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4:39-45) 신자를 희망고문하는 목회자

구약성경강해 (32) / 민수기강해 (22)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12)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 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말렉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민14:39-45)

 

하나님의 엄청난 실패?

 

가데스 바네야의 이스라엘의 반역 사건을 접하는 오늘날의 신자로선 홍해까지 갈랐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가 언뜻 허망하게 끝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엄청난 실패처럼 여겨집니다. 이백만 백성 중에 마지막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구원 받은 자는 모세, 아론, 여호수아, 갈렙과 그 가족들뿐입니다. 성경 기록상 단순 수치로만 따지면 육십만 가정에 네 가정입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개인의 경우도 너무 억울해 보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에 정말로 목숨을 걸며 충성했고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적 역할에도 눈물겹도록 헌신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는 마지막 순간에 백성들의 완악한 죄 때문에 또 광야 40년을 방황해야만 합니다. 거기다 백성들이 광야 방황의 벌을 받는 중에도 계속 원망을 쏟아 내었고 모세는 참다 참다가 한 번 실수한 바람에 가나안 땅을 먼발치서 바라만 보다가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일생 120년이 참으로 허망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 사건을 마지막이자 열두 번째로 살펴보려는 이유는 이런 미심쩍음과 석연찮음을 해소해보고자 하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가데스바네야 거역 사건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려 보자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이 모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신명기 18:15-19에선 모세 같은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모세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몰론 예수님이 모세를 닮은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주님의 모습을 미리 많이 드러냈다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굳건한 믿음을 비롯해 여러 인간적 장점이 많았어도 여러모로 연약하고 죄 많은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감히 성자 하나님과 비교되어진다는 것 자체는 엄청난 영광입니다. 성경의 그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 중에 그가 유일합니다.

 

그가 율법을 수여해서 백성에게 가르쳤고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다시 풀어서 가르쳤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처럼 모세도 엄청난 이적들을 많이 일으켰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성경이 모세가 예수님을 닮았다고 설명한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닮은 모세

 

우선 오늘 본문 39절에도 그 대답에 관한 힌트가 있습니다.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주 당연한 진술이라고 예사로 여기면 안 됩니다. 모세가 전한 말을 백성은 백 프로 그대로 믿고 그에 따라 반응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이후부터 지금 민수기 14장에 이르도록, 아니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죽었을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말대로 다 순종한 것은 아니지만 다 믿어주었습니다. 맨 처음 출애굽 시키려고 바로와 담판하자 바로가 노역을 배로 부가했을 때에 한번 빼고는 어쨌든 모세가 말한 내용은 순전히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지금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가나안과 전투를 시작한 것도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형벌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광야 생활을 사십 년이나 하는 그분의 형벌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던지 간에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있었고 또 그대로 한 치의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심지어 백성들이 싫어하고 거역할 것을 미리 짐작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전혀 아랑곳 않고 진리를 진리대로만 선포했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았습니다. 사역 초기에 많은 치유와 이적을 일으켰을 때는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그러다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되지 않고 (죄송하지만) 계속 엉뚱한 짓만 하니까 열렬한 호응이 극도의 저주로 바뀌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백성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오든, 아니 결국에는 당신을 십자가에 매어달기까지 거역할 것을 미리 아시고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한 번도 굽어지게 전한 적이 없습니다.

 

모세 같은 선지자가 메시아로 올 것이라는 예언에서도 이적을 많이 베푸는 자라는 설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명기 18:18은 오실 그 선지자는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출애굽 소명으로 보낼 때도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2)고 말했습니다. 비록 상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그 입을 주장하는데 어떻게 왜곡된 진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5:19에서 예수님이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신명기에서 예언했던 그 선지자, 그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모세는 인간 선지자인지라 하나님이 직접 대면하여 인간의 말로 인간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먼저 말씀해주어야만 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로 당신 안에 완전한 신성을 갖고 계셔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직접 보신다고 설명한 것만 다릅니다.

