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빌립보서4장1절)=표준새번역.
옥중서신 가운데 빌립보서는 순전히 기쁨으로 가득한 편지입니다.
우수운 말로 표현 하자면 빌립보서를 꽉 짜면 뭐가 나올까요?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오.
기쁨의 전도사인 사도 바울 그는 비록 몸은 감옥에 있었지만 그를 가둘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요즘 감옥과 당시 로마의 지하감옥은 분명 다릅니다.
자료에 의하면 깊은 땅굴 속에 만든 곳이라서 햇빛은 고사하고 늘 습한 공기와 함께 얼마나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인 곳일지 짐작이 갑니다. 더구나 바울 자신의 몸도 건강한 편이 아닙니다.
많은 고통과 고난과 환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가 받은 고생은 순전히 그리스도를 위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기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의 위협도 있었고 이방인들에게도 배척을 당했었고 굶기를 여러번 하였으며 심지어 배가 파선을 당해서 죽을뻔 하기도 했다고 그는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매도 여러번 맞았습니다.
그가 당한 환난은 자신의 소원을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불의한 일을 하였거나 사사로운 명예를 위하거나 신분의 상승을 얻기 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의 복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것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평소 지병에 고생도 하였었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육신의 고통을 당해서 감옥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나이드신 어른들이 비가 오거나 할 때 허리나 손 발이 저리다고 하는데
건강한 사람들과 젊은친구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방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햇빛을 받아야 하는데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으니 흔들리는 불빛에 아마도 시력이 더 나빠졌을 것입니다.
육신은 갈수록 쇄약해져가고 언제 풀려날지 기약할 수 없는 암담한 상태의 바울이 다른 죄수들과 같이 난 억울하다고 고함을 치거나 반항을 한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무조건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는것을 주목하십시오.
요즘 웃음치료다 뭐다 해서 한참 줏가를 올리고 있는것같습니다만,
하기사 아무 생각없이 억지로라도 웃으면 유익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기뻐해야할 이유와 대상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의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자기로부터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아닙니다. 뭔가 탁월한 능력이나 부자이거나 명예가 높아져서도 아닙니다. 바울이 장가를 잘가서 예쁜 신부를 맞이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서도 아닙니다. 바울은 초기 사역에서 오히려 제자들에 비하여 기반이 약했습니다. 그의 서신서를 보면 사도권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주류인 예루살렘공동체와 열두제자들에 비하여 그의 사도성이 불분명하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주류라면 당연히 열두제자들이었음은 물론이었고 바울같은 경우는 어떤 증빙할만한 객관적인 자격증이 없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무슨무슨 교단에서 인증한 졸업장이 없는것을 시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나 바울은 이라는 분명한 어필을 한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는 여러가지 자격증이 있어야만 알아주는 것처럼 그의 말과 글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는것을 특별한 어떤것을 내놔봐라 하는 것입니다. 운전 면허증이 있어야 운전을 하듯이 허가증이 있어야 니 말을 들어주겠다는 식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참으로 많은 난관들과 불필요한 것들이 가로막고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지없이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속의 내용을 보는게 아니라 일단 거창한 졸업장과 박사 타이틀정도는 내놔야 어디가서 무시당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상고하기 보다는 공인된 장소를 통해 어디 유명한 학교에 편입학을 해서 증명서(학위,신학박사)를 딸수 있는 길을 찾느라 난리입니다.
소위 신학대학은 그러한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대행해주는 써비스까지 풀코스로 해줍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목사노릇 해가면서도 특정학교를 통해서 입회비와 등록금 내고 시간만 지나면 박사 타이틀이 자동적으로 배달이 되어서 손에 쥐어집니다. 회관 빌려서 성대하게 졸업식한번 치뤄주고 사진 찍고 동영상 만들고 학교 홈페이지에 홍보 띄웁니다. 누이좋고 매부좋고 하는 식입니다.
그런 타이틀이 있어야 대형교회 청빙할 때 유리하거든요.
자꾸만 이런소리하면 안되는데...
그만큼 돈 때문에 변질된 부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어떤분들이 어둔면만 부각시킨다고 항의를 해서 그만 할랍니다만....
바울의 입지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하기를 주눅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바울됨의 근거가 그런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였기 때문입니다.
감옥안에 있었지만 그는 자유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육신은 고통스러웠으나 그의 영혼은 무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였기에 그의 기쁨을 빼앗을 것이 없었고 죽음마저도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는자들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들의 담대함 입니다. 이것이 우리안에 확고하게 있다면 우리가 무엇때문에 슬퍼하며 고통하며 괴로워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을 이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함입니다.
그는 십자가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왜 오늘 교회에서는 고난을 묵상해야 합니까?
사도들이 언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을 왜 슬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그것은 분명 복음을 가로막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모독하는 짓입니다.
여러분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슬퍼하라고 합니까?
우리가 슬퍼해야하는 것은 그 십자가로 구속하여 죄 씻음을 은혜로 주셨건만
연약한 육신 때문에 죄에 대하여 돌아서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가슴을 치며 슬퍼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지 어찌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포기하셨다면 그래야 기뻐하실 것입니까?
왜 복음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헛되이 사람의 전통과
가르침으로 바꾸려는 것입니까?
사순절 기간동안 슬퍼하며 금식하다가 주일은 기뻐하는 이러한 행위는 또 무엇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무슨 드라마입니까?쇼를 한것입니까?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절기 지킴이가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듯이 미신적인 사상과 가르침에서 자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옥에 있던 바울이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사순절에 동참하라고 편지해야지 왜 기뻐하라고 노래를 불렀을까요?
복음서를 보십시오.
어디에 십자가에 대하여 슬퍼하라고 가르칩니까? 언제까지 왠 말인가 날 위하여 하는 처량한 인간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감상적인 노래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롱할 것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았다면 우린 모두 끝장난 인생들입니다.
더 이상 사람의 유전과 사상에서 속지 마시고 십자가를 노래하십시오.
십자가는 자랑하는 것이지 슬퍼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승리이지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슬퍼한다면 그것이 실패한 주님을 노래하는 것인줄 왜 모르십니까? 그것이 사단의 계략인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원수로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기뻐하시기 바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
십자가는 승리이지 실패가 아닙니다.
2009/03/30.ⓒ사랑그리고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