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이 보여준 우리 인간의 뿌리 깊은 죄악성의 모습,
감춰진 연약함을 얼마나 신랄하게 보여줬는지요.
그것은 바로 저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님의 슬픈 예언대로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을 구주라고 부르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너무나 많고(마7:21),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고 사역을 행하지만
주님과 상관 없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마7:22)
아예 주님을 모르고 죽었더라면 차라리 그 형벌이 적었겠지만
주님과 복음에 대해서 듣고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음에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여 멸망하는 자들의 슬픔과 분노는 너무나 끔찍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고 예수님이 주시는 것만 영접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스스로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재 깊숙히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로마서 3장 11절에 보면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혹자들은 말할 것입니다.
사람은 종교성이 있어서 원시인들조차도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영적 존재인 인간의 본능과 같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종교성이 있어서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종교성이 있기 때문에 각자의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성경은 단호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수 많은 종교를 통해
심지어 교회 안에서, 심지어 예수님을 따른다는 자들 중에도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 무엇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직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이 말씀을 우리가 전도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만
사실 이 말씀은 교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교회 밖에 형제님의 마음 밖에 아직 세워져 계실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한 자들은
주님이 그들과 함께 먹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 먹습니다.
깊은 친밀함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종교인은 지혜와 능력과 사역적 성공을 위해 주님을 이용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며
때로는 자신이 이용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성도는 주님과의 친밀한 동행을 위해
지혜와 능력과 사역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도는 설령 주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역의 성공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와 우리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사랑의 연합입니다.(요17)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추구하거나
다른 것으로 사랑을 대체하는 자는 주님께 합당치 않은 자입니다.
당신은 종교인인가요, 참 성도인가요?
성도가 아닌 자들은 주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스스로를 잘 살펴서 구원에 이르시길 소원합니다.
하나님께 다른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분으로
너무 너무 만족한 자가 되길 소원 소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