 

성경은 즉,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순전하게 전한다는 측면에서만 모세가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다른 선지자처럼 꿈으로나 이상으로 하지 않고 은밀한 말로도 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해주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민12:6-8)

 

그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백성들이 거역했던 순종했던 간에 모세가 하나님의 진리만 전했다면 과연 하나님과 모세의 실패입니까?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물론 당신의 종으로서 이만한 성공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데스 바네야 사건을 보면서 갖는 느낌이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의 종과 백성들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가 갖고 있는 시야 사이에, 그것도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래 하고도 너무나 큰 격차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를 닮은 목회자가 있는가?

 

모세의 경우를 오늘의 교회 상황에 대입해 보면 우리 믿음의 상태와 또 죄송하지만 목회자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말하는 대로 교인들이 그대로 따랐거나, 안 따르더라도 최소한 그 말이 진리라는 점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늘날 과연 그러합니까?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도 순전하게 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자기 이름을 하늘의 생명책에서 제거하더라도 교인들을 제발 구원해달라고 금식하며 매달리는 기도를 하는 그런 목사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무려 이백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에 공수표가 될지언정 말로도 위로하며 기분 맞춰주려는 마음이 모세에게 전혀 없었을까요? 어쨌든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게 가나안 아말렉 족속을 하나님이 초자연적 기적으로 먼저 멸절시켜주면 안 되겠느냐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그냥 못 이긴 척하며 백성들의 편에 설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맡긴 소명에선 일절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백성 전부가 새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려 할 때에 죽을 것을 각오하고 그 앞에 엎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죽이려 드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만 회막 위에서 보여주었습니다.(민14:10절) 그리고 이어지는 11절 서두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이유와 내용은 모세를 따로 불러 그에게만 이르셨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반드시 백성들보다 먼저 자기만 받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신 그분의 진리여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라는 뜻은 아니며 성령이 강림 내주한 이후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영감 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않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깊이 묵상 연구하면 반드시 목회자마다 각기 다른 절대적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받은 그대로 전하면 모세와 바울의 경우에 보듯이 말이 어눌해도 성령이 그 설교를 듣는 회중의 영혼에 역사하여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침례교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챨스 스펄전이 십대 청소년기에 회심하게 된 유명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에 폭설이 내려서 출석하던 교회를 가지 못해 근처의 작은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한 내용 없이 계속해서 “오직 예수만 바라보라! 예수만 믿으라! 당신의 죄를 전부 그에게 맡겨라!‘는 너무나 단순한 복음을 확신에 차서 반복해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간단한 메시지에 그때까지 자신의 죄가 씻어졌다는 확신이 없어 깊은 갈등에 빠져 있던 소년 스펄전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말할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처음으로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주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고서 거듭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를 십대 후반부터 곧바로 성인 예배의 강단에 세워서 현대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 이름 없는 목사가 예수를 보라고 설교할 때에 그 강단 바로 옆에 틀림없이 주님이 함께 서계셨을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권능이 그 목회자와 스펄전에 비둘기 같은 성령으로 넘치도록 함께 임했던 것입니다.

 

모세처럼 선지자는 죽었다 살아나야 한다.

 

문제는 자기가 깨달은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확신한다고 해서 다 모세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목회자가 그런 확신 없이, 혹은 거짓이라 의심하면서 강단에 설 수는 없습니다. 이단 교파나 목회로 재물을 취득하려는 삯군 목자가 아닌 다음에는 말입니다.

