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풀지 못하는 신자의 숙제(1)
창세기 강해 (69)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창13:5-13)
짜장면인가 짬뽕인가?
한국인에겐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숙제가 있다.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점심 식사로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물냉면을 먹을까 비빔냉면을 먹을까 결정을 도무지 못한다. 최근에는 결국 그릇에 칸을 질러 둘 다 한 번에 담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인생은 아침에 무슨 옷을 입을지 부터 점심 한 끼 해결하는 것 등 선택의 문제에 계속 봉착한다. 한때 전자제품 CF에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는 카피가 인기를 끌었고 거의 격언이 되다시피 했다. 선택의 결과가 미치는 파장이 짧게는 점심처럼 잠깐의 기쁨을 주는 것에서, 전자제품까지 십년이 갈 수도 있다.
거기다 전공, 직업, 배우자, 저희 같이 이민 와서 사는 것 등 평생에 영향을 미치는 선택도 있다. 평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인격체 전부가 그로 인해 변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은 이처럼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선택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런 씨름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점쟁이들이 공돈을 버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선택의 딜레마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오늘의 본문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하면 풍성한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에 교과서격인 구절이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외적 환경에만 주목하여 인간적 선택을 하는 바람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파국을 맞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브람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척박한 가나안 땅을 선택하여 나중에 창대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해석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여러분에게 질문해보자.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서쪽 대신에 동쪽으로 가라, 교수 대신 사업을 하라 등의 응답을 받은 적이 있는가? 분명한 음성이든, 징조이든, 성경구절이든 어떤 방식이 되었던 그 길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따랐더니 크게 형통한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거의 없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과 계획을 미리 알 정도로 영성이 뛰어난 자는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 정말로 특별한 일에 한해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이다. 설령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았다 해도 여전히 어리석고 욕심과 죄에 찌든 우리가 시행하는 과정에 실패할 수 있고 그럼 또 다른 선택을 계속해야만 한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했다고 의아해 할 필요 없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대화한 모세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따지면 그들 또한 평생에 한두 번이었다. 거기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류구속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였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지 않는가?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당할 것이라는 성령의 경고를 듣고도 자기가 서원한 일을 이루려 올라갔다. 또 그만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자도 없는데 그 결과가 형통했는가? 아니다. 죽을 고비도 수도 없이 넘겼다.(고후11:23-27) 창대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즉, 하나님의 일이었다. 본문의 아브람에 관해서도 히브리서12:8에서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갈 새” 다음에 뭐라고 말하는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고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종을 삶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거의 모든 신자들이 잘 모르고 있다. 오늘의 본문이 정작 말하고 있는 바만 제대로 추적하면 앞으로 계속 닥칠 선택의 딜레마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번 주는 롯의 선택만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롯의 선택은 옳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롯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아주 잘한 선택이다. 선택을 잘못해서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을 했다.
삼촌과 조카가 소유한 가축 떼가 많아져 함께 동거하기에는 목초지와 물이 부족해서 서로 별거하기로 합의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친척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미리 구체적으로 알고도 지금껏 순종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께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는가? 이것만 봐도 본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 얼마나 단순하고 초보적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삶에 세밀하게 간섭하여서 당신의 약속의 말씀을 당신이 이뤄나가고 있는 중이다. 아브람은 결과적으로 반강제적으로 그 지시에 순종하는 격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일에 들어 사용하려고 지금 준비하고 훈련하는 중이다.
어쨌든 롯이 땅을 선택한 기준이 무엇이었나? 물이 풍부한지 보았다.(10절) 이게 왜 잘못인가? 양떼를 광야로 내모는 것이야말로 바보다.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공대로 진학하는 식이다. 자기 실력은 전혀 쌓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이뤄준다고 덤비는 신자는 하나님도 대책이 서지 않는다.
예수님도 비록 비유이긴 하지만 망대를 세울 때 사전에 비용을 계산해야 하고, 전쟁을 치를 때에 상호 전투력을 비교해 승산이 없다고 여겨지면 화친하라고 했다.(눅14:28-31) 무슨 뜻인가? 현실 여건을 선택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라고 분명히 가르쳤다.
롯을 삼촌 아브람이 땅을 선택하라고 덥석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한 의리없는 파렴치한 조카로 몰아세워선 안 된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분명히 처음에는 사양했을 것이다. 추석 명절에 서울서 온 삼촌이 용돈을 주면 조카는 내심 좋으면서 겉으로 몇 번 사양하지 않는가? 그럼 어른이 주는 것은 받아야 예의라고 꾸중을 듣게 된다.
본문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해도 롯은 진심으로 삼촌 아브람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중에 소돔과 고모라의 사악한 백성들을 상대로 두 천사를 보호하려 노력한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롯이 경우도 상식도 모르는 자가 아니었다.
끝까지 삼촌에게 양보하지 않는 것도 구태여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 이솝우화의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타고 가는 사건에서 보듯이 삼촌을 조카에게 양보하지 않는 욕심쟁이로 만드는 꼴이 되지 않는가? 세상의 윤리는 모두가 상대적이다.
