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1:10-15) 하나님의 숙명과 신자의 숙명
구약성경강해 (18) / 민수기강해 (8)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0-15)
백성이나 지도자나.
이스라엘에 섞여 사는 이방 족속들이 만나에 질려서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럼 제사장나라의 소명을 지닌 이스라엘이 만류하고 믿음을 바로 가르쳤어야 하는데도 함께 여호와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그 일에 대한 모세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뻐하지 아니한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께 따진 내용은 수긍은 물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는 출애굽의 소명을 받은 이후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직통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가나안 진군의 총사령관이므로 백성들을 격려하여 평안을 찾도록 해주어야 함에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정도가 백성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가 불평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맡은 책임이 혼자서 감당하기에 너무 막중하다는 것입니다.(11,12절) 둘째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줄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입니다.(13절) 틀린 말은 아니고 타당한 불만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불만을 어떻게 표출했습니까? 먼저 책임이 막중한 것이 주 은혜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를 괴롭힌 것이라고 합니다.(11절)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책임을 적게 맡거나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내가 이 백성을 베었느냐고 따집니다.(12절) 이스라엘이 내 새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이니까 하나님이 책임져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한 것입니다. 불경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하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했습니다.(11, 12절) 그냥 해 본 넋두리이거나, 일시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닙니다. 그 동안에 쌓였던 불만을 심각하게 따진 것입니다. 본문을 대하는 성경독자의 반응이야말로 “어찌하여 모세가 이런 지경이 되었지, 이렇게 믿음이 약했단 말이냐?”가 될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그 수많은 엄청난 기적을 직접 실현한 주인공입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모세가 선포해야만 하나님이 역사를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틀림없이 구름 기둥이 떠오르거나 멈추는 것을 모세가 판단하여서 행군 출발 혹은 멈춤의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성경 전체 아니 인류 역사상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신생아는 다 죽이라고 바로가 명령을 내렸지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살려주었고 바로의 궁정에서 고생 하나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게 했고 당시로선 최고의 지식까지 습득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생명의 은인인 하나님께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목사를 편애하는 하나님
거기다 모세가 자신의 불만을 해결할 방안으로 제시한 내용은 더욱 기가 찹니다. 자기를 죽여서 더 이상 고난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15절)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그러고 싶다고 합니다. 혼자 죽고 나면 나머지 백성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나아가 죽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 은혜라고 합니다. 정말로 망령된 요구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범죄 중에 가장 중대한 것은 생명을 빼앗는 살인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이 생명을 주관하십니다. 나아가 생명을 번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자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모세에게 그나마 신앙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것은 자살은 할 수 없으니 하나님더러 대신 죽여달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잘못된 일이 생기면 그분께 대한 실망이 큽니다. 사랑이 깊을 수록 질투와 증오가 강해지는 것이 인간의 정서입니다. 그럼에도 모세의 현재의 위치와 지금껏 하나님과 교통해온 것들에 비추어보면 애굽에서 고기 먹었을 때가 그립다고 우는 백성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벌을 내리기는커녕 한마디 꾸중도 않으십니다. 반면에 백성들 중 주모자는 탐욕이라고 야단치고 죽음으로 심판했습니다. 또 16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70명의 장로를 동역자로 세워서 모세의 책임을 덜어주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지도자라고 특혜를 준것입니까? 편애를 한 것 아닙니까? 죄송하지만 최근 한국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사회적으로 성경적으로 큰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이 벌을 내리지 않고 교회가 더 성장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까?
이처럼 성경에나 오늘날 현실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불공평해 보일 때가 종종 있어서 곤혹스럽습니다. 신자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하고 앞으로의 신앙 생활에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모세가 비록 당신의 큰 일꾼이고 민족의 영웅이라 해도 엘리야처럼 성정이 우리와 동일하고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평생토록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은 자는 예수님만이 전무후무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자 완전하신 인간으로 항상 성령의 100% 충만한 인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의 오르고 내림에 따라 말과 행동도 수시로 오르고 내리락 하기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성경 인물의 믿음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우리의 믿음을 재점검해 봐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중한 직분을 맡은 자들이 죄를 짓고도 더 형통하는데도 하나님은 왜 당장 벌을 주지 않지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여전히 불신자 시절의 행위구원이 옳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형통하는 자들이 잘못이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그들에게 벌을 주십니다. 일생 편하게 살다 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겐 지옥의 형벌이라도 내리십니다.