 

모세가 예수를 닮을 수 있었던 더 중요한 이유는 그는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그는 바로의 궁정에서 사십 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사십 년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자로 또 미디안 제사장의 데릴사위 격으로 살았으므로 현실 삶에서 궁핍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당시로 따지면 상류층의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80년이 형통하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는 전혀 없습니다. 조국과 부모와 형제 친척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선조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거기다 모국어도 잃었습니다. 말이 어눌했던 것이 성격이 급한 탓도 있지만 정말로 히브리말 실력이 젖을 뗄 때까지 생모에게서 배운 초등학생 수준이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그래서 통역보조로 아론을 붙여준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만 따지면 그만큼 팔자 편한(?) 인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면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생명을 건졌고 원수의 심장부에서 자라게 해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동족을 위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라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동족이 억울하게 애굽 관원에게 학대 받는 것을 보고 의분을 발휘에 그 자리에서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은 이후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 전혀 없었습니다. 팔십 년을 그분의 인도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했으나 일절 반응이 없어서 수십 년을, 아니 평생토록 의심 원망 불평을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경 인물 중에 모세만큼 하나님께 원망을 많이 쏟은 자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출애굽 소명 받기 전의 그의 80년의 인생은 완전히 실패였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강제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으나 그 팔십 년의 후반에 갈수록 틀림없이 스스로 그것들을 하나씩 다 지워나가는 작업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움 미련 아쉬움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대신에 하나님 그분이 없이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철두철미 체험으로 확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더러 사십 년간 광야를 방황하다 죽는 심판을 내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정미하고 신비하지 않습니까? 바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허비했던 기간과 동일합니다.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이 부재한 것은 도무지 견딜 수 없었음을 모세가 절감했던 바로 그 기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받을 광야 심판을 이미 겪어본 셈입니다. 그래서 백성들더러 “너희가 광야 생활이 너무 싫어서 하나님을 포기하려 드는데 너무나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만은 절대 거역하지 말라”고 적극 만류한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런 외침을 전혀 귀에 담지 않고 또다시 광야에서 불편하게 사느니 하나님 없는 애굽이나 가나안이 더 낫다고 결심했습니다.

 

희망 고문만 하는 목회자들

 

오늘날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라도 모세 같은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만이 받은 절대적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자기 삶에서 체험한다면 말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자기만 받은 은혜와 진리가 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해야 합니다. 단순히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얼버무려선 안 됩니다.

 

모세 같은 선지자가 올 때에, 아니 모든 시대의 모든 선지자가 참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을 신명기 18:22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말한 일에 증험과 성취함이 있는지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초자연적 계시를 받아서 그대로 실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목사가 전한 진리가 자신의 체험적 진리여야 하고 또 가르치는 계명은 본인부터 실천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십 일 작정 기도하면 무슨 기도라도 응답되고 솔로몬처럼 새벽 제단 천일을 쌓으면(이 자체도 틀린 해석이지만) 기도한 것 외에 더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면 목사도 그대로 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야 합니다.

 

흔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믿고 비전을 크게 잡아서 응답될 것을 미리 확신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면 그대로 된다고 합니다. 미국 최대 교회를 세운 목사가 주로 가르치는 내용인데 비성경적이라도 어쨌든 그분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큰 체육관에서 입장료를 받고 그런 집회를 하는데도 체육관이 터져 나갑니다. 참석자들 모두가 그 목사처럼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두가 그 목사처럼 호사스럽게 살 수 있으리라 기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본인의 설교대로 성공했으니 그대로 따라하면 일부라도 달성되겠지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모입니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세상에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주고 복권을 사는 것입니다. 수천만 명 중에 한 명이라도 어쨌든 당첨되고 비슷한 번호가 걸려도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으니 혹시나 하고 사지만 매번 역시나 꽝이 됩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희망 고문한다고 말합니다.

 

아주 죄송하지만 작금 한국교회에서 전해지는 메시지가 바로 이런 희망고문 같은 수준입니다. 예를 들면 이곳 이민 교회에선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고 목사에게 충성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합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면 현재의 고난이 해결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생활이 윤택해지거나 기도가 응답이 되기는커녕 문제만 더 겹칩니다. 신자는 주일 내내 교회 중심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부대끼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거역한 원인도 대체로 그들의 믿음이 약하고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금방 잊어버린 탓이라고만 가르칩니다. 거역의 원인이 믿음의 부족뿐이니까 신자들더러도 믿음을 키워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형벌을 면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너무나 도식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치웁니다.