롯의 선택에 대한 결정적 착각
롯의 선택에 대해 신자들이 결정적으로 착각하는 사항이 하나 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다고 여긴다. 다시 10절을 보라. 요단 들판을 택했다. 소알까지 물이 넉넉해서 애굽땅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애굽은 나일강 삼각주처럼 비옥해 보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라고 설명한 이유가 아직 죄악으로 타락하기 전이라는 뜻이 아니다. 소돔을 심판할 때에 근처 성읍들도 함께 진멸하려고 롯더러 산으로 도망가라고 명했다.(창19:17) 그러나 롯은 산 속의 생활이 두렵고 거리도 멀고 소돔에 대한 미련도 남아 가까운 작은 성읍으로 도망가게 해달라고 청해 허락을 받았다.
그 성읍이 바로 소알이었다.(창19:22) 하나님은 롯이 들어간 소알 성읍은 심판하지 않고 보호했다. 대신에 소알 근처와 성읍 주변은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 폐허가 되었다. 심판 전이라는 것은 폐허가 되지 않아 아직은 물과 풀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런 오해를 하지 말라고 성경은 본문 13절에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이었더라.”라고 설명한다. 이미 그 때에도 심판 받을 만큼 타락되었다는 뜻이다.
본문 12절을 보라. 롯이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소돔 땅을 택한 것이 아니다. 나중에 옮긴 것이다. 당시 목자들은 들판에 장막을 치고 야영했다. 성읍에 잘 수 없었다.
롯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비 데라가 죽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삼촌을 따라 나왔지만 도시 문명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본문 10절에서 애굽땅 같았다고 말한 것은 이중적 의미다. 물도 풍부하지만 그는 내심 화려하고 사치스런 도시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다는 표현이다.
또 “성읍들에 머무르며”라는 것도 목자들만 야영시키고 자기는 편하게 성읍들에 거주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나중에는 가장 큰 도시 당시의 서울이라 할 수 있는 소돔으로 아예 장막을 옮겨버렸다. 성읍으로 장막을 옮겼으니 직업까지 바꿨다는 뜻이 된다. 어쨌든 롯은 소돔을 택한 것이 아니라 요단들을 택했고 그 택함에는 아무런 하자사항이 없다.
라스베가스로 이주할 수 있는가?
소돔으로 옮긴 것은 물론 순전히 롯의 자기 판단이었다. 판단이란 평소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 나오며 그에 따라 당연히 생활패턴도 달라진다. 들판의 야영이 불편해서 안락하고 쾌적한 환경을 택한 것이다.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겠다는 뜻으로 이 또한 잘못이 전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받은 명령이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으로 문명을 개발 발전시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지 않고 자기가 선택한 것도 꼭 잘못이라 할 수 없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분 뜻을 미리 알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또 인간에게 자유의지 자체를 허용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구태여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신자라고 일부러 불편하고 고통스런 곳이나 일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하나님도 신자가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일부러 고난으로 밀어 넣지 않으신다. 병 주고 약 주시는 식의 하나님이 아니다.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선교사 목사처럼 하나님의 일을 풀타임으로 직접 수행하는 경우 세상으로부터 이 모양 저 모양의 훼방과 핍박에 부닥치게 될 뿐 일반 직업을 가진 자까지 의도적으로 고난을 주지는 않는다.
여러분에게 또 다른 질문을 하나 해보자. 만약 현대의 소돔으로 Sin City라고 불리는 라스베가스에서 지금 받는 연봉의 2배 내지 1.5배를 주겠다는 Job Offer가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쾌락과 탐욕과 죄악의 도성이기에 신자라면 거절해야 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가든지 남아 있던지 자신의 모든 현실 여건을 판단하여 결정하면 된다. 심지어 구태여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 죄로 타락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라도 죄악으로 찌든 소돔 땅이다. 소위 Bible Belt라는 이곳 멤피스가 얼마나 범죄율이 높은가? 예컨대 살인범죄는 라르베가스보다 월등 높다. 이곳이 타락 정도가 라스베가스보다 더하면 덜했지 덜하지 않다.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므로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직접 찾아보자.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22:30-31)
하나님이 왜 분노하셨는가? 죄악으로 이 땅이 타락한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아담 원죄 이후 모든 땅이 그렇다.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고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진노하셨다. 당신을 알지 못하고 죄 중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은 똑같이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긴다.
라스베가스보다 더 사악하고 극도로 타락했던 니느웨도 하나님은 아끼고 요나를 보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그러나 요나는 오늘날의 율법주의적 도덕주의적 신자들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죄악의 도성에 갈 수 없다고 버텼다. 회개의 메시지는 더더욱 전할 수 없으며 멸망시켜 마땅하지 않는가하고 따졌다. 그 뒤의 결과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
소돔으로 이주도 잘못이 아니다.
신자니까 라스베가스 같은 Sin City를 가지 않겠다는 것은 잘 봐주서 아주 가난한, 엄격히 말해 아주 잘못된 믿음이다. 반대로 그런 곳을 찾아가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다. 무너진 성벽을 막아서야 한다. 차라리 그곳의 유혹이 심해서 제 믿음이 연약하니까 넘어질지 모르니까 성숙한 다음에 가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봐줄만한 여지는 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틀렸지만 말이다. 성숙되어 가겠다면 평생을 못 간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성숙된다.
