없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요? 지금도 열심이 부르짖는 한국교회들을 향하여서 기도하라고 요청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기도의 사람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하는 기도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니엘이 기도할 때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리오 왕 일 년에 나 다니엘이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 곧 예루살렘이 칠십 년 동안, 황무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보았다. 나는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고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주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간절히 구했다.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고백하였다. “주 하나님, 주는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주는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언약을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지었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악하였고 주를 배반했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의 종인 예언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조상들과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주여, 주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부끄러움이 가득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주님께서 여러 나라에 흩어 놓으신 모든 백성이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주께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우리와 우리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조상들이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반했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종인 예언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주를 배반하고 주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인 모세의 율법에 적힌 저주와 심판이 내렸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큰 재앙을 내리셔서 우리와 우리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과 같은 것은 이 땅 위에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이 모세의 율법에 적힌 대로 닥쳤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재앙을 준비해 두셨다가 우리에게 닥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다 의로우신데도 우리는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 주는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 일로 지금까지 주의 이름이 유명해졌습니다. 주여, 우리가 죄를 지었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주여, 주의 의로우심을 따라 주의 거룩한 산이자 주의 성인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의 악한 죄 때문에 우리 주변의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주님의 백성을 욕하고 비웃습니다. 우리 하나님,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간절한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주를 위해 폐허가 된 주의 성전을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 주시고, 눈을 떠서 우리에게 닥친 끔찍한 일을 봐 주십시오. 우리가 도움을 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해서 구합니다.
주여, 들어 주십시오. 주여, 용서해 주십시오. 주여, 들으시고 이루어 주십시오. 주를 위해서 늦추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 곳은 주의 성이고 우리는 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내 죄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털어 놓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산인 예루살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단9:2-20)
에스라의 회개 기도역시 비슷한 맥락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깨닫는 자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프로그램과 행사용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은혜 가운데 깨달은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수한 기도가 아무런 유익함이 없는 것은 혹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내 뜻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쓰는 기도가 아닌가를 살펴볼 일입니다.
이 소녀의 신앙이란 바로 하나님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쌓은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어떠한 조건이라 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여주인의 남편의 문둥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소녀는 즉시로 자기의 소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본다면 자기를 종삼고 자기 민족을 괴롭혔던 나아만 장군이 병들었다면 속으로 좋아라 해야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거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만 이 소녀는 전혀 그럴생각이없습니다.
그 소녀가 여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님이 사마리아에 사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예언자는 주인님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왕하5:3)
이렇게 말하는 소녀의 여주인은 그 말을 듣고 무시하거나 흘려 넘기지 않고 남편에게 고합니다. 남편역시 하찮은 어린 여종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의 세심한 간섭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느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치밀하고도 세심하고도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사용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주 자주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면서 혹은 이것이 우연이겠거니 하면서 무심히 지나갈 만한 모든 조건과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다 사용하신 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소녀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알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아만 장군이나 엘리사나 이스라엘의 왕이나 게하시나 누구나 할것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시대와 역사와 나라와 모든 사람들을 품으시고 살피시며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모든 능력을 아낌없이 동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아만 잔군의 병을 고치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고백을 얻기까지의 과정속에 바로 우리가 보기에 하찮은 어린자를 통해서도 큰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하찮다고 표현을 한 것은 우리의 고정 관념속에 들어 있는 선입견이나 죽어버린 사고의 틀을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속성은 그렇게 언제나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지는 것으로 판단을 하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곁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를 놓치고는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압니까? 바로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있는 여러분이 그 숨겨진 하나님의 보물인지를요? 누가 압니까? 지금 여러분의 눈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이 그 남편이 그 아내가 그 동생이 그 자녀가 바로 하나님의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존재인지를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십자가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그렇게 존귀하게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아만 장군의 아내의 어린 여종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200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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