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막6:17~18)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때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에 헤롯은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잡혀간 것은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잡혀갈 정도로 분명하게,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헤롯의 잘못을 지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계속적으로 자신의 입지가 좁혀지고 정치적인 타격을 입는 것을 느끼는 헤롯은 어떤 명분을 내세워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명분이 어떠하든지 간에 성경은 헤롯이 세례요한을 옥에 가둔 것은 세례요한이 자신을 향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이 잘못을 지적할 때 그것을 받아드리기 힘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1)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자존심, 명예의 문제입니다. 이제까지 자기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이미지 메이킹 해 왔는데 그것을 위해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는데 그 잘못을 인정 해 버리는 순간 그 이미지가 파괴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또 한 가지 그 사실을 인정할 때 입는 금전적 손실이나 권력의 손실 등이 아주 클 때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3)또 범죄자가 형량을 낮추어 보려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4)그것은 아마 내로남불이요,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러우려 하는 사람은 본능인 것 같습니다.
5)부부관계에 있어서나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문제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그나마 조금 낫습니다. 그러나 공적인 입장에서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후속 조치가 따라야 합니다.
아베 정권이 위안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6)또 그 지적한 잘못이 자신의 아킬레스건이나 트라우마를 건드렸을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지적의 잘, 잘못을 떠나 잘못을 지적받은 사람은 아마도 절대 그 잘못을 인정하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와 같이 모두가 칭찬을 받기 원하는 세상에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더구나 지적을 받은 사람이 지적을 인정하지 않아 그 사회와 단체에서 지속적인 갈등이 발생할 경우 그로인한 그 구성원들이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잘, 잘못의 여부를 떠나 그 갈등이 적당히 빨리 봉합되기를 바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다보면 트러블 메이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적은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지적을 하면 그 잘못을 받아드리기보다 변명을 내세우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욱 확실하게 지적하려 할 것이고, 상대방은 방어기제가 더욱 뚜렷하게 형성될 것입니다. 그러면 필연 분쟁으로 치닫습니다. 수 십 년 쌓아놓은 우정도, 사랑도, 신뢰감도, 발전도, 안정도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또 그 잘못을 지적한 사람도 문제가 있는 경우, 잘못을 인정하기란 더더욱 쉽지가 않습니다. 너나 잘 하세요,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하듯이...
세례요한같이 흠결이 없는 사람이 지적한 지적에도 잘못을 고치지 않으려 하는데 흠 많은 우리들이 지적하는 지적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기에 개인이나 사회를 향해 잘못을 지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자신보다 약자를 향해서는 잘못을 지적하기는 쉬워도 자신보다 강자를 향해서 잘못을 지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옛날 학원 선생으로 있을 때 그 학원에 다니는 학생의 불량한 수업 태도를 지적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폭이 잘못한 잘못을 지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순간 내 행동을 후회했습니다.
참 경우의 수가 많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자꾸만 다른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호미로 막을 것이 가래도 못 막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점점 더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권력으로 누르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일이 해결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나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조차도 모두가 왕을 향해, 권력을 향해 왕의 불의와 권력의 불의를 지적하였습니다. 지적을 하다가 어떤 이는 감옥에 갇혔고, 어떤 이는 매를 맞고, 심지어 어떤 이는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다윗처럼 지적을 받아드리면 좋으련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 잘못을 덮으려고 더 큰 잘못을 저지릅니다.
이처럼 권력을 가진 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잘못을 지적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아주 가끔 세상 사회에서 약자들이 모여서 권력을 만들고 그 권력이 현재의 권력을 집어 삼킬 만큼 커지면 현재 권력의 부도덕에 대해서 응징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권력이 약자들의 권력을 모으는 과정을 가만히 둘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약자들의 정의는 대부분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세상 정의가 성공했다하더라도 세상의 정의는 힘으로 힘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팍스로마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의는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로 치려는 자들의 돌을 내려놓게 하는 정의입니다.
세상의 정의는 돌을 들고 돌을 던져서 정의를 세우려 하지만 예수님의 정의는, 기독교의 정의는 모두의 돌을 내려놓게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말하면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원리인데 뒷감당을 생각하다보니 그러지 못 하는 것이 모든 트러블의 원인입니다.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최고의 덕목은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한 실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찬이라고 하면 그 사람의 죄는 미워하되 그 사람 자체는 어떠한 경우라도 품고 보듬어야 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기본 원칙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진 분은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권력을 가졌든지 그렇지 않든지 인간은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할 대상이지 미워하고 지적하고 응징해야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아무리 선의의 의도로 말을 한다 하더라도 잘못되기 쉽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소위 말하는 정의가 살아나고 상대방의 잘못이 드러나 공의가 제대로 세워지는 통쾌함을 우리는 한 번씩 경험합니다.
그것에 대한 딜레마가 항상 존재합니다.
작금의 사태가 정의가 이기고 그들의 잘못이 낱낱이 밝혀진다고 한들 과연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정의가 넘치는 사회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과연 어디까지 죄를 감싸 안아주고, 어디까지 죄는 지적해야 할까요?
어떤 때에 목숨을 걸고 지적해야만 할까요?
지적이 받아드려지지 않고 분쟁의 불씨만 생긴다면 난 분명 지적하지 않으리라 생각 해 봅니다. 예수 믿는 자로서 진정한 공의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만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함이 내 몸속에 흘러넘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로 쳐 죽이려고 했을 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누구를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마치 자기는 잘못이 없는 양 착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은 지적을 해도 자신의 잘못은 드러내지 못합니다.
진정한 지적은 자신을 지적해서 자신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신을 향한 지적이 아닐까요?
남을 바꾸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 생각 해 봅니다.
하나님, 오직 심판은 하나님 밖에 할 수 있는 분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당신께서 꺼져가는 등불도 꺼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셨듯이 만일 제가 지적을 하게 된다면 저를 향한 지적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시고 진정한 회개가 제 속에서 늘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