 

그런 가르침이 틀렸다거나 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데스 바네야 사건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만 하는 교훈임에 틀림없으나 몸이 약한 자에게 운동하면 튼튼해진다는 말을 한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운동을 싫어하거나, 태생적으로 운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체질과 건강 상태에 따라 사람마다 운동법이 달라야 합니다.

 

그런 식의 구체적인 가르침은 없이 새벽 제단 열심히 쌓고 교회에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원론적으로는 틀린 내용 없으며 그렇게 되는 사람도 간혹 있는 것 같으니까 신자들이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복권 걸리는 확률이 아무리 낮아도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충성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목사에게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희망고문 당하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밤새 슬피 울며 궁리해서 내린 결론은 하나님을 포기하더라도 광야 생활의 무미건조함과 불편함은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하나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 그분과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하여서 처절하게 자신이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이 없어서입니다. 지금껏 이스라엘은 실제로 고생한 일이 없습니다. 노예 생활은 몇 번 말씀드린 대로 자존심만 죽이면 그만큼 편한 생활이 없고 사백 년이나 되었으니 자존심 자체가 거의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에도 먹고 마실 것 없어도 한 끼라도 굶은 적이 없습니다. 불평 원망하자 바로바로 하나님이 공급해주셨습니다. 세상의 화려한 장막에서 천 날 지내는 것보다 여호와의 전의 문지기로 하루 있는 것이 낫다는(시84:10) 인식이 그들에게 전혀 없습니다. 그저 자기들 삶만 편하게 해달라고 떼만 썼습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뿐이었지 그분과의 교제 동행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부터 가데스바네야까지의 이스라엘의 행보와 그에 대비한 하나님의 치리를 가만히 따져보십시오. 열 번이나 참아주었다고 진노했지만 사실은 그들의 불평을 정말로 형벌을 받을 자만 빼고는 다 들어주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본심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족들 모두 개죽음 당하기 싫다는 것이므로 실질적으로 그들 생각대로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이 하자는 대로 다 해준 셈입니다.

 

하나님이 열 번이 되도록 회복시키고 살려주고 간섭하실 때마다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해 보십시오. 그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음에는 안 그러겠지, 최소한 아주 조금은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제대로 언약 백성답게 피의 언약식을 통해 맹세한 대로 행하겠지 기다려 주고 또 기다려준 것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희망고문을 당한 것 아닙니까? 혹시라도 이번에는 제대로 회개하고 헌신 하려는가 목이 빼서 기다렸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실제로 육십만 가구 중에 네 가구만 제대로 믿음이 바로 섰으니 마치 복권 걸리는 확률처럼 되었지 않습니까?

 

