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은, 타락하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해서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빨아들여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주면,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가 없어지고, 저주를 받아서, 마침내는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히6 : 4-8)표준새번역.

믿다가도 타락할 수 있을까?

사실 위의 본문은 성경 상의 난해 구절중에 하나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많아서 아직도 분명하게 이거라고 확정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각자의 교리와 배움과 신앙의 형성에 따라서 취사선택하고 또한 이 구절을 이단자들이(이단자라는 표현도 좀 섬뜩합니다만 통용 상으로서) 소위 말하는 정통교회와 교단들을 반박하는 도구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신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을 저와 같은 무지한 자가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만 최근 어느 목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한 묵상을 올리셨고 감사함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글을 읽고서도 내심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고 뭔가 시원하게 뚫리지 못함도 있었습니다. 제가 원래 삐뚤어진 심성의 소유자 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은혜와 믿음과 좋은 글은 분별할줄 안다고 감히 생각해 왔습니다. 공연히 좋은 글을 걸고서 시비하며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뭐라도 되는듯한 오만함과 교만일 수 있겠다 싶어서 지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온종일 마음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주님께 물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마음으로 질문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방언도 할 줄 모릅니다. 특별한 은사를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뜨겁게 밤샘 기도나 새벽기도는 엄두도 못 냅니다. 그저 편의점에서 야간 근무자로 한 오 년 넘게 밥을 먹고 사는 못난 사람입니다. 그것도 주님의 인도 하심과 보호하심으로 살고 있다고 믿으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카페를 관리하는 것도 겨우 새벽에만 가능한 사람이 누구를 가르치며 누구와 변론할 처지가 될까 싶은 그런 형편입니다.

어쩌면 가장 교만한 사람이 저 일 거라 생각하며 또 가장 무지한 사람이 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까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글을 올리는 이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라는 점을 참고하셔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먼저 제목이 "믿다가도 타락할 수 있을까?"라는 상당히 선동적임은 틀림없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질문해본다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로 대비될 수 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해도 각각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 논란이 있습니다. 또한, 교단의 교리에 대한 것에서도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정리해야 할 것은 신학은 학문적이며 철학적인 신에 대한 알아감일 뿐 그것이 성경을 대변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신학의 거두들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나 웨슬리나 칼뱅이나 또한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입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통해서 이들이 이룬 대단한 업적이야 지대하고 훌륭합니다만 반대로 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난 부적절한 불행한 사건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근거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아서 살았던 사도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살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가 사실은 걸출한 신학자들의 사상에 의하여 판단이 되고 분별이 되는듯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성령입니다. 사람은 다만 안내자며 안내자로서 더 깊이 그리스도 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교회도 그런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지 마치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으로 오해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주어진 은혜이며 선물이지 특정한 대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게 아니며 교회가 구원을 줄 수도 없으며 신학자나 위대한 영성가들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궤변이 상당히 심하지요. 그러나 제가 글을 읽으면서 혹은 설교를 접하면서 느낀 것이 마치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처럼 뉘앙스가 풍겼기 때문입니다. 저만 그렇게 느꼈다면 제가 비정상일 것이고요. 대부분의 한국의 기독교가 그것을 은연중에 풍기는 것이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이제야 뭔가 감이 잡히는군요.

제가 왜 마음이 답답했었는지 의문이 풀어져 갑니다. 그렇습니다. 위에서 언급하신 목사님의 글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그 글에서 풍겨나오는 느낌이 걸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항 영혼을 지극하게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감히 시비할수 없지요. 그것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말할수 밖에 없는 교회현실이 답답했던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제가 느낀 것은 결국은 교회를 떠나면 구원은 없는가?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가운데 목회자님들께 진심으로,
진심으로 묻고 싶습니다.
목사님들 신학박사님들께,
교회 충성하시고 영성과 믿음이 훌륭하신 신앙의 선배님들께도
똑같은 질문을 감히 묻고싶습니다.

정말 교회에만 구원이 있습니까?
교회아니면 구원은 없는것인가요?
교회가 구원을 주는 이 시대의 최고의 영적인 곳입니까?
교회에 출석해서 직분받고 열심을 내어 봉사하는자에게 구원이 유효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이들이라해도 교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없는것입니까?

