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3:11-16)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는가?
구약성경강해(12)/민수기강해(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 자손을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종족을 따라 계수하되 일 개월 이상된 남자를 다 계수하라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그 명령하신 대로 계수하니라.”(민3:11-16)
별도로 계수한 레위 지파
이스라엘은 군대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서 20세 이상의 남자들을 계수했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성막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맡았기에 그 조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별도로 계수하면서 일 개월 이상 된 남자를 계수 대상으로 했습니다. (15절)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제사장으로 성막에 봉사하려면 30세 이상이어야 한다고 율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민4:3) 그런데도 일 개월 이상으로 조사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레위 지파에게 맡긴 소명이 성막 봉사 외에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12절에서 설명하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태를 연 자 즉, 장남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한 것입니다. 일 개월 이상을 대상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추측하건대 고대는 위생이 열악하여 태어나자 죽는 일이 종종 있었으므로 일 개월 동안 아무 일이 없었다면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장남은 각 가정을 대표합니다. 레위 인 한 명이 이스라엘 한 가정씩을 대신했습니다. 레위 지파 전부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장남이나 레위 인에게 우월한 지위나 신분을 부여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12절 끝에 레위 인은 내 것이라고 했으니 이스라엘 전부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살고 죽음은 물론 인생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이스라엘은 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홉 번의 큰 재앙을 겪고도 끝까지 여호와를 거역한 애굽의 장남들이 심판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
이스라엘 전부를 구별한 하나님
그러나 그런 의미를 단순히 드러내려는 상징적인 종교의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레위 지파의 숫자와 이스라엘의 장남 즉, 가구(家口) 수자와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남 숫자가 레위 지파보다 273명이 더 많아서 한 명당 5세겔 씩 쳐서 1365세겔을 레위 지파에게 주었습니다. (민3:46) 레위 지파 한 명당 한 가정씩 배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각 가정별로 자신들의 일생을 레위 인을 통해 하나님께 완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레위 인들은 모든 성읍에 흩어져 살게 했습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한 가정씩 맡아 책임지고 섬기며 기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 바친 돈을 생명을 레위 인이 대속한다는 의미로 생명의 속전(贖錢)이라고 부릅니다. 나중에는 모든 남자가 성전에 매년 주민세 격으로 성전 세겔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순종 헌신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조사는 레위 지파를 구별했다기보다는 이스라엘 전 국민을 제사장 족속으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모든 민족이 미개하고 사악한 방식으로 우상들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였습니다. 인생의 만사를 주관하시는 유일한 참 하나님임을 그들로 엄청난 기적들을 체험케 하여 입증했습니다.
레위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은 자기들의 세속적인 직업과 일을 통해 다른 민족들 앞에서 여호와의 사랑과 권능을 어떤 방식으로든 증거 하도록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풀타임으로 그 일에만 전념하게 했습니다.
또 그러려면 이스라엘부터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레위 지파는 자기들이 지은 죄를 포함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시로 짓는 죄를 성막 제사로 깨끗하게 씻음 받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할지 백성들을 가르치고 또 자기들부터 삶에서 본을 보여야 합니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지파로 하나님께 부름 받았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열방의 제사장 지파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모두는 세상 족속들 앞에서 레위 인들과 동일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하나님은 율법을 수여했으며, 모세와 이스라엘 전 백성은 율법을 준행하여 제사장 나라의 소명에 헌신하겠다고 피 뿌림의 서약을 했습니다. 그것을 어기면 짐승 제물처럼 죽음의 형벌을 받겠다는 뜻입니다. (출24:1-7)
왜 하필 레위 지파가 제사장인가?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레위 지파에게 제사장 직분을 맡겼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당신 임의대로 선택한 것입니다. 레위 쪽에선 어떤 자격 조건 능력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였습니다.
