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 되셨으니,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요한일서2장)
사도 요한의 편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고 있습니다.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에서 저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습니다.
매번 이 본문을 묵상하다가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실로 엄청난 무게와 논쟁의
위험성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너무 무지한 저로서는 이 부분을 피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지만 이 본문의 내용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교리적인 입장에 따라서 큰 차이가 벌어질 수 밖에 없기에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안팎으로 대두되고 있는 '제한속죄'냐 아니면 '무한속죄'냐의 갈림길이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라고 하는 존 칼빈과 알미니우스의 신학적인 입장(교리적)의 대립적인 관계로부터
파생되었고 그의 후예들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교단의 단절과 분열을 위한 도구로서 이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신학사상에 대하여 한발짝 물러서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사실은 무식해서 알고 싶지도 않고
헷갈리기 때문에) 신경쓰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장로교회에서 신앙의 영향을 받았기에 무의식적으로도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정론이냐 만인구원론이냐의 문제까지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머리가 둔하고 지식적으로 무지한 사람으로서 머리를 흔들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신앙인으로서는 얼마든지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는것을 핑계삼아 한번 끄적거려 봅니다.
신약의 서신서에는 한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수신자들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서신서를 기록한 기록자들이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서 보낸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자가 누구냐면 분명히 당시의 교회들(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던 자들)입니다. 다른말로하면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편지를 보낸 발신자들은 '사도'들입니다. 사도(제자)들은 성경적으로 하면,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시작해서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닌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행1:21-22)
사도의 기본적인 조건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자요 함께 먹고 마신자요 부활의 목격자요 증인들이 사도입니다.
오늘날 보면 자칭 사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사도들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예언사역과 표적과
성령운동을 하면서 말세에 미혹하는 무리들이 나타난다던 주님의 말씀을 잘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자들의 집회와 서적을 열성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자들의 공통점은 말씀은 없고(적절한 구절을 이용하는 수준)고도의 심리적인 테크닉과
미디어의 기능을 최대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쇼를 보여주듯이 무대에 집중하도록 구성이 치밀합니다.
사실 이런 면에서는 대형교회의 예배실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보여주는 예배로의 확산입니다. 바쁜 성도들을 위한 배려인지 몰라도 새로운 신도들의
문화적이며 지적인 욕구를 채워주려는 듯한 서비스가 물씬 풍기거든요. 성가대의 연주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는것
같아서 어쩔때 보면 기가 팍 죽어 버립니다. 거기에 단원으로 들어가려면 최소한 음대는 필수이겠지요. 얼마나 멋지고 드라마틱합니까? 그러한 공연을 참가하고 간단한 성공 메세지 듣고 축복기도 듣고 주차장을 향해 우아하게 걸어갑니다.
당회장으로부터 부목사와 장로님들의 융숭한 인사(악수)를 받고 교회당을 나서는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고 갑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복음을 전했지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사도의 목적은 그것입니다.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한 것이 목적입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나의 자녀라 합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복음으로 낳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도 디모데를 아들이라 하였고
디도를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영적인 자녀라고 합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여 복음으로 낳았으니
성도를 자녀라고 말합니다. 갓 태어난 어린 성도들일수도 있고 모든 성도들을 포함한것입니다.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편지를 보낸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하려한다는 의미는 성도들가운데 죄를 짓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완전한것이 아닙니다.
영화로우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중입니다. 성화의 완성을 위하여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연약한 육신과 믿음때문에 죄를 짓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쩔수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것을 용서해 주셨으니 괜찮다고 그러면 그것은 그의 영혼을 오히려 미워하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부분때문에 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성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안심하라는 구절로 이용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스스로도 이 말씀만을 쏙 빼서
자기에게 적용시키면서 은혜받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을 정죄하고 시험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이부분에 밑줄 그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씀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누구 앞에 있는것입니까?
우리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있는 존재가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연약하고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행한바 의로움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율법의 종에서 은혜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누구 앞에 서있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버지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자녀라면
죄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누구 앞에서 살았습니까?
