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뻔뻔해지는 믿음을 가졌는가?
창세기 강해 (7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창20:1-18)
가는 곳마다 거짓말하는 아브라함
금주는 순서를 훌쩍 건너뛰어서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기 생명을 건지는 사건을 기록한 20장을 살펴보자. 같은 성격의 사건은 연결해서 함께 보면 이해하기 쉽다. 또 조금 길지만 20장 전체를 봐야 전후사정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본문을 접하는 신자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우리도 범하지 않는 치사한 잘못을 설마 두 번이나 저질렀을까 의아심을 떨칠 수 없다. 실제로 창세기를 서로 다른 네 문서자료에서 후대에서 편집했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동일한 한 번의 사건을 두 번 나누고 덧보태서 기록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두 사건을 비교해보면 장소, 시간, 등장인물, 사건 전개 과정, 그 결과 등이 완전히 판이하다. 각각의 사건을 따로 지어내지 않는 한 그렇게 다를 수 없다. 그럼 두 사건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물론 둘 다의 사실성까지 의심하게 되는 결론에 이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만 접근하다 역으로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고향 우르를 떠나올 때부터 누이라고 입을 맞추기로 합의했다.(13절) 당시의 근친끼리 결혼하는 풍습에 따라 실제로 이복누이이기도 했다.(12절) 그래서 “가는 곳마다” 그렇게 행세하기로 했으니(13절) 얼마든지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결국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당연히 두 개의 별개의 사건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브라함이 본인의 입으로 어떻게 설명하는가?(11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아내로 인하여 자기가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는 유부녀라도 예쁘고 마음에 들면 남편을 죽이고 빼앗는 것이 다반사일 만큼 영적으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인데 아브라함이 떠나온 우르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상황은 동일하지만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이었다. 동족에게는 그런 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은 바로 아내로 인해 너는 죽을 수 있음을 각오하라는 뜻이다.
저희 처가의 사돈뻘 되는 노부부가 인도네시아의 식인종 지역에 인터넷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복음을 전해 식인 습관은 없어졌다. 그런데도 선교사님이 지금 연로해서 많이 쇠약해졌는데 죽으면 팔은 자기에게, 다리는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한다고 했다. 존경하는 사람의 시신을 먹는 것이 죽은 자에 대한 예의요 존경의 표시이자 영광이라는 뜻이다. 구체적인 사정은 물론 조금 다르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부부를 그런 지역에 여호와의 이름을 들고 가라고 지시한 것과 같다.
최선의 방안
그런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은 무엇인가? 아내라고 실토하면 사래를 취하기 위해선 반드시 아브라함을 죽여야 한다. 반면에 누이라고 말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돈을 주고 취하거나 정식으로 청혼을 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밤중에 납치를 하더라도 방해만 하지 않으면 오빠를 구태여 죽일 이유는 없다.
애굽의 바로나 지금 그랄 왕 아비멜렉이 정식으로 후궁으로 맞이했다. 많은 결혼 지참금도 지불했다. 물론 아브라함은 아내를 팔아서 돈을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둘 다 살려고 누이라고 속이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을 뿐이다. 아브라함은 살았고 사래는 고생을 하지 않고 신분이 보장되는 최선의 현실적 방안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과 사래는 우르를 떠날 때부터 그런 위험을 알았고 또 각오했던 것이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단지 그런 불행한 사태가 제발 일어나지 말기를 소원 기도했던 확률의 게임으로 빠져나갈 여지는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어 우상에게 바치고 그 신전에서 창녀와 남창들과 온갖 음란한 행위로 제사를 지내는 일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타락상에 분노하고 저주했었다. 무슨 희생을 겪더라도 이런 곳은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도무지 인간이 행할 바가 아님을 절감했던 것이다.
물론 가나안 땅에도 동일한 위험이 있었지만 아마도 우르에서 그런 악한 관습에 동참하지 않으니까 완전히 왕따가 되었을 것이다. 그 사회에 도무지 더 이상 살 수 없어 떠날 수밖에 없었을 수 있다. 또 고대에는 각 종족마다 고유의 신이 있기에 차라리 외국에 가면 자기들 신을 강요당할 우려는 줄어든다.
큰 권능을 맛보고도...