불신자들은 물론 많은 신자들이 구약 시대에 예수님을 전혀 알 수 없었는데도 심판 받았으면 불공평한 것 아닌가 의심 내지 반발합니다. 불신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구약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신자들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누가 누구를 희망고문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데스 바네야 당시에 계셨어도 제대로 믿었겠습니까? 아니 성경이 완비된 지금도 예수님에 대해 아무리 알아듣게 설명해주어도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고 주도하시며 당신의 뜻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따라서 어떤 기록에서도 가장 먼저 그분이 어떤 분인지 또 인간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세밀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분의 거룩한 성품과 긍휼에 넘치는 통치를 조금씩 추적해 나가다 보면 그에 반해 인간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하며 완악한 존재인지도 철두철미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이 그 독자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하심과 그에 대비한 인간의 너무나 비참하고 가난함입니다. 이 둘은 모든 시대 모든 사건 모든 민족에게, 특별히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함께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이스라엘이 먼저 보고도 거역하는 초라함이 뒤를 따랐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희망고문을 당하면서 기다려주는데도 이스라엘은 단순히 싫고 귀찮고 지루하고 불편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여지없이 그분을 거역했다는 기록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로 인해 희망 고문을 어디까지 당했습니까? 그 절정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골고다 십자가 언덕 아닙니까? 처형 당일 날은 아무도 당신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마저 제 혼자 살아남으려고 당신을 부인하고 문 닫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스라엘의 새 세대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그 선조와의 언약을 기어이 당신께서 준행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당신께서 예비해 놓으신 제자들로 오순절 다락방에 모아 완전히 그 인생, 그 존재 자체를 새롭게 뒤집어엎고 새 이스라엘을 이 땅에 건설하셨습니다. 전 세계 인구가 당시 일 억이었다면 그중에 120명만이 남았습니다. 지금 육십만 가구에 네 가정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비굴하지만 편안한 생활을 택했습니다. 모세는 아무리 광야가 불편해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이 너무 생명보다 귀한 것을 자신의 죽은 것과 방불했던 80년의 삶을 통해 몸으로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행하는 목사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당신께서 지키십니다. 인간을 향한 통치 원리와 계획도 이미 성경에 다 계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을 통해서만 죄인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것으로만 주관 인도하십니다. 성경을 수백 수천 번을 읽어도 도무지 다른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너무나 큰 은혜요, 너무나 큰 사랑이요, 너무나 큰 긍휼입니다. 청개구리처럼 끝까지 요리저리 빠져나가려는 죄인들을 두고도 하나님은 끝까지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지금도 죄 많은 인간들이, 아니 신자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희망고문을 하는지 모릅니다.

 

가난한 자들의 코 묻은 돈을 빼앗는 것이 복권입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그런 자들만 주로 만나서 치유 위로 상담 회복 구원해주었습니다. 비단 옷 입은 부자들 관리들 스스로 착하다는 의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 고문을 당할 여지도 없고 아예 절망과 죽음 안에 있음을 아셨기에, 아니 당신께서 심판할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왔습니다.

 

목회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자기 몸으로 체험했다면, 정말로 죽었다 살아났다면 신자에게 희망 고문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십자가 원리를 따르지 않고 변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도 진리를 타협 변개하지 않고 오직 에수만 믿으라고, 예수만 바라보라고, 예수 앞에 엎드리라고, 예수의 죽음으로 대신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외쳐야 합니다.

 

신자가 한 명만 남아도 아니 다 떠나가는 한이 있어도 목소리에 힘이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교회 나오면 병도 낫고 사업도 형통한다는 식으로 희망고문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 아주 고상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희망고문이 아니라 사기이자 도적질입니다. 목사들이 예수님이나 본문의 여호와처럼 교인들로 인해 희망 고문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많은 목사들이 현재 완전히 거꾸로 신자들에게 희망 고문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야할 일반 신자들도 그들에게서 희망 고문을 다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예수님 앞에 엎드리겠지, 단 한명이라도 바로 예수를 알도록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헌신 충성하며 섬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항 하나가 빠졌습니다. 아무리 영성이 뛰어난 목사라도 자기가 전한 진리나 가르친 계명대로 순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부터도 죄인이고 단 한시도 예수님의 긍휼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겸손히 시인하며 성도와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합니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예수 십자가 구원이 말하는 참이자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이 진리를 매일매일 붙들고 살아갈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그들 속에 살아 역사합니다. 성도와 목회자가 함께 거룩하게 조금씩이라도 자라갈 수 있으며 그들 사이에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진리를 모세에게 계시했고 모세는 한 치의 수정 없이 전했습니다. 하나님에겐 단 한 명이라도 당신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충성된 종이 있으면 성공입니다. 모세도 느보산에서 운명할 때에 기록은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 자기만큼 성공한 인생이 없었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와 성도들도 모세 같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진리로 살고 죽는다면, 쉽게 말해 성도와 불신자에게 희망 고문을 주지 말고 대신에 그들로부터 희망고문을 당하면서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7/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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