레위는 야곱의 첫째 아내 레아에서 난 셋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애굽에서 죽을 때에 열두 아들에게 유언을 겸해 기도하면서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때 레위에게 분노가 많고 살인에 능해 사람들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축복이 아니라 사실상 저주하는 유언을 했습니다. (창49:5) 야곱은 셋째 아들 레위의 평소 성품과 언행을 감안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같은 엄마에게서 난 여동생 디나가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한 사건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같은 엄마에게서 난 동복형제끼리 작당을 하여서 할례받으라고 거짓말로 히위 족속을 속이고 세겜과 그 족속을 잔인하게 진멸했습니다. (창34장)
그 후손이 바로 모세와 아론입니다. 선조 야곱의 저주 아래 출생한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의 영웅이 되게 하고 거룩한 율법을 직접 전수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대제사장 직분은 맡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본문에 이어지는 17절부터의 레위 인을 계수하는 기록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아론이 그 집안의 장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모세나 아론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위치의 죄인이며 그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시내 산 금송아지 배역 사건의 주모자입니다. 그가 지시하자 백성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고, 그의 감독 아래 금송아지 우상을 제작했고, 그가 허락하자 백성들이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의 형벌로 삼천 명을 칼로 도륙하여 죽였습니다. 아론이야말로 가장 먼저 심판받아 죽어 마땅했습니다. 대신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죄송하지만 폭탄으로 죽으면 순간에 흔적 없이 끝나고, 기관총으로 난사를 해도 몇 분 안에 심판은 종결됩니다. 당시에 그런 무기가 없었지만 어쨌든 칼로 죽이려면 집행자로 몇 명이 동원되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한 명씩 죽여야만 합니다. 그 현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처참했을 것이며 피비린내가 천지에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순종하여 제사장 나라 직분을 잘 수행하고 출애굽의 여호와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을 맺은 지 겨우 40일 만에, 시쳇말에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언약의 내용은커녕 그런 언약을 맺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하나님 앞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거역했습니다.
그 언약식에서 동물 희생의 피를 자기 옷과 몸에 뿌렸습니다. 만약 어기면 희생 제물과 같이 그 잘못을 죽음으로 갚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젠 자기들의 피를 쏟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수천 년 후의 우리가 봐도 이스라엘이 너무 부끄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거기다 제일 먼저 죽었어야 할 아론을 살려만 준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직까지 수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것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분이 아무리 주관적으로 행해도 공평과 정의에 단 한 치의 하자 없이 완전할 뿐입니다. 그분의 절대적 주권이 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따로 있습니다. 삼천 명이나 칼로 도륙하는 심판은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두렵고 또 뭔가 섭섭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당신만의 자비와 긍휼이 반드시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에 연류된 자 중에 아론이 유일한 생존자였을 것입니다. 아론 개인적으로는 삼천 번을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후의 일상 삶에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삼천 번을 결심했을 것입니다.
율법의 최고 전문가로 예수를 극렬하게 반대 핍박했던 바울을 복음의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예수의 열렬한 옹호자로 하나님은 들어 사용했습니다.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 중에 무엇을 만들지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고유 권한에 속합니다.
사형수라도 최고의 사도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은 들어 쓰십니다.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성령으로 역사하여 당신의 동역자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만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셔야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증명하는 종도 당연히 그분이 택하여야 하고 그래야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 일에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하나님이 불러 세운 것이 인구 조사의 목적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군대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표면적 이유이지만 단순한 군대가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였습니다. 전투 경험이나 변변한 무기 하나 없었으나 믿음으로 어떤 대적에게도 승리케 할 군대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는 것 자체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애굽을 넘어 전 세계에 선포하는 그분의 일이 됩니다.
