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실상은?
창세기 강해 (6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한국 사람의 기질은 대체로 성격이 급한데다 매우 감정적이다. 그런 성향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도 알게 모르게 많이 작용된다. 급하니까 앞뒤 문맥을 분석하지 않는다. 해당구절만 한두 번 읽고 치워서 정확한 뜻을 잘 모른다.
또 감정적이라 마음에 드는 책이나 기사만 골라 읽는다. 더 큰 문제는 형통하고 안락하면 성경을 거의 읽지 않거나 건성으로 읽다가 힘들 때만 집중해서 읽기에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구절만 찾는다. 그것으로 그치면 다행이련만 자기 생각에 맞게 바꿔서 해석함으로써 흔히 말하듯이 “내가 복음”으로 변질시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약속의 말씀인 본문도 그렇게 이해하는 전형적인 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지 않았다.
먼저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는 오류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으로 삼아 그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니 단순하게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려면 엄청나게 큰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또 나중에 그가 종횡으로 밟는 땅을 다 주신다고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상징인 후손도 하늘의 뭇 별처럼 주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그의 후손이 이삭 한 명이 아니었다. 첩을 통해서 많은 자식을 낳았다.
그래서 어쨌든 그의 믿음의 후손인 우리도 아브라함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한 복을 받겠거니 여긴다. 또 그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해주신다고 하니 최소한 수호신처럼 모든 어려운 문제를 사전에 방지해주거나 건져주리라 기대한다.
다시 3절을 자세히 읽어보라.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정확히 무엇인가? 주관식 문제라 어려우면 쉽게 객관식 질문으로 바꿔보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복이 있는가, 없는가? 그가 하나님께 받은 복은 없다. 잘 살펴보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축복한다. 땅의 모든 족속이 그 때문에 복을 받지만 막상 그가 받는 복은 없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한다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수호신처럼 하나님이 그가 가는 곳마다 모든 위험에서 지켜준다는 뜻이 아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아브라함은 이미 저주를 받은 상태다. 힘든 일을 겪고 있거나 최소한 마음의 상처는 크게 받은 후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는 다른 어떤 좋은 것으로 보상해주지 않는다. 위로와 격려의 말씀도 없다. 대신에 그 저주한 사람만 하나님이 언젠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저주하신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아브라함더러 절대 복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보상과 사죄를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만사에 공의를 세우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다. 당신의 자녀들의 억울한 사정을 그분이 반드시 갚아주신다. 대신에 네가 할 일은 오직 사랑하고 최소한 용서해주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누구까지 그래야 하는가? 너를 저주하는 자까지다. 또 그러는 것이 바로 네 이름이 창대케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에서 상처 손해 멸시 핍박을 받아도 꼼짝 말고 참으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본을 보이셨다. 그럼 당신께서 신원(伸冤)해 주신다. 그럼 신자가 겪는 고난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있다는 뜻이다.
신자도 연약하니까 싫고 미운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신자가 그를 미워한다고 하나님도 그를 미워한다는 보장은 없다. 일반적으로 원죄 하에 있는 모든 인간을 똑같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신다. 그 중에 당신께서 택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여 십자가 구원 안으로 인도하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바로 그런 은혜를 입기를 당신께서 소망하시는데 그 일을 아브라함더러 담당시키겠다는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하나님의 그 거룩한 역사에 참여케 된 것이다. 그가 받은 복 중에는 역설적으로 따지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도, 예수님이 아무 말 없이 고난 받았듯이, 포함된다. 기독교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에 주신 약속에서부터 기복주의(祈福主義)의 기억 자도 언급은커녕 암시도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최초의 해외선교사
본문에서 성격이 급한 탓에 앞뒤 문맥을 따져보지 않은 오류는 또 무엇인가? 창세기 12장 이후의 아브라함 사건은 하나님의 인류구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기가 된다.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인류 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몇 주 전에 강조한 대로 11장까지의 기록이 없다면 12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
바로 앞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인간끼리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이 주도하는 제국을 건설하려 시도했지만 하나님은 온 지면에 사람을 흩어버리는 심판을 내렸다. 하나님은 또 언어를 혼잡케 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1절)은 말이 안 통하는 다른 나라로 가라는 것이다. 문화 관습 제도 법률뿐 아니라 언어가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기독교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그를 파송한 것이다.
당시는 땅의 모든 족속이 온갖 우상을 숭배했다. 예컨대 그 중 최강국인 바벨론은 최고의 신으로 달 신을, 애굽은 태양신을 섬겼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대상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한 참 하나님을 믿고 따르거나 찾는 자는 물론 두려워하는 자도 단 한 명이 없었다.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숭배의 악습에 젖어 있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영적 고뇌와 갈등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여 당신에 대해 알게 해주었다. 특별히 당신께서 인간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가 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자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바울처럼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해외선교사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 나선 것이다.
