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코로나 사태로부터 건강을 안전히 지키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질문드릴 주제는 '두려움'에 대해서 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이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예수님께서 수시로 말씀하시는 대사, "두려워말라(Fear not)"입니다.
너무 횟수가 많아서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심지어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말아라'보다 '두려워말라'는 말이 많을 정도로 강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신자들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두려움이 좋지 않다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그런데 문득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두려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생리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심지어 뇌속에는 편도체처럼 공포 반응을 관장하는 부위가 작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쓸모없는 장기를 만드셨을리는 만무합니다. 즉, 공포반응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또 실제로 공포 반응은 위험한 물리적 상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누차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단순한 '생리적인 공포 반응'과는 차이가 있는걸까요?
개인적으로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둘의 차이가 무엇일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추측 1.
하나님께서 음란한 마음은 죄로 여기시지만, 성욕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닌 것처럼
공포반응 그 자체는 선하지만,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짓눌리거나 부적절하게 사로잡히면 문제일까요?
추측 2.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은 마냥 깜짝 놀라는 것보다는 '의심과 염려'와 관련된 두려움일까요?
추측 3.
물리적 환경에 대해서는 우리도 몸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므로(건강을 관리하듯)
그런 두려움은 우리에게 유익한 피드백을 주지만
영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이를테면 마귀나 스스로의 죄악 …… 이런 것들은 신자라면 성령께서 이미 내주하고 계시고
그분께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므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피스님 낭여님이 말씀하신 대로 흔히 생각지 못한 주제의 질문을 주셨네요. 우선 두렵다는 감정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영성]-[감정을 살려라]는 사이트에서 그에 대해서 기본적인 설명을 드렸습니다. 사실은 그 사이트도 연재가 중지된 상태로 두려움에 대해서도 다룰 예정이었습니다. 감정을 주제로 2년 간 성경공부를 한 내용을 정리하는 사이트였습니다만 기본적인 서론만 마치고 각 개별 감정들에 대해선 미처 다루지 못했습니다. 현재로선 언젠가 여유가 생겨서 글로 다 옮길 수 있기를 막연히 바랄 뿐입니다. 상기 질문에 대해선 준비가 되는 대로 성경문답 사이트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말과 다른 일들이 겹쳐 있어서 조금 늦어지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사이에라도 아래에 링크한 [감정을 살려라] 사이트의 글들도 참조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샬롬!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오묘하고 신비롭다는 것을 요근래 많이 느낍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제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 자기중심적인 면을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씩 깨뜨려 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또 그만큼 성장시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돌려 드립니다. 평소에 궁금했던 그리고 의문시 했던 내용들이 게시판에 올라올땐 회원님들께 감사하고 또 세밀히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경탄할수 밖에 없네요. 저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수시로 의심이 들고 두려움에 사로잡힐때가 많습니다. 이 위기가 끝이 안보여도 믿고 나아갈수 밖에 없고,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셔서 결국엔 평안으로 인도하시네요.
또 신비로운건 일전에 이 사이트에서 읽었던 글들이 모두 생각나지는 않지만 질문에 관련한 글들은 왜이렇게 잘 떠오르는건지요... 글로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네요.
말씀-거꾸로 읽는 성경-기도로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다 (마6:25)
얼마전 들었던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떠오릅니다. 신앙의 흔적을 주제로 한 설교였는데 삶은 흔적을 남기는 일이며 이 흔적들이 모여 역사가 되고, 후대들에게는 이정표가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토인비의 challenge and response를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했는데 기독교인에게 너무나도 적합한 해석이라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글들을 일전에 제가 보석과도 같다고 표현했었지요. 그 표현이 시간이 흘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느낍니다. 하나님 마음이 그대로 실려 있어서겠지요. 전도서 저자의 말처럼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것이 헛될진대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런 귀한 글들을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시며 남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명에 관한 순종으로, 너무나 귀한 은사요 축복가운데 계심을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귀한 흔적의 글들을 누릴수 있음에...
오 신기한 질문이네요. 여기서 신기하다는 것은 미처 생각해본 적 없는데 듣고 보니 저도 궁금해져서 한 말입니다.
부족하지만 저도 나름의 추측을 해보겠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이니 크게 의미 두진 말아주세요.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질문을 딱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은 '두려워하지말라'는 언급은 대체로 명령이라기보단 권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성경에 많이 나온다고 하셨으니까 그 때 그 때 문맥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요.
또한 기본적으로 두려워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측 1~3 전부 맞는 말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항상 같게 쓰이진 않았으리라 추측해보고 3가지 의미 모두 쓰이지 않을까 합니다.
추측 1번은 기본 베이스인 것 같고, 2번(염려)의 경우로 쓰일 때는 명령이 되고 죄가 될 것 같습니다. 3번의 경우는 저는 물리적 요소나 영적 요소나 차별없이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 권고인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데 '두려워 할 필요 없다는 것을 알라'는 의미이고 '평안하라'는 위로이자 권고인 것 같습니다.
쓰고 보니 피스님 내용과 별반 다를바 없는 것 같아 추가적으로 씁니다.
1. '두려워말라'는 말이 주로 쓰인 경우로 생각나는게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또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실 때(?) 하나님을 만난 인간들/백성들의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에 경외의 반응이 자연스레 나올 수 밖에 없죠. 또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뵐 때 죽으리라 생각합니다.(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만) 이 때 '두려워 말라'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나타내신 것이라 죽지 않을 거니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2. '평안하라'의 의미 :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처음 여인들과 제자들을 만나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 또는 '평안이 있으라'였던 걸로 압니다. 앞서 말씀드렸드시 '두려워하지 말라'의 의미가 3번 추측처럼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평안하라'는 의미로도 쓰였을 것 같습니다.
3. '담대하라'의 의미 : 성경에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도 나옵니다(생각나는 걸로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 이 또한 '두려워 말라'의 의미와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담대하라는 말을 언어만 놓고 풀었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말라는 의미보다는 두려움을 넘어서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맞서는 것이라는 말이 있죠)
이상 제 추측이였습니다. 직접 찾아보지 않고 뇌피셜로만 쓴거라 죄송합니다. 참고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