아무리 모든 정황상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이미 한 번 실패를 했지만 하나님이 지켜 보호해주시는 너무나 큰 은혜를 체험했다. 그럼 두 번 다시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하는 의심은 여전히 지울 수 없다. 지금은 애굽 사건 이후 약 20년이 지났다. 그럼 그가 하나님의 오묘한 간섭과 크신 권능을 잊어버렸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은 지 2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기도하는 대로 응답이 된다. 지난날의 삶이 실패인 것도 절감하며 예수 안에서 새 인생이 기쁨과 열심히 넘친다. 헌신적으로 봉사 전도한다. 바울이나 모세처럼 세상을 뒤엎지는 못해도 주변의 친구 친척 가족을 다 전도하여 예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해진다.
그러나 막상 돌아오는 반응은 냉대를 넘어 조소 핍박이다. 내 개인적 문제도 차츰 열심히 기도해도 해결이 안 되고 꼬여만 간다. 첫 사랑의 믿음의 감격에 힘은 다 빠지고 빈 껍데기 신앙으로 전락한다. 그럼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믿음의 소모 탈진 현상이 찾아와서 또 거짓말을 했는가? 아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랬다. 두 번만 거짓말 한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이 최선이었다.
만약에 그가 우리가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식으로 애굽에서 겪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권능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아내라고 실토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능성은 둘 뿐이다. 그가 벌써 죽었거나 하나님이 매번 그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바로의 경우처럼 큰 재앙으로 벌을 주거나이다. 본문에서 아비맬렉에게 현몽만 한 것은 예외적 케이스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는 아주 인격적이었고 경우가 발랐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대적들에게 매번 큰 벌을 내리면 그들이 잘 믿을 것 같은가? 절대 아니다. 일일이 상벌을 내리면 기계적인 하나님이 된다. 특별히 공포의 하나님이 되어서 두려워서 믿는 시늉만 하지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순수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하나님 그분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만약 그랬다간 당장 아브라함부터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이럴 수 있는가 의아해 하는 우리 모두와, 이런 설교를 하는 저부터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무한한 긍휼로 인간들의 온갖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고 계신다. 불신자들은 당신께로 제발 돌아오라고, 신자들은 제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기다리고 계신다.
평생에 두 번 있은 사건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래는 모든 남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끈끈하고 음란한 눈길을 받았어야만 했다는 뜻이다. 사래는 127세에 죽었는데(창23:11) 우르를 떠나서 약 60년이 지난 후다. 그럼 완전한 노년이 된 기간을 빼고도 수십 년을 그런 수모를 겪어야 했다. 본문 사건으로만 쳐도 지난 20여 년간에 최악의 불행한 사태는 딱 두 번 밖에 없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 거짓말이 최선의 대책이 되었고 또 배경에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런 와중에도 두 번의 고난을 허용했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오늘날의 성경독자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애굽 사건에선 기근 같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것인지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뜻이었다. 선교사로 훈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럼 이 두 번째 불행을 허용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주목해야 할 사항은 두 번 다 일반인이 아닌 왕들이 사래를 취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으로 세워준다고 약속했다. 한마디로 여호와를 전파하는 자로 불러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에 기독교를 빨리 뿌리내릴 필요가 있어서 바울을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의 중심인 로마로 가게 해서 왕족과 귀족부터 복음을 전파케 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아브라함을 왕들과 만나게 했다.
최근 아프리카에서 가장 크게 교세를 확장시키는 종교는 몰몬교다. 그 비결은 추장에게 마을의 숙원사업을 돈으로 해결해주어서 부족 전체의 공식 종교로 선포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하나님이 그런 식의 세속적이고 강제적인 포교방법을 택했다는 뜻이 아니다. 메스컴이 발달되지 않은 고대에선 모든 최신 정보나 사상은 왕궁을 통해 소개되고 퍼져나간다. 이를테면 왕이 여호와를 믿거나 항복하게 되면 전 국민에게 일시에 여호와 간증을 하는 셈이다.
하나님의 원대한 뜻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또 있었다.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해 주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아비멜렉의 꿈에 현몽해주었다.(7절) 그리고 사태가 원상회복된 후에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주었다. 결정적으로는 사래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았다고 했다.(18절)
성경은 참으로 정미한 기록이다. 인간이 지어내려 해도 도무지 지어낼 수 없는 이야기다. “모든 태가 닫혔다”고 한다. 본처 왕비는 물론 후궁들 모두에게서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아비멜렉의 그 때까지의 평생소원이 무엇이었겠는가? 사래를 취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는 어떻게 하든 왕자를 볼 욕심이었던 것이다.
