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이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목사님의 귀한 글을 통하여서 많은 은혜를 받은 독자입니다만
오늘 이 글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에 외람되오나 감히 소견을 올려 봅니다.
제가 어찌 목사님의 글에 시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본 글도 대부분 동의하지만 안타깝게도 십일조와 헌금에 대한 부분에서는
저도 한말씀 올려야 한다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 읽었나 다시한번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한 입장을 전했다면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 신앙의 스승(저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으로서 언제나 도전과 감동을 받았던
사람으로서의 아쉬운 부분이기에 그냥 지나지 못하고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결코 논쟁하고자 함이 아니라 글을 읽은 독자로서의 감상정도로 살펴 주시고 혹시라도 불편하신 글을
용납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오해하였거나 오류를 저질렀다면 지적도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의 전체적인 글의 흐름은 정당합니다.
크게 문제가 될 여지가 없지만(죄송한 표현입니다..)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결국은 십일조를 정당화시키는 분위기라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정확하게 말해서 십일조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자들을 향하여 한말씀 하시는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인정하든 거부하든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일 분명하게 성경에서 유일한 신앙과 믿음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목사님도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기회 있을때마다 십자가 복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더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런면에서 볼 때 아직도 십일조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도를 부인하는 것임을 말씀 올립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십일조를 인정하지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 주님께서 단번에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이루시고 성취하심은 구약의 예언과 모든 규례와
제사법과 의식법과 도덕법과 시민법을 총괄해서 입니다.
어떤이들은 주장하기를
제사법은 폐하였어도 도덕법은 유효하다고 분리를 합니다.
십계명도 계속 유효하다고 주장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하심은
구약의 모든것을 이루셨다 함입니다.
십계명을 옛 계명이라 합니다.
요한사도의 일서를 보십시오.
분명히 옛계명이며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새계명은 주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하심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전체헌장에서
분명히 옛 사람이 말한바 라 하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분명하게 옛 계명과 다른 새계명을 선언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하였으나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음이라고
친히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역시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속죄제물로
주님의 몸을 드린것이라고 확인하였으며
구약의 모든 제도와 법은 하늘에 있는 성막의 모형이며 그림자라하였고
실체이시고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다 이루셨다고 증언합니다.
십일조에 대하여
사도들의 수 많은 행적들과 서신서에 도무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는것을 목사님은 잘 아십니다.
말라기의 십일조 역시 그 당시에 하신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제사장들의 불의에 대하여 하신 것임을
목사님은 누구보다도 더 잘아십니다.
율법과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세례요한까지라고 주님은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약의 이미 폐하여진 율법아래있는 제도들을
은혜의 시대요 성령의 시대요 교회의 시대인 지금까지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것일까요?
주님께서도 십일조나 헌금에 대하여 당연하게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하신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마져도 그것을 정당화 시키려는지요....
다음은 목사님의 글입니다.
지금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십일조에 관해 내기 걸 것이 하나 있다. 본문 말씀 그대로 십일조를 많이 바쳐보라. 많이 바칠수록 여러분은 더 많이 복을 받는다. 아니 방금 그런 뜻이 아니라고 열변을 토해놓고 대체 무슨 뜻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틀림없는 진리다. 제 신앙 양심을 걸고 약속 아니 보장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제 모든 것을 걸어도 된다.
한 번 생각해보라. 십일조로 $100을 드리는 것이 좋은지, $1,000을 바치는 것이 좋은지 말이다. $1,000내는 것이 당연히 훨씬 좋다. 이미 수입이 만 불이 됐으니 천불을 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내는 것이 십일조이지 내면 더 채워주는 것이 십일조가 아니다.
물론 십일조를 하는 신자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 수입의 1/10을 바친다는 것은 보통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받을 복도 바로 그 믿음에서부터 나온다. 이미 온전한 십일조를 바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 사람은 절대 받을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온전히 붙들려 있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대로 따르는 데 있어 세상 물질로는 절대 영향 받지 않겠다는 고백이자, 그렇게 실현하고 있다는 징표가 십일조이지 않는가?
