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에도 동일한 사건이 기록 되었지만 누가는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였다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좀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가지 독특한 부분이 있다면 신약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백부장들은 대부분 악한 이미지가 아니라 정의로운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 기자들이 백부장을 특별하게 선한 이미지로 다룬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에 대하여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백부장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지식이 부족하지만 당시 백부장이라 하면 로마의 주력부대입니다. 여러 나라를 속국으로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저항운동들을 진압해야하는 특별 기동대라는 뜻입니다. 오직 로마 황제와 정부를 위하여 용감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전투해서 승리해야하는 군대입니다. 비약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도 전투경찰이 아마도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국가를 전복 시키려는 집회와 폭력적인 행동을 엄격하게 진압해서 사회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원래의 목적은 선량한 시민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함인데 안타깝게도 시위진압용과 정권 수호차원에서 오용이 되는 상황으로 변모해 가기도 합니다. 또 예를 들자면 지금 이라크에 파병중인 우리 장병들역시 그런의미의 군대입니다. 이라크의 사회질서와 이라크 주민들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차원에서의 주둔군이며 여러가지 안보와 치안과 건설과 복지를 지원하려고 보낸 평화 유지군 입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테러와 긴장속에서 무장해야하는 특수한 상황인지라 장병들의 수준역시 최고의 수준이며 고도의 훈련을 마친 용병들이라는 점입니다. 무조건적인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으며 파견한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도 현지인들에게 정의로운 이미지를 주기위함이 중요합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지금까지는 아주 모범적으로 잘하고 있다니 반갑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는 법과 질서와 체계가 매우 조직적이고 탄탄했습니다. 점령국가에게 무조건적인 힘의 행사를 한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정한 자유를 보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로마의 통치아래 순복하도록 하는 비교적 민주적인 전략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주둔군들은 그러므로 엄격하게 훈련되었고 정의를 위하여 매우 치열하게 생각하며 살았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 정의라는 틀이 비록 로마와 황제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억울하게 혹은 부당하게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짓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 주둔군인 이달리야 군대는 백성들에게도 비교적 우호적이었을 가능성이 엿보입니다. 한 예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고넬료역시 백부장입니다. 제가 백부장의 변호인이 아니라서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장황설을 늘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종이 있었는데 그만 죽을 병에 걸려서 앓아 누웠습니다. 백부장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여러가지 좋다는 약을 사용했을 것이지만 회복이 되지 않았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이상합니다. 단지 종이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종은 노예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쓸만한 이유가 없는 존재이지만 백부장이 종을 많이 사랑하고 아끼고 신뢰했었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백부장이라하면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세미한 사건 하나 하나까지 정보를 수집하게 되어 있습니다. 민란이나 폭동을 예의 주시하고 방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정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갈릴리에서부터 들려오는 예수님의 행적이 자세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라도의 편지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기이한 행적과 이적들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어쩌면 먼발치서나마 예수님을 살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알고 배웠던 로마의 철학자들과 많은 신관들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가 백부장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만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놓치지 않았고 집중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바라봄의 원리라고도 합니다.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군인들을 보낸것이 아니라 유대의 장로들을 보냅니다. 이것은 평소 장로들과의 교류가 친밀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의 장로들과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그의 사고의 세계의 자유함과 폭넓음입니다. 주둔군으로서의 우월감으로 교만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입니다. 물론 모든 로마인들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구나 장로들의 입을 통해 백부장의 행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 나아간 장로들이 입을 모아서 백부장을 칭찬합니다. "그들이 예수께로 와서, 간곡히 탄원하기를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하였다(눅7:4~5) 장로들역시 백부장에 대하여 굉장한 신뢰를 말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은 유대 백성들의 어른이며 존경받는 지도자들 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간절하게 마치 자기의 일을 아뢰듯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증거된다는 것은 그의 인격과 성품이 어떠한것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나를 소개할 때 이렇게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 믿는자를 이렇게 기쁨과 자랑과 감사함으로 말할수 있다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또다시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는 백부장의 친구들을 보낸것입니다. 왜 직접 오지 않았는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나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눅7:6~7)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백부장의 고백처럼 주님을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께 나아갈 엄두도 없는 존재가 우리들 입니다. 그저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며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탄식하는 세리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나 은혜라는 이름으로 주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나아갑니다. 물론 그럴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자기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특별히 모든 죄인들을 용납하십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받아 주십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며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철저한 절망감을 인식하고 있는가 입니다. 사랑의 주님이라고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혹시 뻔뻔스럽게 당연하게 나아가지는 않는지요. 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주님앞에 엎드려서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모두들 엄청나게 잡힌 고기에게 환호하며 정신을 팔고 있을 때에 베드로는 주님앞에서 자기의 죄악상을 발견하고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말하고 구원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는 요즘 입니다. 교회안에만 들어오면 모든게 다 용서가 되는것처럼 말입니다. 직분 받으면 봉사하면 열심히 출썩 잘하면 그만입니다. 교회 몇년 다녔는가로 결정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났는가가 아니라 단지 교회생활에 잘 적응하였는가이며 출썩 교인이 몇명이나 모이는가이며 담임목사님의 화려한 경력이 어떠함이며 교회당 건물의 크고 웅장함과 화려함이 자랑이며 자긍심이며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공동체에 소속이 되었다는 것이 곧 확신이며 자랑이며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 입니다.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전부 잘못이며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끊임없이 내면적으로 생명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가는 이 길이 정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인가 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관심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준으로 결정되어지는 삶인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과 말이나 습관은 어떠한가 입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나 의식은 예수님의 말씀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얼마나 잘 수행하였으며 얼마나 경건한 삶을 실천했는가 이전에 이것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의도를 이해하였고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피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곳에 나와 관계를 맺고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좀더 범위를 좁혀 본다면 내가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현장속에서 나는 어떤것을 근거로 하면서 무엇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가 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원천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 기분의 만족인가 내 원함의 성취때문인가 아니면 비록 현실은 초라해도 하박국의 고백처럼 그리 아니할 지라도 비록 없을 찌라도 구원의 주님 한분때문에 만족하며 기뻐하는가 입니다. 내 감정을 사로잡고 있으며 나로 기뻐하게 하는 것이 누구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 때문인가요? 아니면 환경이나 조건 때문인가요? 이제 바야흐로 세계경제의 장기적인 침체를 한목소리로 우려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원칙입니다.