체스트톤이라는 신학자는 사람이 기생집에서 온갖 유흥을 즐겨도 사실은 하나님을 찾는 몸부림이라고 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모든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된다. 라스베가스 사람들, 지금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곳 멤피스의 가난한 청년들만큼 하나님의 긍휼이 절실히 필요한 자가 없다. 그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알게 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변화시키라고 우릴 신자로 부른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유다를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복음을 들고 가라고 했다. 유다만 넘으면 당시로선 모든 지역이 다 라스베가스요 니느웨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 그분의 품 안에 있다는 권능, 십자가 복음의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신한다면 어떤 땅 끝이라도 가야하고 갈 수 있다.
바울은 본인은 죽음의 문턱을 들락거리다시피 했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를 통해 창성했다. 라스베가스에 가지 않겠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작금 화려하고 거창한 교회 건물 안에 십자가 장식만 크고 엄숙하게 걸어놓았다. 십자가 복음을 교회 건물 안에 가둬놓은 것이다.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그 인생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복음의 생명력이 기껏 신자가 세상에서 형통하고 출세하는 비결로 둔갑했다. 우리끼리 박수치고 찬양하며 감정에 겨워 눈물 흘리고 있으니 하늘에서 하나님이 눈물 흘릴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더 엄중한 경고를 신자를 향해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겔33:6) 하나님의 파숫군인 신자가 복음으로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그 죄인의 심판 여부와 상관없이 신자에게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한다.
여러분더러 지금 라스베가스에 이주하라 또는 선교사로 가라는 뜻이 아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라. 성벽 무너진 곳이 얼마나 많은가? 불쌍하지 않은 자 단 한명도 없다. 멀리 갈 것 없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 주변의 이웃과 교인들, 심지어 자기 가정 안에서도 그렇다. 주변에 심령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모든 무너진 곳을 우리의 노력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구원 진리로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무슨 뜻인가? 롯이 소돔으로 이주하여 직업을 바꾼 것까지도 아무 잘못이 아니다. 그곳에서 파숫군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 그의 잘못이고 패망의 원인이었다. 대신에 그는 그 와중에 인간적 의리로 자기 두 딸을 성중 백성의 성적 노리개로 내주려 했지만 하나님이 막아주셨다. 아브람은 아내를 버렸지만 롯은 자식까지 버렸다. 어쩜 소돔의 성적 타락에 동참한 것은 아닐지, 동참하지 않았어도 그 향락 문화를 수수방관했다. 그의 인생이 망한 직접 원인이었다.
롯이 잘못된 원인
한마디로 롯은 아브람처럼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해 아브람과 같은 믿음이 없었다. 아비 데라가 죽자 어쩔 수 없이 삼촌을 따라 나섰다. 그 후로는 삼촌일 그를 항상 보살펴주었다. 지금 처음으로 독립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 소유는 풍부해서 도시의 쾌적한 생활환경을 즐길 수 있었다.
바꿔 말해 그는 한 번도 고난다운 고난을 겪어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자기 인생의 갈증과 고통을 두고 씨름해 보지 않았다. 하나님을 인격적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그분의 사랑과 권능의 오묘함 풍성함 세밀함을 전혀 체험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생이 필연적으로 흘러가는 결말의 전형적인 예가 롯이었던 것이다.
롯의 잘못은 선택을 잘못한 것이 아니요, 소돔으로 이주한 것도 아니요, 파숫군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인데, 내면에 여호와가 없었던 것이다. 신자들이 자꾸만 하나님의 길을 미리 알아야겠다고 덤비는 까닭은 하나님에게 형통하고 출세하는 방법을 묻고 그분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신자는 그 이전에 자기 실력부터 쌓아야 한다. 자기 판단으로 행하면 된다. 현실적 인간적 요소를 모두 감안해서 지혜롭게 분석 결정하면 된다. 단 그 결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불법 부정하지 않게 행해야 한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앞에 정말로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특별히 내 주변에 무너져 내리는 곳이 없는지 찾아서 그곳으로 달려가 막아서는 일을 선택하면 된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라. 우리 모두는 너무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능하며 욕심과 죄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직통 계시를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어쨌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무진 노력한다. 그런 바탕에서 설령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쳐도, 이 또한 어폐가 있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벌을 주시겠는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상을 주셔야 하지 않는가?
제발 하나님 그분을 너무 속이 좁은 존재로 우리 스스로 자꾸 제한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시다. 지금도 진노를 참고 계시다. 그 긍휼이 무한하시다. 그분의 광대하심 안에 자기를 얼마나 광대하게 던져 넣을 수 있느냐가 믿음이 좋은 것이다.
그분의 광대하심을 확신하는 자는 바울처럼 성벽이 무너진 곳을 찾아간다. 그리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본다. 자기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강건해진다. 무엇보다 죽은 자가 주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생명으로 살아나는 역사를 목도하게 된다. 오늘 롯의 선택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사항이다.
9/18/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