창세기에서 유독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요셉이 비록 형들에게 미움을 당해서 애굽으로 노예로 필렸고
거기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지만 그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그가 자기의 주인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모든것을 요셉에게 맡겼으니 훨씬 좋아진 상태였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더구나 주인의 아내가 유혹까지 합니다.
젊은 요셉에게 견디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노예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주인의 아내도 주인과 같은 권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요셉으로서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 한마디가 사실은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중요한 진리임을 확신합니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7~9)
노아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였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자리에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았다해도 요셉과 같이
그 자리에서 도망을 가야만 하는데 머뭇거리기 때문입니다. 죄의 자리에 잠시 있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머물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머물고 있으며
그 자리에 머물기를 원하는가를 알고 있지만 육신의 정욕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타협하거나 눈감거나 어쩔 수 없다고 핑계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것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죄가운데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알면서도 그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나올수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롬6:1`2)
우리는 모두 예전에는 죄가운데 머물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이제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끌려온 여자를 구하신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가 죄를 지을 때마다 아버지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변호사)께서 변호해 주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우리는 죄를 스스로 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서 허물과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의도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짓는 죄들을 위하여 걱정하지 말라는 의도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확한 신분이 무엇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홍같은 죄가 씻기울수 있는것도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 되셨으니,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
그가(예수) 우리의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십자가의 죽으심) 되셨습니다.
우리의(성도들) 죄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하나님의 예정가운데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위하여 (구원) 그렇게(십자가에 못박히심) 되셨습니다.
여기에서 온 세상을 위하여 라는 단어 때문에 무한속죄라는 주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논란이 되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칼빈이나 알미니우스냐로 구분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이 증언하는 것에 의하여 생각할 뿐입니다.
그가운데 저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기준일 뿐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13:1)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았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요15:19)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내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요17:6)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내가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요17:9)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요17:20)
기회가 되신다면 요한복음 5장과 17장을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라는 단어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자기 사람들,아버지의 사람들을 구별하셨습니다.
바울사도 역시 믿음은 모든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합니다.
요한사도는 다음 서신에서 세상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의
자랑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일2:15~17)
저는 다만 개인적인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예정론이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창세전부터 작정하심을 위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가운데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신 놀라우신 능력을 동원하셔서 이루셨고 이루워 가시며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것을 인정하고 사는 인생이라면
우리의 모든 형편과 현실이 우리의 소원과는 거리가 멀다해도 그것 때문에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했어도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너는 절망하지 말라는 귀한 찬송입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위로와 힘을 얻었던 곡이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다시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은 아내와 함께 자주 불렀던 곡이었지요. 우리의 현실이 답답하고 힘이들때마다 이곡을 부르면서
위로를 했었는데 어느날 아내의 입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절망하지말라는 것은
결국 세상에서 성공해야 복받았다는 기복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보고 그럽니다. 복음을 알고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성공한것 아니냐고 설교하면서
왜 이런 곡을 즐겨 불러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복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하며 세상의 문화와 풍속에 빠지지 말라고 합니다.
위엣것을 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도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보란듯이 높아지지 못한것을 실패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라고 자부하던 저 자신부터도 그것을 미처 바꾸지 못한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아내는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했어도 너는 절망하지 말라...
용서하십시오.
개인적으로 누구를 비난하거나 폄하하려고 그런것이 아닙니다.
우리안에 아직도 숨어있는 세상을 향한 욕망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리듬과 분위기와 가사에 의하여 무조건 따라부르는 것을 이제는 복음적으로 생각해 보지는 것입니다.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ccm 이나 현대적인 크리스천 뮤직안에 숨어있는 뉴에이지적인 것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위하다보면 세상의 흐름에 흡수될 수도 있습니다.
열광하는 미국의 복음송들이 빠른 비트와 강렬한 록으로 포장되었기에 청년들이 매료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누구 앞에 살고 있는가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은 아버지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을 이시간에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일상이 아버지 앞에 서 있다는것을 믿으면서 감사함으로 나아갑시다.
2009/03/15.ⓒ사랑그리고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