하나님 또한 그런 믿음을 가진 신자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우시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인도하실 것 아닌가? 때로는 환난으로 아니 순교로 이끌 때도 있겠지만 이미 그런 믿음을 가진 신자가 소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천국의 면류관이기에 아무 장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함으로 넉넉히 또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결국 목사님의 주장도 십일조를 하는것이 믿음의 기준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거부하는것은 곧 불신이거나 믿음이 없다는 증거로 몰아가십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이지 받으시는 분이라는 말인가요?
그것도 십일조라는 돈을 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다해도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함으로 즐겨내자는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냐 이런 말씀이시지요?
물론 교회를 유지하거나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모금을 광고하는것이 더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당은 성경이 말하는 성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대공동체가 모인것처럼 다락방이 현대화된 것이라고 보는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연보를 언급한것도 가난한 성도들(교회)을 구제하기위한 용도였습니다.
연보가 헌금이나 십일조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목사님의 글입니다.
신자들이 헌금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관점에서부터 오해하는 사항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헌금이란 교회의 운영자금이므로 신자가 되었으니까 당연히 내어야 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물론 교회는 돈이 필요하다. 교역자 사례비를 드려야하고, 건물 관리도 해야 하고, 교육과 전도와 구제 등등 하는 일이 많다. 분명히 상당한 돈이 필요하며 효과적인 헌금의 관리 또한 필수적이다.
맞습니다.
헌금의 가장 중요한 용도가 교회 운영자금임이 틀림없지만 그 성경적 의미는 훨씬 다르다. 만약 교회 운영을 위해서만 헌금하면 교회라는 하나의 조직체의 회원이 내는 회비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 모든 단체는 회비가 부족하거나 걷히지 않으면 조직의 결성 유지조차 힘들어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 회비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자 주인이신 예수님이 직접 운영하기 때문이다.
지당하십니다.
말하자면 사례비가 모자라면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금식의 기회로 알고 굶으면 그만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뜻은 아니다. 성경적 원리가 그렇다는 뜻이다.) 건물이 없으면 공원에서 예배를 보면 된다. 미국 L. A.의 새들백교회는 천막에서 예배 보면서 본당보다 교육관부터 먼저 지었다. 성도들을 교육하고 함께 친교를 나눌만한 정도의 재정적 여유도 없으면 안하면 그만이다. 단적으로 말해 돈이 모자라 진행에 차질이 있다면 그 모든 행사를 중지하고 주일날 야외에 모여 예배만 보고 헤어져도 된다.
옳습니다. 지금처럼 꼭 건물이 필요한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극도로 발달한 문명의 이기와 편리함으로 굳이 건물교회에 의존할 이유도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교통의 이동 수단이 지금과 같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게 고정된 성전이나
회당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통신의 발전과함께 다양한 멀티형의 시스탬이 잘 발달되었기에
교회건물의 존재는 사실 불필요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정에서나 혹은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작지만 여러곳에서도 모일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습니다.
새로운 초대 공동체를 실현할수 있는 훌륭한 조건과 기능들을 우리는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기존 교단과 제도권 안에서의 교회건물이 계속 개척되어야할 이유가 없는것입니다.
이미 확보한 목사 후보생들과 수 많은 전도사와 강도사들이 일할곳이 없어서 난리라는데
그것도 웃기는 소리입니다.
꼭 목사안수 받고 타이틀 걸어야하고 교회를 개척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나 빌립같은 경우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주고 있을까요?
왜 교회건축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만일 반드시 목사로서 전도사로서만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건물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전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사례를 왜 받으려고 합니까?
어짜피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성령의 은혜로 깨달은 말씀을 나누는 것인데 말입니다.