본문의 약속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다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도 직접 아브라함이 당신의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즉, 당신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본문은 결국 십자가 복음을 들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것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해 받을 복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졌다. 그를 축복하는 것이 현실에서 좋은 것을 주고 도우며 섬기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삶에서 실천하고 말로 전하는 참 하나님 여호와 신앙에 대해 마음을 열고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자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이다. 바로 하란에서 그를 따라 나선 자들이다.
반대로 그들이 아브라함을 저주한다는 것도 그를 괴롭히고 현실적으로 손해와 핍박을 입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전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저주한 셈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밖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다.
정반대의 신탁(神託).
그런데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 구원의 진리에 대해 구체적인 계시를 받은 적도 없다. 그럼에도 성경은 특별히 예수님은 당신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다르거나 바뀐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시대 사람들도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구체적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 항상 그러하듯이 성경의 문제는 성경 안에 정답이 숨겨져 있다.
민수기 22-24장의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에 정답이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데스바네야에서 거역하는 바람에 그 벌로 광야를 방황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더러 그들을 저주하라는 신탁(神託)을 의뢰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22:6)
언뜻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비슷해서 혼돈스럽지만 자세히 보면 정반대의 뜻이다. 복을 빌거나 저주하는 주체와 그 대상을 잘 분별해야 한다. 비록 신(神)에게 의탁하긴 했지만 발람과 발락이라는 두 인간이 주체가 되어 같은 인간인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저주하려 든다.
쉽게 말해 내가 복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신은 복을 주어야 하고, 내게 손해 입히고 상처 준 미운 사람은 신이 대신 저주하라고 비는 것이다. 신은 그 요구대로 따를 의무가 있다. 최대한 양보해도 최고의 치성과 제물을 바칠 테니까 우리의 정성과 열심을 보고 그대로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지시나 의사에 응답하는 역할만 맡았다.
반면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는 아브라함이 남을 축복하는 것은 몰라도 저주하는 권리나 재량 자체가 아예 없다. 다른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몰라서 멋도 모르고 그를 축복하거나 저주할 뿐이다.
하나님께 토설하라.
아브라함도 인간적으로 밉고 싫은 사람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외국인이자 나그네로 살게 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솔직히 미국에 이민 와있는 우리가 한국에 있었다면 얼마든지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려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일인데도 혹시 총 들고 복수할까 떼거리로 몰려와서 행패할까, 심지어 법원까지 가도 어차피 백인 편을 들 것을 두려워 참고 손해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아브라함은 외국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 현실정황상 남을 저주할 수 없다. 그랬다간 목숨도 부지하지 못한다. 거기다 해외 선교의 사명을 받았는데 자칫 그 전하는 복음에 장해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칠 수 있기에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런 현실 문제를 떠나서도 하나님의 자녀는 물론 모든 사람은 창조 때부터 서로 돕는 배필로 지어졌다. 남을 저주할 권리는 전혀 없고 원수까지 사랑할 의무밖에 없다. 그것도 인간이 죄로 타락하기 전에는 남을 사랑하는 일이 의무가 아니라 권리이자 축복이자 기쁨이었다. 타락한 후에 계명이자 의무로 바뀐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신자는 범사를 하나님께만 의탁해야 한다. 한 개인이 타인의 삶에 간섭하거나 개입할 수 없고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영향을 끼치고 싶다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받은 진실함, 선하심, 아름다움만 전하고 나누는 방식만 허용될 뿐이다. 예컨대 기도를 할 때 남을 위해선 좋은 일이 생기라고 축복하는 간구만 해야 한다. 저 사람에게 벌을 내려 달라고는 어는 누구도, 목사도 절대로 해선 안 되는 기도다.
신지도 죄의 본성이 남아있고 연약하고 감정적이라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럼 그 심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에게 토설(吐說)해야 한다. 다윗은 내 심령이 물 같이 쏟아졌다고 고백했다. 물이 쏟아지면 한 방울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처럼 미주알고주알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분께는 고자질해도 된다. 있는 감정 그대로 섞어서 말해도 된다. 심지어 이불을 덮어쓰고 그 사람을 향해 온갖 욕을 퍼부어도 된다.
단 그에게 직접 저주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토설하다보면 차츰 그분의 위로와 권면이 임한다. 내 쪽에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나의 허물과 죄까지 깨닫게 해준다. 객관적이고 정직한 회개를 하게 만드신다. 그럼 자기 잘못부터 고치려 결단 헌신하게 된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은 신자를 대신하여 상대에게 신원해주신다. 그분만의 오묘하고 은혜로운 방식으로 회개한 신자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그 상대마저 당신의 사랑을 알게끔 해주신다. 상대가 끝까지 그 사랑을 거부하면 어쩔 수 없이 그는 하나님의 구원 내지 축복 밖에 있게 된다.
