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대부분의 성도들의 질문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성경 난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믿음이 충만한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도 신앙하는데 어려움도 없을 뿐더러 손해가 되지도 않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떤 신앙인들에게는 상당한 의문과 함께 곤혹스러운 문제로 대두되는것도 사실입니다.
무조건 믿는가 하고 따지는 분들만 믿음이 부족하다 할수는 없으며 반대로 덮어놓고 믿는다고 믿음이 없다 단정할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논의에 대하여 쉽게 단정하여서 다른이들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폄하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긍휼과 용서의 심정으로 주께 맡기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는게 좋겠습니다.
어찌본다면 단순한 부분입니다만 너무 복잡하게 이해 하려고 하다보니까 쉬운 부분을 놓치고서 엉뚱한 곳에 가서 무리하게 해석을 하느라 부작용이 있다는것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쉽게 접근 하고자 합니다. 너무 주석이나 사전을 참고 하다보면 의외로 복잡해 지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갈피를 잡지 못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불의한 청지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쉽게 말해서 논의의 결론 부분을 찾아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대부분 글을 시작하는 경우에 결론 부분을 독자들이 쉽게 공감하고 알수 있도록 말미에 적는것이기 때문에 서론과 본론과 결론을 참고해서 본다면 예수님의 비유의 결론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3{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 결론은 모든 성도들의 기준입니다. 양쪽도 아니고 중간은 더더욱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 사람의 심보이지만 주님은 강력하게 그것은 불가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을 조금만 살펴 본다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고약한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옳지않은 청지기의 행동을 말씀하시면서 칭찬하셨는가 하는것입니다. 사실 이부분 때문에 성도님들이 납득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분명히 이 청지기는 불의한 자입니다. 그는 자기의 직분을 이용해서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도 곤란하게 하였었고 자기의 재산만을 늘린 악한자입니다.
그가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할 위기에 닥쳤을때 고민하다가 해결책을 생각해 내고는 결단한것입니다. 그는 아직 자기의 직분이 있을동안에 부지런히 주인에게 빛을 진사람들을 불러서 이자를 탕감해준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차피 주인에게 신임을 받는것이 불가함을 정확하게 판단한 것이었으며 또한 자기의 주재를 제대로 파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 틀렸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좋은 시절은 더 이상 오지 않을것을 알았습니다.
다시는 그동안 누리던 모든 기득권을 누릴수가 없으며 자기를 대접하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할 것이며 이제 아무런 능력도 없으니 빌어먹거나 굶어죽을 처량한 신세가 된것을 정확하게 인식한 것입니다. 살면서 자기 주제를 알지 못해서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실은 저도 예전에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을꺼라 착각한 것입니다.
저것만 내게 있으면
저곳에만 취직이 되면
저 사람하고만 결혼을 한다면
저 사업만 맡으면
모든것은 보장 되는줄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잠못자며 고생했었는지요.
그래서 원하는 것을 사고
얻으며 이루웠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올라가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 버렸다는것을 그때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을 돌아 보니까 완전히 빈털털이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는 부도난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서 결단한 것입니다.
주인에게 빛진자들의 이자를 감면해주니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빛을 값을 수 있는 계기가 준비 된것이며 이자 감당하느라 엉망이었던 삶의 굴레에서 당당하게 벗어나 살길을 얻게 된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이 청지기가 아무리 예전에 불의하게 했어도 이제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가 된것입니다. 빛을 저본사람은 압니다. 그들에게 최고의 목표는 빛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노래는 '빛만 없으면 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사연들을 접합니다. 대부분은 빛때문에 비극이 일어납니다. 돈때문에 죽고 사는 사회입니다. 돈이 곧 신과 같은 위력을 발휘합니다. 세상은 돈으로 움직인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돈이 곧 절대적인 힘입니다. 사실상 믿는자들에게도 돈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돈에 양심을 팔고 돈의 노예가 되는것이 현실입니다. 믿음도 돈에 의하여 결정나지 않습니까? 교회의 모든 부조리와 불의함이 사실은 돈으로 부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돈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적극적으로 돈을 예찬합니다.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돈을 숭배까지 합니다. 왜 세상으로 부터 교회가 불신과 멸시를 당합니까? 크거나 작거나 할것없이 전부가 '돈타령'아닙니까?
대형 교회는 돈이 넘쳐서 문제고 작은교회는 돈이 없어서 문제고...
성도들의 삶도 돈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것이 현실입니다.
솔직하게....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님때문에 울고 웃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과 구원에 감격하는 것보다는
돈에 의하여 기뻐하거나 감동하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의 무화가가 없어도는 부흥회용 찬양속에서나 울려 퍼지고 정작 성도의 가난한 현실속에서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고 듣고 아는것이 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걸핏하면 교회는 하나님앞에 나올 때
빈 손들고 나오지 말것을 가르치고 각종 명목을 들이대면서 헌금을 강요하는 현실속에서
심지어 주일학교 어린 아이의 작은 손에서조차 이것은 하나님껏 이라고 가르치는 지경이니 설교를 듣고 기억나는게 복음이나 십자가나 구원이 아니라 돈을 하나님께 빼먹거나 내지 않으면 지옥가는 것이며 불신앙이며 죄라는 인식이 꽉찼으니 그럴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불의한 청지기를 설교로 결국은 성전 짓자로까지 가는것을 들으면서 가슴이 막혔습니다. 아직도 이런 설교가 성도들의 심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가로막는다 생각하니 할말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일천번제헌금이 판을 치고 있지만 일부 개혁을 외치는 단체와 사이버 공간의 카페를 제외하고는 정통이라 주장하는 교회와 교단의 어른들은 아무런 가르침이 없는 현실입니다.