정해진 시간에 교회 나가서 정해진 형식과 절차에 따라서 어김없이 순종해야만 구원이 유효한 것입니까? 오로지 교회에만 관계를 맺어야만 하나님의 아신바가 되며 구원의 확신이 주어지는것입니까? 부족한 제가 믿기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들에게 구원은 누구든지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믿음이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하나님편에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만 다만 한가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이며 믿는것이며 그의 뜻데로 살아가는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조건을 감히 하나님께 드릴수 있으며 만족시켜 드릴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없는 그 만족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인이었을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화목의 관계로 옮겨주셨습니다.
멸망의 자식에서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말입니다.

이 구원의 비밀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며
이 구원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구원의 비밀이 십자가이며
이 구원의 절정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구원의 확증이
성령의 강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며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성도이며 모임이며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제가 답답한 것은,
오늘날 교회가 성경에서 증거하는 초대교회의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는 공동체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교회가 구원에 대하여 왈가왈부한다는것이 심각한 모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구원에 대한 개념과 성도의 개념과 교회의 개념자체가 충분하게 확인되지 않은 것에서 성경이 무리하게 적용되고 강단에서 해석이 되어지는것이 문제라고 감히 말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문제는 여기까지 접어두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믿다가도 타락할 수 있는가?'를 짚어봅니다.

히브리서의 본문은 불신자에게 보내는 서신서가 아닙니다. 이미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한 무리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편지입니다. 유대교에서 전통과 관습과 교리(유대교의 교리)를 벗어나서(거절하고 새롭게 개종한 사람들) 십자가에 죽었던 나사렛 예수를 믿는 무리들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탈퇴한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에서 출교,출회를 당한 이단자의 무리이며 적대적인 관계가 된 원수들입니다. 야훼,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교가 유대교입니다. 그런 유대교는 민족적이며 종교적이며 조직적인 집단체제인데 그들의 전통과 관습을 거절한다는 것은 마치 로마 황제를 거절하는것과 같은 배신이며 배도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는 동족들 에게 유대교인들 에게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 에게 격려와 위로와 장래의 소망에 대하여 확인을 시켜주는 서신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에 대한 답이 잡히지요.

믿다가도 타락할 수 있느가?라는 질문은 역으로 믿는자는 타락할 수없다는 것을 전제하에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시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가 라는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은자는 취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 하에 해석을 해야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좀 길기는 하지만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은, 타락하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해서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타락하면 새롭게 회개할 수 없다는 말때문에 곤혹스러워 할 줄 압니다. 이 뜻은 회개할 수 없다는것이 중심이 아니라 타락할 수 없다는 것을 깔아놓고 대비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취소할 수 없다 와 같죠. 믿는자는 타락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일 합니다. 믿음이 나에게서 나온것이라면 얼마든지 사라질수 있겠지만 구원이 선물이며 은혜이듯이 믿음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에서 비춰볼 때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믿음이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이지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열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구원과 믿음에는 반드시 삶의 전적인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인격이 변하고 가치가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습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 하고 '중생'이라 하고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란 돌아서는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새 사람으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의와 거룩함으로 옷을 입은 새사람이 되었다 하며 이제는 새로운 사람 으로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엣 습관이나 전통이나 율법의 구속에서 해방된 자 라고 합니다. 따라서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것은 이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신분이 옮겨졌다는 것이며 이방인에서의 구원이란 옛 사람이었던 이방의 습관과 언어와 가치와 우상 숭배에서 돌이켜서 새 사람으로서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는무리가 한 마음으로 모여서 기쁨과 순전함으로 떡을 떼며 자기것을 자기것 이라 주장하지 않으면서 서로 나눔을 실천한 공동체라는 것을 오늘날의 교회와 부득불 연결시켜 본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믿는 무리와 오늘날의 교회의 믿는 무리가 어떻게 연결이 된다고 생각 하시는지요? 초대 교회는 분명하게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무리들 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성전 중심이나 회당 중심이 아니라 믿는자 들의 집이며 가정 공동체라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이심과 부활하심과 다시오심을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대로 산상수훈을 삶의 최고의 덕목과 가치로 믿고 순종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받아서 읽고있는 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대교와 결별했습니다. 그들의 최고의 가치와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것 때문에 동족들에게 고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었고 삶의 현장에서도 그들의 박해를 참으며 숨으며 동굴로 빈 들로 도망다녀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떠나지 않았으며 기꺼이 죽음까지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참된 성도들 이었습니다. 그들이 당면한 고난과 환란 앞에 히브리서의 내용은 참으로 귀한 복음의 소식이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돈독하다 해도 배고픔과 육체의 고난은 동일한 것입니다. 때로는 마음이 무너질수도 있습니다.