설령 정말로 100% 억울하고 상대만 잘못했어도, 현실 세계에선 사실은 이런 일은 전무하고 내 쪽에도 반드시 응분의 잘못이 있지만, 신자는 직접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한다. 가서 따지지도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가 상대에게도 임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누구까지? 원수까지 그래야 한다. 언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서로가 목도할 때까지다.
발람 사건의 결말
발락과 발람 사건의 결말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다. 발람은 처음에는 여호와가 시키지 않는 저주는 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자꾸 돈으로 유혹을 하자 조금 마음이 변했다. 이런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은 마지못해 발람더러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나귀가 인간의 말을 하며 발람을 거부했고 다시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눈을 열어주고는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는 말은 절대 전하지 말라고 다시 엄명을 내렸다.
그 결과 발람은 이스라엘을 도리어 세 번이나 축복했다. 발락은 실망하고 아예 그들에게 저주도 복도 빌지 말라 하고는 포기하고 돌아갔다.(민23:25) 빌람은 결국 어떤 선언을 하는가?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찌로다.”(민24:9b) 처음에 발락이 발람에게 의뢰했던 내용과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신관과 정반대가 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본문의 약속과 똑같아졌다. 발람과 아브라함의 두 신관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발락과 발람은 열심히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저주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라. 그들로 자기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었다. 최소한 자기 계획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직접 받은 복은 없다. 단지 광야에서 평소대로 행진했다. 그들의 배후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 인도했다. 이스라엘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대적을 하나님이 혼자서 다 알아서 처리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을 단순히 수호신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절대로 방해는커녕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눈에 안 보이는 참 하나님을 아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신 존재에 대한 인식과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자각은 그런대로 있었다. 그러나 이방신들은 인간의 요구를 들어줄 의무만 있었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일 뿐이다. 인간이 바치는 정성에 비례해서 복을 주거나 최소한 방해는 말아야 신으로 인정했으니 여전히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상황도 동일했다. 인간이 하는 일을 훼방하는 자는 하나님이라도 대적하고 거역했다. 모든 사람이 오직 자기중심이 되어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마저 구원은 확보되었으니 무조건 우리 민족만 복을 달라고 떼썼다. 제사장들은 바치는 정성에 따라 받는 복이 달라진다고 부추기며 성전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다. 발락과 발람과 동일한 종교관이다. 한마디로 참 하나님은 완전히 실종 되고 기복주의 종교만 성행했다. 오늘날처럼 말이다.
예수 십자가의 뜻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것 아닌가? 다른 말로 너희가 바치는 재물과 치성에 비례해서 복을 주는 즉, 자동판매기 같은 하나님이 아님을 제발 알아달라는 것이다. 당장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릴 대신 죽으셨기에 너희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더 이상 전혀 필요 없으며 그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대신에 너희는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며 정말로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확장하라는 것이다. 원수를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면서 말이다. 지난주에 예수 믿어서 얻는 현실의 최고 축복이 오직 예수님만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함께 모여 눈물로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이 넘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순전한 모임을 지속할 때에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약속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본문의 약속을 예수님도 승천하기 직전에 그 믿음의 후손인 유대인 열두 제자들에게 똑같은 내용으로 지상명령(마28:18-21)을 주셨다. 모든 족속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했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과 정확히 똑같지 않는가?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제자들이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동행해주신다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 내가 저주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 내가 축복하겠다는 약속과 똑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입고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으로 가라고(행1:8) 즉, 해외선교사로 파송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선교사로 들어갔다. 이제 아브라함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성경의 진술이 이해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며 약속하신 내용은 하나님의 일 즉, 복음을 확장하는 일은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너는 나의 동역자로 불렀으니 나와 함께 가나안 땅 끝까지 들어가자. 그 일에 순전히 헌신하는 한에는 내가 앞서가서 모든 대적을 파해주고 여호와 이레로 모든 것을 예비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약속인가? 모두가 다 해외선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땅 끝은 신자가 현재 서있는 바로 그 자리다. 가정, 교회, 직장 어디에서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면 된다.
선교사로 파송된 신자로선 자기 신앙을 스스로 점검할 두 질문이 있다. 발락과 발람 같은 신관을 갖고 있는가? 아브라함에게 계시한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려 있는가? 쉽게 바꾸면 내 가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찾는지, 진정으로 하나님 그분을 깊이 알아서 예수 십자가 사랑을 주변에 나누려고 찾는지 여부다.
만약에 후자의 질문에 흔쾌히 예스라면 얼마든지 당당해질 수 있다. 정말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내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함께 해주시는데 어찌 세상 죄악, 사람들, 사탄의 세력 앞에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없다는 말인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라. 백세에 아들을 주셨지 않는가? 십자가 은혜 안에 사는 신자가 그 받은 은혜를 주변에 나누는 일을 세상은 절대 훼방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 신자가 기껏 남들에게 그것도 말 몇 마디로 상처 받아 전전긍긍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가난한 신앙인가?
8/14/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