신문이나 각종 미디어로 교단과 교파와 교회는 홍보하면서 정작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위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엉뚱하게 이단판별에는 막대한 돈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돈문제만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방송에서도 아마 제 생각에는 일천번제 문제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문제를 방송하는 것은 없다고 판단합니다.
당연한것이 그런문제가 연관이 없는 교회와 교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잘못 판단했다면 즉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하게 글을 수정하면서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좀더 확대해본다면
사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저 첫번째는 바리새인들을 위한 설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며 경건한 모습이지만 그 속에는 결국 돈밖에는 없는 것을 주님께서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비유하신 내용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로운 선택을 한것입니다. 불의한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의한 세상에 살고 있는 불의한 자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청지기는 오늘날 성도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 속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맘이 편하기는 하겠지만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삶은 아닌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오늘의 비유가 나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귀한 보물같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자신의 존재가 악한것을 알았고 곧 파산할 것을 알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인 삶의 적용입니다.
이러한 적용의 확대가 억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님의 비유가 대부분은 종말의 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전혀 억지는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주는 문화와 풍성한 것에 젖어살다가 보면
빛의 자녀인 성도들의 삶이 어쩌면 불의한 청지기적인 생활을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주는 힘은 사람의 인격을 손상시키며 외곡되게 만들며 가치관이 비틀어지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서신서에서 돈에 대하여 여러번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분명 주인의 소유로 손해가 나는 짓을 한 이 청지기를
그 주인이 오히려 지혜가 있다고 칭찬한 것이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물론 당장 눈앞의 계산을 하면 손해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칭찬한 이유는 빛진자들의 전부를 탕감한것이 아니라 이자를 감해 준것입니다. 말하자면 원금을 받을수 없는 지경까지 몰렸던 빛진자들이 이자를 탕감해 주니까 무리를 해서라도 원금을 상환했기 때문에 주인의 재물은 사실상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 발생한 것입니다.
눈앞의 작은 이자 때문에 결국은 빌려준 돈을 다 때일 지경이었는데
그렇다고 이 부자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어가면서까지 착취할 수 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에게는 돈도 돈이지만 더 중요한것은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이 돈을 아무대나 막쓰지 않습니다.
진정한 부자들이 불의한 사회에서 비록 불의하게 돈을 벌었다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대놓고 욕을 못하는것이 뭐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인격과 명예를 위해서는
수천억도 아낌없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회 사업에다가 막대한 돈을 사용하는것이
결국은 회사의 이미지를 위한 투자입니다. 저는 지금 부자 기업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것은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 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가장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너희에게 내주겠느냐?
가장 작은 일과 불의한 재물과 남의 것에 충실함을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돈은 사실상 세상에서는 큰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부자에게는 돈이 크지 않습니다. 가난한자에게 돈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에게 돈이란 개념이 큰것이 아닙니다. 이 개념이 외곡되었기 때문에
돈에 매이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곧 닥칠 해고를 생각하면서 깨달은 것이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돈을 쥐고 있느라 생명을 포기한것이 아니라 돈을 버리고 생명을 얻기 위하여 결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잡느라 생명을 놓쳐버리기 일쑤입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 청년이 주님께 영생을 구하려고 왔다가
그 재물때문에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또 그러면 그 재물을 교회에 바치고 하나님께 바쳐야지
영생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 설교의 마지막이 결국은 교회 건축이나 신축 부지 땅을 위하여 헌금하자거나 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설교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돈에 물들은 교회와 목사들이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교회에서 그런식으로 설교가 마무리 되거들랑 지혜롭게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목적이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의 불의한 자들도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한다는것을 배우라는 뜻이며
정말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앞에 살아야 한다는것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에게 마지막 심판의 때가 온것처럼 빛의 자녀들에게도 그 날은 피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과 계산을 할 때가 올것이고 그 때가 오기전에 스스로의 삶과 믿음에 대하여 시험하라는 것입니다.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했고
무슨 공로를 쌓았고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가 아닙니다.
내가 교회의 직분이 무엇이며 우리 아버지가 목사요 어머니가 권사요 할아버지가 예전에 뭐였으며 우리 삼촌이 유명신학교 교수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주님과의 관계속에서 재물을 숭배하느냐 아니면 주님을 섬기느냐입니다.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삶의 열매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의 상태가 부도직전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파산 상태임을 알아야만
불의한 청지기처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속에 숨어서 속이는 사탄의 속임에서 혹시 나는 속고 있는부분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말씀앞에 나와서 그 말씀으로 나를 비추는 것입니다. 빛가운데로 나오면 자기의 불의함이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사람의 불의를 보는것이 먼저가 아니라 나의 불의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이 회개하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다른사람의 죄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치고 조언하느라
정말 나 자신이 회개할 기회를 놓칠가 걱정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렇게 글을 쓰는것도 어불성설이지만 나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면서 쓰는 글입니다. 나에게 먼저 하는 고백이며 내가 먼저 일차적인 적용의 대상임을 고백합니다. 다만 주어진 환경속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주님의 지체들과의 나눔만이 유일한 즐거움이며 작은 저만의 소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푼수처럼 여러분들께 나눕니다. 용서하소서.
이 글을 읽는 빛의 자녀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내주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풍성한 믿음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2009/03/02.ⓒ사랑그리고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