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가? 생명인가? (사9:1-7)
2018 성탄주일 설교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1-7)
태어날 아기의 이름
오늘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속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선지자는 앞선 7:14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본문은 그 예언을 더 확장하여 구체적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기의 이름을 하나만 들었다가 본문에선 여럿으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 특성, 인격체 전부를 대변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 이름으로 다시 계시했으니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 셈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구조가 조금 특이합니다. 그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배열된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둘째 문단과 셋째 문단이 동일하게 ‘이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의 진술에 대한 원인과 근거를 뒤에서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그 세가지 내용은 셋째 문단 6-7절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는 사실과 그 이름으로 속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문단 4-5절은 그 아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즉, 어떤 사역을 할 것인지 말합니다. 첫째 문단 1-3절은 그 한 일의 결과로서 사역의 열매에 대해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런 순서에 따라 뒤에서부터 살피면 본문을 이해하기 더 쉽습니다.
먼저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합니다. 정사는 지도자가 된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고대의 왕들이 자기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들을 어깨에 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사를 어깨에 매었다는 것은 이 땅을 통치한다는 뜻인데 그런 통치자가 아기로 이 땅에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름을 기묘자와 모사라고 별도로 말했는데 함께 붙여서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름들이 전부 형용사가 명사를 수식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묘한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강의 왕 모두 하나님을 뜻합니다. 요컨대 언젠가 하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전능하지도, 영존하지도, 완전한 평강을 베풀 수 없습니다.
아기가 행할 사역과 그 열매
그 아기가 행할 일은 인간에게 지어진 멍에, 채찍, 막대기를 다 꺾는 것입니다.(4절) 이 셋은 다 노예를 다스리는 도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였으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현실적인 구원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7절의 예언대로 현실의 다윗 왕국은 결코 영원하지 않았기에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군인의 신발과 갑옷을 불에 태운다는 것도(5절) 단순히 대적에 대한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쟁 도구와 장비를 불 태운 것으로 이 땅에 전쟁이 없어지는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마지막 날의 통치를 뜻합니다. 그래서 장차 오실 아이가 전 인류의 구세주이자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사역한 결과를 3절에서 흑암에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빛이 비치어 그 삶이 윤택하게 되고 즐거워하게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옛적에 멸시 당하던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가 거주하는 땅과 갈릴리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1절) 일차적으로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가 그곳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고 또 사역의 중심지로 삼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지역은 이스라엘의 북부 변방의 국경지역입니다. 사사시대 이후로 북쪽 강대국의 침략을 계속해서 받았던 곳입니다. 또 이스라엘 중에서도 예컨대 나사렛처럼 멸시 천대받던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그런 곳이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이방족속과 접경한 지역이라 이방 문화 관습의 색채가 짙습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에는 데가볼리라고 헬라 도시 열개가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메시아가 오면 이방인들도 그 구원의 은혜 안에 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본문의 예언들은 예수님의 공사역을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복음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애완견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주 노동자들
선지자가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첫째는 정반대 상황을 대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하나님, 아버지, 왕에다 대고 비교합니다. 그 사역도 죄의 노예에서 구원을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되고 영원한 평화까지 준다고 합니다. 그 결과도 멸시 받아 흑암 속에서 죽음과 방불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빛을 받아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최악의 자리에서 최고의 위치로 단번에 완전하게 바뀝니다.
본문의 갈릴리는 유대사회에서 소외되고 멸시 받은 자를 상징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 당시에는 인간이 만든 형식적인 율법의 규정을 위반한다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정죄 심판했습니다. 창녀 세리 불구자 등은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대국인 앗시리아에게 정복 당해 어쩔 수 없이 혼혈이 된 사마리아인은 동족임에도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모세 오경도 모르고 할례를 받지 않은 야만인이라고 비하하고 식사 교제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유대인들만 탓할 수 없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천한 일만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주류로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죄송하지만 온전한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실상이지 않습니까? 너희 나라에 있었더라면 굶어 죽을 판국이지만 한국에 와서 그나마 먹고 자고 입는 것을 해결한 것만도 고맙게 여기라는 투입니다.
지금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그들을 애완동물 취급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황소는 농사 일을 도맡아야 하니까 주인이 힘을 잘 쓰게 먹고 자는 것을 풍성하게 해결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에도 애굽이 가끔 고기와 과일을 배불리 먹게 해주었습니다.
이주 노동자에 대해서 겉으로는 자유와 인권을 논하며 평등하게 대우한다면서도 그 마음으로는 애완견에 베푸는 사랑 정도도 단 한 번 베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동족을 상종조차 않는 것은 애굽이 노예인 이스라엘을 대하는 것과도 더 천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작금 한국과 미국 사회에는 불신 분노 저주가 팽배해 있습니다. 서로 간에 아무도 사랑은커녕 신뢰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물 보호 차원을 넘어서 애완견을 자기 인생의 반려자로 삼아 사랑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신앙공동체로 모여 서로 진심과 사랑으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감사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이나 바벨론에서 구출하는 것도 이스라엘의 자력으로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그들을 영적인 노예 상태에서 건져내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리라.