반면에 그런 의심을 갖는 배경을 엄격히 따지면 나는 그들보다 훨씬 더 선하다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지 왜 그들이 받느냐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 내지 원망과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첫째 의미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거듭나 구원 받았다는 첫째 의미는 히브리서 4:12가 말하는바 그대로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드러난 진리가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한 죄인의 심령을 찔러 쪼갠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상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 실상이 완전히 발가벗겨져 드러나는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라는 존재의 실체를 정확히 깨달은 데에서 믿음이 시발됩니다. 그분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회개하기 이전에 더 근본적인 각성이 따릅니다. 인간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절감한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신이 아니며 신이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사 같은 영적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두 팔은 하늘로 향하고, 두 발은 땅을 딛고서 직립해 사는 특이한 동물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말은 네 다리가 다 땅에 붙어있는 짐승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 팔의 역할은 하늘을 향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 간구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행해야 할 첫째 일입니다. 두 발은 항상 땅 즉, 이 세상에 두어야 합니다. 시공간으로 제한 받는 물질계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이 한 몸에 함께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별개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서로 영향을 받습니다. 나아가 하늘에는 허공 뿐이고 실체가 없는 반면에 땅에는 당장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 즉, 세상이 항상 먼저 인간을 좌지우지 하기 마련입니다. 두 팔이 두 발에 먼저 영향을 받아서 발이 가자는 대로 팔이 끌려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만나를 아침 저녁으로 먹고 있고 아침에 구름 기둥이 뜨면 진군하다가 저녁에 구름이 멈추면 행군도 중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 즉, 두 팔을 하늘로 올린 것은 잠시 그 때뿐입니다. 그 후로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척박한 광야 뿐이라 그 은혜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대신에 땅에만 하루 종일 신경이 집중됩니다, 뜨거운 태양과 먹을 것 하나 없는 여건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합니다.
거기다 백성의 울음소리가 더해졌습니다. 모세가 백성이 우는 것을 보자 기뻐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감정에 다운이 왔고 그래서 믿음도 다운 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과 지금까지 교제했고 기적을 체험한 것들은 그의 기억에서 순간적으로 싸그리 지어진 것입니다.
신자가 주일 하루 하나님 은혜에 충만했다가 하루 이틀만 지나면 세상에 섞여서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다가 다시 주일이 오면 회개하기를 반복합니다. 이는 실은 지극히 인간 아니 신자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종교적인 의무감에 따라 형식적으로 회개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 대신 정말로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여 심령이 너무 가난하고 변덕이 심하니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절실합니다라는 진실된 고백이 따랐다면 오히려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상당한 수준의 믿음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히11:1)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가시적인 현상으로서 죄로 타락한 인간이 조성한 것이라 그 결과도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는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심지어 세상을 위한 큰 업적을 쌓아도 갈급 허무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일의 배후에는 땅과 하늘의 진짜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권능이 비가시적으로 거룩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미래의 소망은 보이지 않지만 전지전능하신 그분께 완전히 믿음으로 의탁하라는 것입니다. 또 믿음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의 증거라고 했는데 그것들 중에는 이미 지나간 은혜도 포함됩니다. 아침에 먹은 만나와 아침 저녁으로 따라 나서는 구름 기둥의 은혜는 이미 지나간 것이라 보이지 않기에 금방 잊어버립니다.
이처럼 모세를 포함하여 인간은 어느 누구나 미래를 예측은커녕 제대로 분별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선 제일 먼저 염려부터 생깁니다. 영적 분별력이 너무 미약한 우리로선 최소한 과거에 받았던 축복을 헤아려 봐야 영적 시력을 겨우 교정 회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두 팔이 땅을 향해 자꾸만 처지는 것을 속히 하늘을 향해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실력입니다. 주일마다 회개하는 신자는 그래도 며칠 만에 손을 하늘로 올릴 수 있기에 좋은 믿음인 셈입니다.