지금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목사와 선교사는 레위 지파로 일반 교인들은 이스라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자라면 자신의 세속 직업을 통해서 아니면 풀타임 사역을 하는 둘 중 하나가 되어서 반드시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고있는 중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불신자 가정 한 가정씩을 신자 한 명이 섬기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들이 그 맡은 신자를 통해서 생명의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는 일에 충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두 부류의 믿음
당장에 내 코가 석 자이라 전도는 꿈도 못 꾸고 나부터도 세속의 욕심으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워서 주일 교회에 나와서 회개하는 정도의 수준입니까? 아직은 도무지 그럴 형편이 아니지만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작정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직도 하나님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더러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사장 족속으로 충성하는 여부가 반드시 도덕적 선행이나 종교적 경건이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음으로써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가나안 족속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들어가면 당연히 얼마 안 가서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광야에서 사십 년이 지나도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 나왔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과 전쟁도 치르기 전에 너무나 놀랐고 여호와의 권능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고난 중에도 심지어 죄를 짓고 있어도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당신께서 증명하십니다. 그분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자기들이 따로 구별되어 그분이 종으로 세워졌다는 확신입니다.
따라서 교인은 하나님이 믿음을 심어주어서 믿게 되었다는 자와 자기가 믿기로 결단하여 믿고 있다는 자 둘로 나뉩니다. 그중에서 믿음이 하나님이 선물로 그분이 자신에게 심어주었다고 믿는 자들이 그분을 훨씬 더 잘 증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이성적으로 납득 수용합니다. 또 반드시 스스로 믿기로 결심하고 헌신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 후에 그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가 믿었고 믿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만 할 사실은 그 전에 성령이 먼저 신자에게 간섭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수 없습니다. (고전12:3) 예수님은 단순히 기독교를 창시한 자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신자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졌기에 그분께 자기 전부를 의탁할 수 있는 주인(master)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으로만 우리에게 주신 이런 구원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고전2:12)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령의 임재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바람이 불 듯이 임의로 부는데 즉, 성령의 뜻대로 불기에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요8:3)
주님은 분명히 바람의 소리는 들린다고 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한여름에는 화씨 백도가 넘는 뜨거운 날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늘에만 들어가면 미풍이 뺨을 간질이듯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시원해집니다. 바람이 불고 나면 낙엽이든 먼지가 날리니까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가는지 구체적으로 몰라도 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내 속에 새 사람으로 바뀌는 제2의 창조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과정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가 아무 주는 것 없이 밉다가 어느 사이에 예수가 아무 이유 없이 좋아지고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저절로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신자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처음 대면했을 때에는 예수님이 성령이 그에게 역사하는 것을 잠시 보류시켰습니다. 오순절에 당신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강력히 도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아직도 성령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역사하는지 캄캄하게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먼저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곳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을 한 번에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성령이 아주 강력히 역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이 보였다고도 합니다. 추측하건대 북극의 오로라와 비슷한 모습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을 보이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인데도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심으로써 죄로 타락한 인간들의 눈으로 역사상 딱 한 번만 볼 수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인간을 대우하는지 당신의 사역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BC와 AD 둘로 나뉘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동일하지만 다른 위격이신 보혜사 성령이 천국 보좌로 오를 주님 대신에 이 땅에 강림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세상 땅끝까지 끝날까지 떠나지 않고 보호 인도하여서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제사장 족속의 소명을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역사상 딱 한 번만 성령이 인간들의 눈에 보이게 임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변화
그 120 명의 제자 중에 신약의 대제사장 격인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아론처럼 그 인생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그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수제자임에도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여 가장 먼저 심판받아 마땅했던 자입니다.