애굽의 바로가 할렘에 후궁을 수집하는 경우와는 전혀 달랐다. 바로는 성적 노리개를 삼으려 했고 그 동기의 악함을 하나님은 아시고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려 심판했다고 성경이 명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본문은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다만 현몽으로 경고만 했다. 언제 그랬는가? “그 밤에”(3절)다. 동침한 밤이라고 해석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한 오묘한 역사와 크신 은혜를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성경은 전체 문맥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아들을 생산할 목적이라면 고대에선 일반인들도 목욕재계한다. 특별히 왕들은 일종의 신성한 의식부터 먼저 갖는다. 거기다 사래에게 매달 여성의 주기를 먼저 묻고서 수태기간까지 정결하고 건강하게 대기토록 한다. 그 밤이란 사래를 궁에 들여 놓은 첫날이었고 아직 동침하지는 않았다. 아비멜렉이 나중에 나와 너의 수치스런 일을 면하게 해주었다고 고백했지 않는가? 하나님은 바로 때와는 달리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갈 것을 아시고 곧바로 첫날에 현몽으로 경고했다.
아비멜렉으로선 아주 당연한 반응을 보였다. 절대 불경스런 것이 아니다. 누이라는 거짓말을 그대로 믿었다. 거기다 정욕을 채우려 취한 것이 아니다. 외국 여자라 호기심이 동한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아들이 없지 않느냐, 그런데 마침 왕자를 낳아주기에 아주 적합한 미모와 교양을 갖춘 미혼녀를 만났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의 무죄함과 정당성을 충분히 아시고 재앙 대신에 그냥 돌려주라고 했다. 거기다 그럼 그가 너를 위해 너의 최대의 숙제를 두고 기도해 줄 것이라는 축복까지 주었다.
아브라함을 주시하는 아비멜렉
그 이후 아비멜렉은 틀림없이 아브라함을 주시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브라함은 인신 제물로 제사하지 않고, 보이는 형상에 절도 하지 않고, 많은 제물을 바치지도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의 신에게 정말 문자 그대로 단순히 기도만 했다.
아비멜렉은 지금까지 왕으로서 왕자를 보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을 것이다. 몸에 좋다는 약과 음식을 다 구해 자기와 아내와 첩들이 먹었을 것이다. 백 일 기도 아니 천 일 치성을 드렸을 것이다. 어쩜 남자 아이를 산 채로 죽여 제물로도 바쳤을 것이다. 어느 날 나타난 이방인의 자칭 여동생까지 궁여지책으로 취해보았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 현몽을 해주었고 사태는 전혀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꿈에서 들은 그대로 간단한 기도로 모든 집의 닫혔던 태들이 열리고 왕자를 볼 수 있었다. 고대의 왕들은 말 한마디로 만사형통이었다. 못 이룰 일이 없었고 세상 걱정이 생길 수 없다. 딱 하나 아들을 보는 문제를 빼고는 말이다. 그 일은 도무지 세상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 안 되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단순한 기도로 아들을 얻게 될 판이다. 아비멜렉으로선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이구나, 인생만사를 주관하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왕의 신분으로 누가 잘못했던 남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오명도 씻어졌다. 무엇보다 평생 해결 못했던 숙제를 본인의 기도가 아니라 제 삼자의 기도로 단번에 해결 받았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 하나님이 축복해준다는 약속이 지금 아비멜렉에게도 이뤄진 것이다. 당연히 여호와께 진심으로 항복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보기 좋은 대로 거하라고 허락했다. 이젠 내 나라 안에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필요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내가 책임지고 보호해주겠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아브라함이 종과 횡으로 행하는 모든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창13:17) 지금 아비멜렉을 통해서도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더 원대하신 하나님의 뜻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 더 남았다. 다시 18절을 보라. 여호와가 이왕에 사래의 연고로 아비멜렉 집의 모든 태를 닫았다고 한다. 그럼 이 사건을 통해서 태를 열어줄 것을 하나님은 미리 계획하셨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각본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자기들 앞날에 그런 계획이 있으리라곤 전혀 몰랐고 상상도 못했다. 아내를 빼앗길 수 있다고는 예상했지만 한 왕가의 왕자가 태어나는 일이 자기들로 인해 이뤄질지는 꿈에도 몰랐다.