우리 눈에는 모세가 믿음의 영웅으로 보이지만 착시이자 근시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단지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대면하여 그에게 소명을 심어준 이래 모세가 그 동안 길게는 2년 정도 열심히 충성 헌신하여 지칠 때도 되었다는 것을 그분은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모세가 성격이 급하고 감정조절이 잘 안 되는 다혈질이라는 것도 감안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단순하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울자 함께 우는 모습을 가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에게 “저런 배은망덕하고 완악하여 목이 곧은 백성을 하나님 대신에 제가 요절을 낼까요?”라고 일러바치며 나섰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오히려 모세부터 당신께서 요절을 내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 아예 그런 인성이라면 당신의 종으로 택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단계 쯤에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큰 일을 많이 했는데다 나이로만 따져도 백성을 얼마든지 야단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의 불평처럼 쏟아내었습니다. 마치 어린 동생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부모에게 이런 저런 불평을 하자 장남이 자기 책임하에 자기 불평인양 부모에게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자체로 모세는 충분히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죽고 싶었던 모세
문제는 모세가 지금 당장 자기를 죽여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시내 산 금송아지 배역 사건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고 진노하자 자기를 죽이는 대신에 백성들은 용서해달라고 그럼 출애굽 자체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간구한 것과는 다른 심정입니다. 지금은 자신을 죽여 자기 고통을 없애달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백성과 상관 없는 개인적인 요구입니다.
“정말로 괴롭고 지쳐서 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난 은혜와 권능이 대단하고 많았어도 내 현재의 감정을 내 스스로 추스릴 수도 없습니다. 도무지 이 일을 혼자선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너무 힘들어 죽고 싶습니다. 더 괴로운 일은 이런 어려움에 아무도 동참해주지 않고 심지어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저 백성들이 계속해서 징징 우는 소리가 하나님 들리지 않습니까? 저 혼자뿐으로 너무 외로우니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모세의 진정한 고백이었습니다.
“저들이 내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가나안 땅으로 진군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자 책임이지 않습니까?"라고 따진 것도 모세의 진심이었습니다. 요컨대 이 지경까지 된 것에는 하나님의 잘못도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반은 내가 믿음이 미약한 탓이요, 반은 하나님 탓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두 팔은 하늘로, 두 발은 땅으로 향하게끔 창조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당신께 기도하여 당신의 뜻을 먼저 알아서 그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는 이 순서를 거꾸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땅에 보이는 것들에 먼저 영향을 받고서 그에 따라 생각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거나 따지는 기도만 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도 지금 일시적이나마 창조의 원리와 정반대로 믿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의, 아니 신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신자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그렇게 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최고의 불효와 최고의 사랑
자식이 부모에게 해선 안 되는 최고의 불효가 무엇입니까?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교도소를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말썽만 피우는 아들이 죽어도 부모의 가슴은 무너집니다. 더 안타깝게 여깁니다. 한 번도 제대로 인간답게 살아보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연기처럼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진 너무나 헛된 인생인지라 더더욱 불쌍해집니다.
물론 사랑했던 자녀가 먼저 죽으면 더 가슴이 찢어질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자식이 먼저 죽어도 똑 같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기대가 커서 실망도 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가 죽여달라고 할 때에 당신의 억장이 무너져내렸을 것 아닙니까?
자식이 먼저 죽을 때에 부모가 그렇게 애통해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식은 부모의 삶의 목적과 의미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자식이 원수처럼 미울 때 있어도 잠시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는 오직 자기가 낳은 자녀라는 한가지 이유뿐입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 없으며 자동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부모의 숙명입니다.
모세가 감정이 격해져서 이스라엘이 내 새끼가 아니라 하나님이 낳았으니 당신께서 책임지라고 대들은 것이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영적인 진리를 선언한 셈이 됩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포함한 이스라엘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이 바로 그 절대적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전혀 꾸중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지도자이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고 살펴본 대로 다른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모세도 당신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모세가 80이 넘은 노인이 아니라 여전히 재롱을 부리는 아기에 불과했습니다. 조금 힘들어 불평했어도 당신의 종이기 이전에 자식으로 사랑했습니다.