눈앞에서 가족이 끌려가거나 죽거나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무너졌겠습니까? 정말 주님은 없는것 같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는것 같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현실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적잖은 동요가 충분히 생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로하고 믿음에서 굳게 서서 주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난중에서도 사랑으로 형제들을 섬김과 충성을 주님은 보고 계시며 기억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는 이미 성도들이 믿음에서 떠나거나 타락할수 없다는 것을 전제 하고 격려 차원에서 보낸 서신서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저는 히브리서 6장1-2절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 놓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세례의 교리와 안수와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다시 기초학습을 닦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믿음의 수준이 초보가 아니며 어린아이와 같지 않는 단단한 식물을 먹을만큼 성숙했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교회 구조 속에서의 교인들을 냉정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다 틀렸고 아니다 라는식이 아닙니다. 사실 교회의 구성원들이 구원과 믿음에 대한 경험의 토대가 너무 빈약하지는 않았는가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가지 프로 그램과 교육의 현 주소를 살펴본다면 단지 교회에 적응을 무난하게 하도록 돕는 역할 외에는 일대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것을 미처 알지도 못한 체로 등 떠밀려서 직분자로 봉사자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서 교회가 무엇이며 성전이 무엇이며 예배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체 명목상의 교인들만 북적거리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례로 성도에 대한 개념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성도가 얼마나 거룩하며 존귀한 지를 모르고 교회에서의 서열 정도로 밖에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목회자의 그릇된 가치관이 아니고 무엇이겟습니까?

성도는 평신도며 초보자며 그 위에가 서리집사며 또한 안수집사가 그 다음이며 그 다음이 장로요 권사요 이런식의 계급장 정도로 인식하게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정말 참다운 목자라면 이것부터가 바로 잡혀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목사와 교사와 봉사자들과의 다양한 형태로의 섬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이며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의 영광을 알지 못한체 헛된 세속적인 가치로 자신을 평가 절하하며 어떡하든지 성공하고 출세 해서 신분 상승이 되어야만 교회에서도 존경 받고 대접 받는다는 인식이 만연 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현제 교단과 제도권이 안고 있는 가장 치명적이며 가장 기초적인 걸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뉴스앤조이에 "매가처치"에 대한 글을 기고한 신광은 목사님의 글에서 기억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크리스천들만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기업'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박사라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델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실화다. 오늘날 교회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오늘날 교회는 신약시대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층에 장로교, 2층에 감리교, 3층에 침례교, 그리고 지하는 나이트클럽. 백화점 바겐세일과 같은 총동원 전도, 교인 뺏기 경쟁, 집짓기 경쟁. 도대체 어디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것이며, 도대체 어디서 로마 제국을 굴복시킨 신약교회와 초대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는 벌거벗었다. 이 사실을 남들은 다 아는데 교회만 모른다.

구조적으로 목회자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결코 성도들의 인식역시 성장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말은 다시말해서 목회자의 교회에 대한 가치와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교회는 세상으로 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초대교회와는 더 이상 간극을 좁힐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겉모습으로는 교회 행정을 개선하고 교회법을 고치고 혹시라도 헌금이나 십일조의 투명한 사용과 구제와 봉사로 세상에서 이름을 낼 수는 있을 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실현하기에는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히브리서를 살피면서도 결국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이다. 물론 그것이 아니라고 항변하시겠지만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며 교회안에 동참한 사람은 이미 구원은 보장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구원을 나눠줘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제 말이 상당히 위험스럽지요?