목축은 항상 목초지와 물을 따라 옮겨 다녀야 한다. 이번은 믿음이 약해 기근을 피하고자 손쉬운 인간적 선택을 했던 애굽의 경우와 다르다. 자유의지로 이성적 판단에 따르긴 했지만 그 바탕에는 아브라함의 한층 성숙된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자유의지에 의해 판단 시행했지만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과 전혀 상충 모순이 없었다. 하나님은 얼마나 광대하신 분인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르며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가 순전한 마음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이끌어주신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차원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그럼 자칫 신자가 무슨 일을 벌이든 뒤치다꺼리 해주는 하나님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보다 사전에 마련된 하나님의 너무나 오묘하고 영광스런 계획에 아브라함과 사래는 쓰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당신께서 창대케 증명하신다. 그럼 결국 아브라함 이름도 창대케 되고 그 본인에게도 유익이 된다.
이번 사건으로 아브라함이 절감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소명자로 부름 받았다는 의식이 더 확고해졌을 것이다. 나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스런 계획을 당신께서 차질 없이 이뤄나가고 있음을 완전히 체험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이름을 가는 곳마다 전파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을 것이다. 비록 가는 곳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또 하나님이 내가 종이든 횡이든 행하는 곳마다 주신다는 약속도 땅 부자로 만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나님의 복음으로 그 땅을 당신께서 정복하실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일에 쓰임 받는 자기야말로 모든 인간 중에 최고의 고귀한 인생이자 복의 근원이라고, 또 그 일이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기쁨임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난할 자격은 아예 없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큰 권능을 체험하고도 반복해서 동일한 잘못을 범했다고 비난 아니 의심할 자격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 엘에이에는 South LA라고 흑인 갱들이 많이 사는 아주 위험한 우범지역이 있다. 일반인이 멋모르고 잘못 들어가 괜히 얼쩡거리면 자기들을 무시했다고 돈을 빼앗기고 곤욕을 치른다. 그런 곳에 예쁜 여자 친구랑 같이 들어가서 데이트하고 있다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지금 아브라함은 매일 South LA 같은 지역에 다니면서 전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그렇게 담대하게 행할 수 있었던 근거와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현실적으로 누이라고 거짓말 한 것이 최선의 방책이지만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애굽에서 체험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권능을 맛보고도 또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런 권능을 맛보았기에 도리어 가는 곳마다 계속 거짓말 할 수 있었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바로에게 재앙을 내려서라도 하나님이 보호해주셨다. 바로와 비교도 안 되는 가나안의 한 부족 그랄 왕에게서 보호 못해줄 리는 없다.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하신다. 단 내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그분을 아는 자답게 행하고 있다면 말이다. 말하자면 내가 좀 치사하지만 가는 곳마다 거짓말해도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뻔뻔한 믿음이었다.
이 단계에서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를 넘어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붙들었다. 물론 그도 자기가 연약하며 날마다 쓰러지는 존재임을 자각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이 일일이 벌을 주면 자기는 벌써 저 세상 사람이라는 점도 인식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의 언약에서 절대로 벗어날 생각을 못했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고 치사하기까지 한지 잘 아신다. 그러나 나를 당신의 종으로 세웠기에 그분은 나를 절대 떠나지 않는다. 가는 곳마다 거짓말 하는 것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없어서 최선의 방안임을 그분도 인정해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도 정말 치사하지만 이런 나를 용서하고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매일 뻔뻔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그의 믿음은 정말로 순전했고 당당했다. 의 심과 불순물이 포함되지 않은 믿음이니 자연히 당당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기도의 결과도 선하게 응답되었다. 딱 두 번만 위험에 빠졌지만 하나님이 오묘하게 다 구원해주셨다. 하나님도 그의 뻔뻔한 기도를 기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전에 하나님의 완벽하고도 오묘한 계획이 있었고 당신께서 전적으로 주도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두 번씩이나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의아해 하는 것은 너무나 가난한 신앙이다. 아니 교만한 신앙이다. 식인종 지역이나 South LA 같은 곳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면서 말이다. 좋은 믿음은 하나님 앞에 뻔뻔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뜻이 무엇인가? 바로 때려 죽여도 나를 사랑하고 보호하시겠다는 것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믿음이 당당해지지 못하는가?
10/2/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