이사야 선지자가 둘째이자 더 중요하게 강조하는 측면은 본문의 결론 격인 7절 끝부분에 나옵니다. 메시아가 아기로 와서 이루실 그 모든 일의 배경에 “하나님의 열심”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의 간절한 열정이 없었다면 인간 구원은 불가능했고 아무 소망 없이 여전히 흑암 속에서 죽음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조차 이방인은 물론 동족까지 멸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먹고 사는 것을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서로 남들 앞에서 도덕적 종교적 자존심과 우월감을 세우려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소명을 주시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는커녕 정반대로 단순히 미워하는 것도 넘어 최악으로 정죄하고 심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럴진대 다른 이방 족속들의 죄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인간들의 추하고 추한 죄악상을 덮어서 바로 잡고도 남으려면 하나님의 긍휼이 넘치고도 넘쳐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열심이라는 것이 그분의 구원의 근거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이 은혜를 도무지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인간을 죄에 빠트린 원흉인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하나님은 예언했습니다.(창3:15) 그 후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과 그 약속을 확장하며 재확인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피를 흘리게 하면서까지 그 약속을 상기시키며 죄에서 돌이키라고 경고하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당신께서 직접 개입하여 그들이 벼랑에 떨어져 절망에 빠질 때마다 온갖 이적으로 구출해주었습니다.
그분의 열심이 가장 열심다운 모습은 이사야서 53장에 드러납니다. 수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아가 찔리고 상하고 경계함을 받고 채찍에 맞아도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오직 인간의 허물과 죄악을 씻어서 평화를 주고 나음을 입게 하려는 목적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가 되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말합니다.(빌2:6-8)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희를 얼마나 끝까지 완전히 사랑하는지 내 몸을 통해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너희에게 참 생명을 주고 또 풍성히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정말로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열심이 차고도 넘칠뿐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에서 창세전부터 말씀이신 예수가 삼위 하나님으로서 함께 계셨다고 선포합니다. 아기로 이 땅에 오실 계획은 이미 창조 전부터 세워져 있었고 그 뜻을 아담과 이브에게 처음으로 계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성경적으로는 약 일만 년, 세상의 과학으로는 수십억 년 동안 당신의 열심은 줄어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약 사백 년간 침묵하셨지만 새벽이 오기 전에 가장 캄캄한 법입니다. 그래야만 참 빛이 오면 그 빛이 얼마나 귀한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서 흑암과 사망이 있는 곳에 큰 빛이 비칠것이라고 본문 2절이 선언한 것입니다.
인간의 열정은 어떤 모습인가?
그런데 그 하나님의 큰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인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에 대응하는 인간의 열정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습니까? 기껏해야 베드로의 수준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좋게 말해서 인간적인 의협심으로, 정확히 말해 영적으로 어리석은 객기로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용감히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 목에 칼이 들이닥치자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선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오직 베드로 한 명만이 겨우 그렇게밖에 행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빌라도, 헤롯, 유대 대제사장 등 당시에 최고 권력자들이자 어쨌든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똑똑하고 의롭다 할 수 있는 자들임에도 자기들 돈을 지켜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어제의 적들이 힘을 합쳤습니다. 아무 죄도 없고 역사상 최고의 의인이며 심지어 그들 스스로도 메시아일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하고 두려워하여 개인적으로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누고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눈밖에 났다가는 현실의 삶이 각박해지고 핍박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부화뇌동했습니다. 그들도 실은 예수님에게 로마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다른 말로 정확히 말해 돈을 벌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 당했습니다. 대신에 주님이 자꾸 죄에서 회개하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열광적으로 따르다가 거꾸로 저주하며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매달라고 다같이 떼창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모두가 사탄의 노예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봐도 심판 받아 마땅했습니다. 심판하지 않고 그냥 버려두어도 되는데 주님은 오히려 그들과 일부러 논쟁을 주도했습니다. 그들의 율법을 문제 삼고 특별히 유대인들이 죽도록 싫어하는 일인 안식일 규정 어기는 일을 예사로 행했습니다.
주님의 공사역을 살피면 주님 쪽에서 유대인들에게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 같지 않습니까? 자꾸만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십자가로 몰아가도록 유도했습니다. 그것도 열정적으로 그렇게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위대한 도덕 스승도 경건한 종교 창시자가 아닙니다. 사탄의 핑계를 역이용 하여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건져 내신 하나님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모자라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대적들을 두고 저들이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에게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까지 기도했습니다. 이런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심은 세상의 어떤 종교의 신에도 없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참 하나님만의 참 열심입니다.
쉽지 않은 인생길
모든 사람이 인생이 결코 녹녹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진행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고난과 질병과 다툼과 분노와 슬픔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영원한 구원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구도의 결론은 항상 남들보다 착한 자는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상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착한 자만 구원 받으면 여전히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모든 세대의 인간 사회에선 온갖 형식으로 서로를 비토하는 그룹들이 존재합니다. 구조적으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소외되고 비참한 자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에게 빛을 비출 생각은 않습니다. 그냥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먹고 마시고 자는 것 정도만 마련해주려 합니다.