목사로서 가르치고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전혀 사례를 생각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생활을 위하여 목사님들도 일을 해야하지요.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일하시고 그래도 은혜로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면
감사함으로 달려가서 전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전도자의 모습이며 바울사도가 직접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니까 그랬고 그 시대가 그랬다고 변명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지금은 더 그래야합니다. 사례와 대접에 연연하지 않는자라면
복음에 거짓이 들어설 자리가 있을까요?
솔직히 기존 교회의 운영방식으로라면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목사나 전도자들이 사례에 의하여 사역하지 않는다면 교회당 건축이나 초청간증에 목을맬 이유가 없으며
꼭 신학교로 갈 이유가 없으며 신학교도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오늘날처럼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뜻이며
부자되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엉터리 번영신학이 거짓임이 드러나겠지요.
그렇게만 의식이 깨어있다면 목사자리하나 얻고자 아니면 당회장 목사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부끄러운 힘겨루기를 할 이유도없겠지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총회장 선거에서 이겨보려고 그런 치졸하고
염치없는 짓거리에 올인하지도 않겠지요. 그렇게만 인식이 깨어진다면 안수집사,장로피택,권사취임으로
돈을 얼마를 하느니 마느니라는 차마 창피한 일들도 없어지겠지요.
한국교회 100년이 지났것만은
아직도 십자가의 이루심을 부인하는 이러한 저질 신학과 번영복음과 은사주의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 온통 교회를 어지럽혀도 눈하나깜작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러한 것을 흉내내기 바쁘며 세상과 짝하는 유명 개그맨과 방불한 목사가 설교를 하며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부흥회 강사로 이리저리 날뛰고 있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해외 교포들의 교회까지 들어가서 온통 복음을 뒤석여 버려서
십자가는 뒤로하고 오직 복받아라는 기복주의 신자들만 양성하고 있으니
하늘에서 보고있는 구름같은 증인들 가운데
사도바울이 옷을 찢으며 통탄하고 있을 법합니다.
저도 지금 가슴이 답답하고 억장이 무너집니다.
언제까지 십일조 타령으로 믿음을 시험하려는 지요.
교회의 멤버십 피(fee)는 돈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회비는 따로 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고 약속하셨다. 그 반석이 무엇인가? 주님이 그가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따른 헌신이나, 당신의 사역을 위해 장모님 집을 제공한 성의 등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신앙고백(The Great Confession)이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5,16)
맞습니다. 여기까지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이 또 필요합니까? 이미 다 이룩하신 십자가의 구속을
왜 다시 원점으로 돌리려고 그러시는 지요?
바울사도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탁교제를 하다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 베드로를 향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당신도 유대인처럼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도 못하면서
이방인들로 억지로 유대인이 되게 만들지 말라고 말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에서결의하기를
"성령과 우리는 다음 몇 가지 필수 사항 밖에는,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삼가면,
여러분은 잘 행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행15:28,29) 이렇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어디 십일조를 해야 하며 헌금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까?
만일 지금도 십일조가 그렇게 중요하고 신앙의 기본이라면
당연히 사도들이 가르쳐야할 복음아닌가요?
다시 또 목사님의 글입니다.
신자의 진짜 고난은 하나님의 동업자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거나 안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투자하라는 요구조차 아직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진정한 신자라면 사실은 당신에게 투자하여 동업자가 되자는 초대를 항상 받고 있다. 신자가 세상, 사람, 쾌락, 죄악, 사단 쪽으로 한눈을 파느라 그분과 동업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 헌금하는 것이 아까운 것이다.
십일조와 헌금을 부정하거나 하지 않는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동업자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시는군요.
물론 목사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는 갑니다만 그냥 들으면 결국은
십일조생활과 헌금에 대한 생활이 안될경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거나 진정한 신자가 아니며
불신앙이라는 의도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천번제헌금을 강조하는 자들이나
십일조를 강조하는 자들이나 목사님의 이번 글은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목사님은 아니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분위기가 그런쪽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에서 불러낸 거룩한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이제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성수 주일은 터무니 없는 것이며
안식일이 주일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구약식으로하면
성전 제사장에게 내야 하는데 오늘날의 성전이 곧 성도입니다.