우리는 갈수록 세상이 좋아질것을 기대하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정한 시기와 하나님의 작정하신 미래가 있습니다. 처음과 나중이며 알파와 오매가이신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심이 확정 되었습니다. 우리가 은혜아래 흠벅 취함도 좋겠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은 마지막 때를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온다는 것입니다. 언제일지는 모릅니다. 다만 조짐은 보인답니다. 지금이 바로 자다가 깰때라는 사도의 가르침을 유의해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은 어지럽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주의 말씀에 철저하게 함께 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둠에 휩싸여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방향감을 상실한체로 엉뚱한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빛이되고 등불이 되고 길이 되어서 정확하게 그 길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목표점을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불행할까요?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이 이 방향이 옳은길인줄 알았었는데 그 끝에 가서보니 여기가 아니라면 어찌해야 합니까? 다시 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와버렸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저는 평소에 꿈을 잘 꾸지 않습니다. 꾸었더라도 깨는 죽시 잊어버린다는 게 옳겠지요. 그리고 꿈을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전에 인상깊은 꿈을 꾸었습니다. 어디론가 가다가 내렸습니다. 전혀 낮설은 곳이었습니다. 방향을 알 수가 없었고 당황한 저는 서둘러서 집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까를 고민 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도 가야만 했고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너무 늦으면 밤이 깊어지기에 그렇습니다. 한쪽을 보니 시골길이었고 멀리 끝없는 산과 숲이 보였는데 아득했습니다. 그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다시 뒤를 돌아 보니 엄청나게 높은 담장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지도를 갖고 있어서 함께 찾아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찾고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가던길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서 뒤돌아서 가기로 했습니다. 어느순간 저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하늘높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끝에 매어 달려서 하늘을 바라보니 무엇인가 글씨가 보였습니다. 큰 글씨로 나타났는데 예수 사랑 이라는 의미의 글씨였습니다. 너무나 맘이 좋았습니다. 그래 저기로 가야해 하지만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매어달린 저는 다시 아래로 내려올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 곳만을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기로 올라 가야하는데 올라 가야하는데 제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꼭 가고 싶었습니다.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주의 이름만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외치다가 그렇게 하염없이 애를 쓰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무서운 꿈이라든가 놀라운 꿈은 아니었지만 많은 상념에 잠을 청하지 못했습니다.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만일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혹시 아래로 추락하지는 않았을까요? 다시한번 지금의 나를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제대로 가고 있는가...늘 주님과의 동행에서 스스로는 동행한다고 믿고 있지만 과연 정말인가...나의 삶을 보면서 도저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 저입니다. 그래도 저는 주님만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도 저는 주님만이 구원임을 믿습니다. 백부장이 주님께 친구를 보내서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자격이 없답니다. 그저 주님께서 말씀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주님은 놀라워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안보고 믿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족합니다. 이것이 백부장의 믿음이며 주님께서 매우 놀라워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자주 무엇인가를 손에 잡아야만 믿습니다. 내가 눈으로 봐야만 믿습니다. 내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정권에 들어와야만 정말인가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실제로 결과가 되어서 눈앞에 나타나야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것도 그래서 자꾸 확신을 갖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체험을 말합니다. 경험을 말합니다. 조건을 말합니다. 그래서 능력있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아야 속이 시원해집니다.
구원은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앞에 펼쳐진 주님의 말씀을 잘 보십시오. 그 말씀으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으로가 아닌 주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 없고 자격 없지만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얻은바 구원 이후의 삶은 점진적으로 성화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친히 인도하십니다. 그 과정 중간에 우리가 전적으로 순종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상황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떤이에게는 생명과 평안으로 어떤이에게는 징계와 책망과 연단으로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실패는 그런것입니다. 백부장처럼 주의 말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자꾸만 그들의 기준과 소원으로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시작해서 율법아래 메이게 되고 율법에 따라 정죄하고 판단하니까 예수님이 거치는 돌처럼 되었고 은혜가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은혜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스라엘은 엄청난 수고를 했지만 결국은 울법으로 넘어진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은 은혜로 주의 말씀을 신뢰하였기에 주님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돌아서서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백부장의 말을 분명하게 주님은 들으시고 놀라워 허셨습니다. 마땅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백부장의 믿음을 소유했어야 하였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택함을 받은 민족입니다.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통해 하시는 섭섭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믿음처럼 단지 주의 말씀을 믿는 신앙인일까요? 아니면 다른것에 의하여 움직이는 신앙인일까요? 주님의 말씀 이외에 우리를 사로잡는것이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해 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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