그렇다면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을수 있는가?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행4 :12)

교회와 상관없이도 예수 이름을 믿는자 들에게 구원은 있습니다. 여기서 물론 믿는다는 것이 단지 입으로 믿노라 하는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적인 믿음이며 삶의 변화이며 열매로서 입증하는 믿음을 근거로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입증이라고 하는것도 획일적일 수는 없습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대로 믿음의 분수대로 어느시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만일 교회안에만 한정을 두게 된다면 결국은 구원에서 제외되는 수 많은 이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것을 주님이 과연 원하실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교회 안에서도 상당부분 온가족이 교회 다니는것이 아닌줄 압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그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라고 판단할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때로는 상황적으로 본의 아니게 교회를 등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교회 출썩을 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교회 다니는 분들에 결코 뒤진다고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기성 교회를 출석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일까요? 저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제가 신앙하면서 완전하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아직 다스려지지 못한 인격적인 부분과 사회적으로 대인관계에서 상당히 부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저를 보는 양면에서 한 쪽에서는 믿음이 좋다고 보는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저런사람이 예수 믿는사람이라고?하는 소릴 듣기도 합니다. 이렇게 균형 잡히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으며 그분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에 합당한 자로 살아 내지 못함에 대하여 걱정과 한숨을 쉬면서 절둑 거리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개인적인 하소연을 하며 넋두리를 하고 있는꼴이 되었습니다.

저도 한때는 교회만이 구원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이들마다 교회 나가야 한다고 전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솔직하게 교회 무조건 나가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저의 주관적인 입장에서의 왜곡된 편견이라 믿고 싶습니다.

어느분은 히브리서의 본문을 로마서 8장에다가 연결을 시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3-39)

정말 은혜되고 감동 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믿는자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저도 너무나 좋아하고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좀더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보낸 편지역시 히브리서와 동일하게 당시 로마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충분하게 알고 확신한 상태에서 보낸 격려와 위로의 편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시켜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당신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으며,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그 아들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를 증언하는 분이십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하며,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러분에게로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롬1:1-11)

밑줄그은 부분을 살피면 알수 있듯이 로마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초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삶으로서 자기들의 믿음을 증거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구원에 대한 이해와 확신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 이 부분을 무조건 적용할 수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네 말에 오해 하시거나 반발을 하실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그렇다면 너는 잘났고 다른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것이냐 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 사실 구원이란 내가 내 행위로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현대 교회 안에 참여한 교회 구성원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신앙관에 얼마나 근접했을까를 비교할 때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흑백 논리로 판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와 히브리서의 구원에 대한 강력한 보증서와 같은 말씀을 구원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없는 이들에게 적용할 경우에 오히려 그들의 영혼에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우려감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직으로 섬기다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 역시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여지없이 살아남지 못했다는것입니다. 또한 사무엘의 아들들역시 전부는 아니지만 타락했었고 다윗같은 믿음이 사람의 자식들이 어떻게 믿음에서 멀어졌는가를 살펴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제 글의 결론을 마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결국 히브리서의 본문은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도 어려움과 현실적인 핍박과 박해를 견뎌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격려와 위로와 희망의 편지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많은 부분에서의 자유로운 환경과 훌륭하게 준비된 교회당과는 전혀 거리가 멀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굳게 잡고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계시록의 서신서도 동일하게 환란과 고난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참고 견뎌야할 이유를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도래를 기다리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주인인 그리스도,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인 성도들을 지키시며 보호하시며 곧 다시 오시면 칭찬과 상급이 있을것을 기대하면서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불의한 세력들이 영원할것 같아도 반드시 심판의 때가 있으니 모든 소망을 주님께만 두고서 구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써 나그네처럼 살다가 본향을 생각하고 시대를 본받지 않으며 시대에 타협하지 아니하며 불의의 삯을 탐하지 아니하며 차라리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증언하면서 우리들도 그들의 소망인 본향을 향하는 사람이라고 증거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과 역경을 단지 세상에서의 가난과 어려움으로 이해하면서 오늘날 교회안에서 무조건 충성하고 견디면 하늘의 상급 받는 성도라고 가르치는 한 교인들의 영혼에 치명적일수 밖에 없다는것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화속에서 교회 안에서 장로요 집사요 하는 기업인들의 의식수준이 오늘날 세상으로 부터 멸시와 욕을 먹고 있지만 본인들과 교회에서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예수 안에서 그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겪게되는 불합리와 의로운 길을 가기 때문에 당하는 가난함과 배척이지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을 위하여 당하는 어려움과 불의의 삯으로 당하는 어려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동일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잘못은 지적하고 사랑으로서 돌이키면서 그리스도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눈감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의식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성경을 성경적으로 적용한다해도 그 의미가 완전히 왜곡될수 밖에 없다는것입니다.

믿다가도 타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결코 믿는자는 타락할 수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저만의 결론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제 고민하고 살펴야 하는것은 믿음이 무엇인가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교회여야만 하는가?

2009/01/16.ⓒ주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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