성도는 또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자기에게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그것이 오늘날로 보면 바로 내 이웃을 위하여 돌아보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안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사랑으로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걱정을 하더군요.
은퇴한 목사님들과 홀사모의 고통이 참 많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물질은 바로 그러한 곳에 자발적으로 감사함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왜 내교회 니교회 하면서 건축해야 한다고 교육관이 없다고 주차장이 없다느니 하면서 헌금을 강요합니까?
왜 본교회에다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만 합니까?
구원얻은 성도들의 삶가운데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질을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사용하는것,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게 대접하는 용도로 쓰여지는것이 진정한 연보요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우리가 바로 영적인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흘린 피가 우리를 깨긋케 하셨으며
그 피를 의지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앞으로 갈 수 있는 새롭고도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찢어진 성소의 휘장을 왜 오늘날 교회가 다시 가로 막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저는 주장하기를
제도권에 속한 기존의 교회의 벽을 허물거나 초월하지 못하면 개혁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기득권을 누리시는 분들께옵서 진정으로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아골 골짜기라도 복음들고 달려가겠다고 노래하신다면
당신부터 그 자리를 내려 오시기를 바랍니다.
목사의자리를 내려 놓으십시오.
당회장입니까?
총회장입니까?
노회장입니까?
한기총 대표입니까?
방송사사장입니까?
무슨무슨 총무입니까?
바로 그러한 자리에서 내려 오셔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로 갈테니까 너나 잘하라고 하신다면
결국은 개혁과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확인일 뿐입니다.
물론 제가 이런 소리 한다고 눈하나 까딱하지 않을줄 압니다
그러나
들을 귀가 있는자는 들을 것이고
들을 성도는 들어서
참다운 복음안에서 진정한 자유함으로
살아있는 생명력있는 성도로서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러한 부족한 소견을 전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너는 완전한가 하고 따지신다면
절대로, 결단코, 아니라는 분명한 대답을 대신하며 글을 마감합니다.
목사님께 죄송합니다.
본글에 대한 댓글로만 달려다가 내용이 다분이 길어졌고
또 불쾌하실만한 글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애독자로서 존경하는 목사님이기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껄끄러운 글로 인사를 하게 된것이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아마도 이글을
두고 두고 후회할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공연히 그랬다고 자책하겠지요...
하지만 제 안에서 불일듯이 강권하심에 저로서도 항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무례한 글 용서해 주시기를...
2009/03/24.ⓒ사랑그리고편지.
사랑 그리고 편지님께서 말씀하신 요지를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변증할 시간을 좀 주시기 바랍니다.
천천히 조금 더 원론적으로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올린 글은 그 맨 아래에 표시해 놓았듯이
13년 전 유학생 교회에서 주일 설교한 내용을 약간만 보충하여 정리한 글입니다.
주일 설교는 시간상 제약이 있고 또 강조해야 할 몇 가지 포인트 위주로 하니까
세세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설교해도 이전에 설교했던 내용 그대로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상기글에서 지적하신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을 위주로
제 의견을 좀 더 보완하는 글을 준비 되는 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라도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성경문답" 사이트의
#34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꼭 해야 하는가?"라는 글을 한번 참조해 봐주시기 원합니다.
소중한 글을 올려 주셔서 서로간의 의견의 차이에 관해 교통하게 되어서 감사하옵고
틀림없이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오히려 더욱 깊어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또 이 기회를 빌어서 그 동안 게시판에 좋은 글들을 많이 올려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댓글이나 답글들을 어지간해서 잘 달지 않은 습성이 있음도 너그러이 양해 바랍니다.)
앞으로도 언제든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선 이렇게 상세하게 글을 올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