사회보장 제도는 인간사회가 반드시 최선을 다하고 최대한 보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계로 엄밀히 따지면 소외된 인간을 애완견보다 못하게 대우하는 차원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의 자력으로는 이 땅에서도 유토피아는 절대 실현하지 못하므로 죽은 후에 구원은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근본 이유는 인간이 죄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모두가 나는 남보다 더 선하다는 우월감과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선함과 의로움이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됩니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며 성경만이 유일하게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팩폭(fact 폭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열심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구원은커녕 선해질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 사회의 윤리 사상 종교로 실천하고 포장해도 인간의 열심은 돈을 향하도록 이미 세팅(settng)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탄의 열심을 인간 스스로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자만이 참 생명을 받아 그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출생 전부터 선택하여 각자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에서 수많은 고난과 절망을 거치게 했다가 기어이 예수 십자가의 사랑 앞에 무릎 꿇게끔 그분이 만드십니다. 지금도 그런 열심으로 신자의 인생에 큰 빛을 비춰 당신의 평화로 인도하는 중입니다.
종교란 그래서 인간이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붙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 신앙은 생명으로 이미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과 영광 가운데 들어와 그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과 삶에서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 기독교 신앙은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내 코가 석자인지라...
혹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을 교리적으로는 동의하는데 내 코가 석자인지라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단순히 믿음이 약하거나 고난이 극심해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이름 중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강의 왕, 셋에만 너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은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평화를 주신다고 해놓고 왜 형통하지도 않고 혼란과 고통만 자꾸 더하는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왜 아직도 이 고난을 없애주지 못하는지 의심과 불만이 자꾸 생깁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인 기묘한 모사를 잘 모릅니다. 기묘(wonder)한 것의 알기 쉬운 예로 북극권의 겨울 밤 오로라를 들 수 있습니다. 오로라야말로 참으로 기묘합니다. 밤은 밤인데 어둡지 않고, 하늘에 빛이 없어야 하는데 낮보다 더 아름다운 광채가 신기한 모양으로 춤을 춥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신의 유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엄청난 신적인 기적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메시아가 확실해 보이는데도 막상 전혀 반항과 변명은커녕 말씀 한마디 않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꼭대기로 하늘에서 강림하실 줄 알았는데 베들레헴 말 구유에서 비천한 인간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로마를 물리쳐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줄 기대했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고 높기 때문입니다.(사55:8,9) 십자가에 죽으셔서 사탄에게 패배한 것 같은데 삼일 만에 부활하여 도리어 완전히 승리하시어 창세기 3:15의 그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기묘하신 모사란 쉽게 말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나 인간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과는 상충을 하지 않은채 그것들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아우르는 광대하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당신의 영광과는 가장 거리가 멀고 아예 불가능할 것 같은 갈릴리 해변 길에 더 큰 사랑을 베푸셨기에 기묘한 것입니다.
기묘하신 주님을 실감하려면?
실은 우리도 기묘하신 모사이신 주님을 평소에 수시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정말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기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겸손히 헌신하면 또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결과는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만큼 엄청난 은혜로 나타나는 일을 겪습니다.
그 반대로 고난 위에 고난이 겹치고 너무 슬퍼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기도할 힘마저 없을 때에 진정으로 자기의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그분께 항복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동안의 모든 문제가 정말 어이없게도 간단하고도 쉽게 한 번에 완벽하게 해결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우리의 바람과 반대가 아니라 우리보다 다르고 높다는 사실을 잊고 있거나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일이 풀려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전능성마저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묘하시다는 것은 한마디로 신자로선 알듯 모를듯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그분의 역사임이 밝혀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한 것 같은데 나중에 그분의 역사가 아님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틀림없이 없는 것 같은데 반드시 계시고, 반대로 그분이 있는 것 같은데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붙들려는 열심에 비례하여 보응해주지 않는다고 신자들이 항상 불만을 갖는데 바로 그것이 아직도 종교에 붙들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참 생명 안에 들어와 있지 않거나 참 생명을 소지하고 있음에도 이전의 종교적인 습성 때문에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시기에 필연적으로 기묘한 모습으로 역사합니다. 그런 기묘한 역사의 근거는 오직 당신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열심입니다.
그분의 열심은 이 땅에 하나님이 아기 예수로 오신 베들레헴 구유에서부터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마굿간 밖 하늘에선 천군천사가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 땅에는 평화라고 찬양했으며 또 그 광경을 목격한 목동들에겐 틀림없이 하늘에 오로라 같은 신비한 모습이 연출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또 그 아기 예수가 나중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써 완성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기묘한지 아는 자만이 그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오로라가 분명 신적인 신기한 사건이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십자가 예수는 끝까지 거부하는 까닭은 여전히 나는 선하다고 자신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만용은 예수 십자가 은혜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리석은 객기이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대신에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과 상황들이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영광 가운데로 이끌어주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분만의 기묘한 열심이 나를 붙들고 있기에 모든 것을 신뢰하고 그분께 완전히 의탁해야 합니다. 그분의 기묘란 쉽게 말해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 못하는 것이 아니며 그분의 생각과 길이 다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기묘가 언젠가 큰 빛으로 비칠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12/23/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