반면에 먼저 이스라엘을 선동하여 울게 만들었던 자들에겐, 아마도 탐욕에 가득 찼던 애굽인이나 이방인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임, 죽음의 심판을 내렸습니다. 나머지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단도 치지 않고 고기를 내려주셨던 이유도 오직 당신께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당신께서 택하신, 좀더 넓게는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숙명입니다. 스스로 자존하시어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을 일절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에게 기계적으로 어떤 운명이 미리 정해졌다는 의미의 숙명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도 않고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랑말고는 하실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당신의 사랑에만 기반을 둔다는 의미로 숙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특별히 조금만 괴로우면 아니 심심하기만 해도 하나님에게 불평과 원망이나 하는 인간의 숙명에 비교 대조하기 위한 의미로 그분의 숙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에겐 사랑 외에 공의라는 그와 대등한 속성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이 두 가지 대표되는 속성이 완벽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실현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하지 않고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하는 자, 다른 말로 자기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전혀 없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 자기이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자기 의로움으로 천국 가야 마땅하다고 큰소리치는 자는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 반대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소원하며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아들인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그 구원 이후로는 오직 사랑만으로 역사하십니다. 혹시라도 지금도 고난이 겹쳐서 괴롭기만 한데 어떻게 그분의 사랑만 역사하는지 의아합니까? 그런 의심을 갖는다는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진토같은 존재인지 반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부모로서 자식을 때로는 야단칩니다. 그것도 자식이 눈물이 쏙빠질 정도로 냉정하게 체벌을 가하며 꾸중해도 실은 오직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인간 부모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믿음의 출발과 본질
다시 강조하지만 믿음의 출발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절감하는 데서부터입니다. 거기다 지금도 죄의 본성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신의 실상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이땅에 먼저 오염될 가능성이 24시간 지속될 것을 잘 알고 그에 따라 영적으로 잘 분별하여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인정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는 매사에 완벽하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에게 오류, 잘못, 실수, 착각, 불공평, 불합리, 부족이 단 한치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영광을 위하는 일들이며 100% 완벽한 선으로 충만합니다.
어리석은 우리가 아직 구체적으로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어리석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나의 이 어리석고 무지한 영혼의 눈을 열어서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여서 누리게 해주시옵소서.”라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간구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한 뜻도 동일합니다. 어떤 큰 계획을 세워서 뜨거운 믿음으로 그 계획이 달성될 때까지 떼쓰듯이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두 발을 땅에 딛고 살기에 자꾸만 두 팔이 아래로 쳐질 수 있으니까 그 팔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쉬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의 더 중요한 숙명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그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은혜로운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과 혈연 관계 즉, 진짜로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려고 합니다. 주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영혼을 보면 안타깝고 불쌍해서 복음을 전하려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오해와 음해를 당하며 때로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의 성도들로부터도 시기 질투를 받습니다.
수시로 닥치는 고난으로 내 코가 석자인지라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뜨거운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인내하다 지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방이 완전히 캄캄하게 막혀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로 두 팔을 들기 보다는 자꾸만 땅의 두 발에 이끌려 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모든 신자들이 끝까지 붙드는 한 가지 절대적인 영적 진리는 있습니다. 다시는 하나님이 부재하는 세상으로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우리 눈에는 형통하고 안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안계시는 불신 세상의 결말은 실패를 넘어서 죽음뿐임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여 때로는 그 절대적 진리마저 잊을 때가 있지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대신 간구해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로 다시 일깨워주셔서 두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리도록 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숙명입니다. 또 바로 그점 때문에, 말하자면 주일마다 동일한 회개를 반복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것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괴로운 점은 또 하나 남았습니다. 모세처럼 혼자뿐이라는 의식입니다. 동족마저 하나님의 일에 동참은커녕 오히려 원망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사방으로 고립무원의 외로움을 철저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자들을 숨겨두었습니다. 심지어 신자가 전혀 모르는 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의 기도와 후원이 있습니다. 모세에게 지금 70명의 장로를 붙여주었고 동일한 고통을 겪은 엘리야에게 칠천 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숨겨두셨듯이 말입니다.
신자가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신자로 함께 모이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로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의 마지막 숙명입니다. 종교적 의무를 부과하려고 볼러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기쁨을 주시려면 세상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27/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