그가 주님을 부인할 당시에 그에게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소원, 의지, 열심,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지 목에 칼이 들어오자 그 모든 것들이 휴짓조각으로 바뀌고 역사상 최고로 비겁한 겁쟁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사실은 겁을 먹고 그 재판장 근처에도 가지 못했겠지만, 그와 똑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임을 우리 대신에 여실히 증명해준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성령이 임재 내주하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죽었다 부활하신 메시아라고 당당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선물로 얻는다고 담대히 설교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이 회심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당연하다고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은 빌라도, 헤롯 일당, 유대 대제사장들이 힘을 합쳐서 십자가에 죽였고 그런지 겨우 50일밖에 안 지났습니다. 주님은 아주 큰 권능을 가졌고 무엇보다 십자가에 죽으려고 처음부터 작정해서 스스로 올라갔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아무 권능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라, 믿지 않으면 죽음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말은 유대교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스승과 마찬가지로 유대 사회의 미움을 받아 곧바로 파문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투옥되었고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만 하지 않으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거절하며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여 밤중에 옥문이 다 열리고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풀려나왔습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 잘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택했고,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을 심어주었고,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을 충만하게 채워서, 당신의 동역자로 세웠습니다. 그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주하신 성령의 힘으로 살게 됨으로써 자기 인생 전부를 오직 하나님께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손을 잡고 교회로 이끌어주셨다.
가끔 제가 나이 40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된 것을 궁금해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어떻게 목사가 되었느냐고 질문하시는데 극적으로 인생이 전환될 만한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지, 아니면 제가 어떤 크나큰 진리의 깨달음을 얻었는지 기대하면서 묻는 것입니다.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길을 다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되고 나니까 응당 해야 하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가 안 되었더라면 제 인생이 완전히 처절한 실패였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를 믿기 전부터 저를 택했고 목사가 될 재능과 은사를 부어주시고 저를 알게 모르게 준비 훈련 시켰음을 나중에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일일이 간증을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과 계획으로 아무리 다른 길로 가봐야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를 하나님이 따로 불러 세웠다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 모두 목사 전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비록 여러분은 예수를 믿기로 스스로 결심하고 노력했다고 여길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애인을 만나서 결혼의 전제 조건을 내세웠기에 밑져야 본전 식으로 교회에 출석했던, 나면서부터 기독교 집안인지라 아무 의심 없이 교회에 나왔던, 스스로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동의해서 믿어보기로 결단을 했던, 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작용하는 성령의 역사는 그 영으로 알지 못합니다. 지정의로 자신의 믿음을 인식하고 난 후는 이미 믿기로 결단한 후입니다. 원죄로 타락한 자연인은 절대로 교회에 혼자서 나오지 못합니다. 스스로 온 것 같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손을 손수 잡고서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셋째 아들로 분노가 많고 살인에 능했던 레위이 후손인 아론도 하나님의 대제사장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자리에 예수를 믿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며 함께 모여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너무나 큰 은혜요 엄청난 기적입니다.
간단하게 증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의 바로 그 모습대로 살게 될 것이라고 미리부터 계획했습니까? 자신이 계획한 그대로 100% 차질 없이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다고 자신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스스로 믿었다고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한 구체적 과정만 모를 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세상의 탐욕과 자기가 최고라는 교만으로 가득 찬 내 속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이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했다고 해서 단순히 기독교 신자가 된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택하여 평생을 함께 해주십니다. 지금도 그분이 내 인생을 꽉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신자 쪽에서 그분을 붙들어야 하는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내 코가 석 자일 때가 많고 고난이 겹치면 그분을 잡은 내 손에서 힘이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기도할 힘도 소원도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나를 붙들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질 리는 전무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수호천사의 역할을 해준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고 붙들어서 평생토록 그 인생의 방향을 예수님의 십자가 쪽으로만 향하게 해주십니다. 때로 우리가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그분의 열심과 의지로 다시 일으켜서 반드시 십자가 쪽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사실은 신자들이 선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은 드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만 의지토록 하여서 겨우겨우 힘을 내어서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서는 모습으로 세상 사람 앞에 당신을 증거하게 만드십니다.
신자는 그래서 완전한 절망 중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면 참 소망이 회복됩니다. 또 영적인 죽음에 빠져 시체와 방불했었으나 눈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영적 생명이 새롭게 충만해지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당신다우심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이런 택하심을 입었습니까?
12/2/20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