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할 때만 기도하는 이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정말 많은 신자들이 급한 일이 생겨야만 겨우 기도합니다. 그래도 개인적인 기도라고는 전혀 하지 않다가 주일 예배 때 대표기도를 듣기만 하는 교인들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급한 일만 기도하는 신자들은 스스로도 “과연 내가 이래서 신자인가? 나는 왜 이렇게 기도가 안 될까? 믿음이 너무나 연약해”라고 실토하듯이 믿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맛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자라는 여부는 둘 째 치고 어떤 인생이든 급하고 중한 일들은 계속 겹치기 마련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여 한 가지 일이 해결되어봐야 얼마 안 되어 그보다 더 큰일이 생깁니다. 자연히 큰 일이 생길 때만 새벽기도에 간헐적으로 나갑니다. 자기 믿음이 삶을 주관하지 못하고 삶에 믿음이 따라가기 바쁩니다. 요동치는 환경과 사건에 따라 그때그때 대처하는 인스턴트 믿음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준비된 믿음으로 기도를 생활화 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살펴보기 전에 이런 신앙상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신자들이 저지르는 공통적인 잘못부터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모든 문제가 믿음이 약한 데서 온다는 단순 공식에만 집어넣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이니까 믿음이 강해지면 해결된다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공부 못하는 아이더러 공부 열심히 하면 공부 잘하게 된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성적이 떨어지는 원인, 예컨대 유별나게 국어 중에서도 독해력에서 뒤진다는 것을 파악해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공부하라고 야단치기 전에 스스로 독서하는 습관들이도록 아주 쉬운 책부터 사주고 수시로 격려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문제가 말씀, 기도, 찬양, 전도, 봉사 등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기에 각 분야 고유의 원인과 그에 적절한 대책이 세워져야 합니다.
급할 때만 새벽기도에 나오는 신자라고 꼭 믿음이 연약하거나, 유달리 잠이 많고 게으르거나, 하나님께 복만 받으려 하거나, 심지어 그분을 해결사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급하지 않는 일들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들, 일상적인 일들은 자기가 다 해치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이 무슨 일이든 기도하라고 했지만 사실 그럴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하는데 기도가 나올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억지로 믿음만 키운다고 그 습관이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다 처리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작은 일까지 기도할 필요는 사실상 없습니다. 나아가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급한 일이 없으니 남의 힘든 일을 찾아서 기도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자의 입장에선 기도하는 가장 큰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께 도움 받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누가 뭐래도 기도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으로 바꾸어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고 또 그것을 응답해주는 이유와 목적이 과연 큰일에서 구원해주는 것만이 전부이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는 신자더러 괜히 기도하라고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지 않습니까? 큰일이 생겨야 기도한다는 것은 역으로 따지면 그런 수준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심술궂은 신과 밀고 댕기기 시합하는 것이 평생 동안 신앙 생활하는 내용의 전부가 됩니다.
그렇다고 여러 큰일을 겪는 와중에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 받음으로써 신자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간다고 단순히 결론지어서도 안 됩니다. 물론 그것도 소중하고 큰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일-기도-응답의 패턴이 자꾸 반복된다면 늘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어떤 환난에서도 건져 주시는 분”이라는 것 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진리를 모르는 신자가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또 그러면 평생 동안 신앙 생활한 것이 기껏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늘었다 줄었다 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영국의 찬송가 작가 윌리암 카우퍼(1731-1800)는 그 심령에 극도의 번민과 허무를 자주 느꼈습니다. 견디다 못해 어느 날 밤 자살하려고 결심하고 이륜마차를 불러 템즈 강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짙은 안개 때문에 운전수가 길을 잃어버려 스스로 찾아가려고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다가 강가로 간다는 것이 문득 자기 집 문 앞에 도달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구해주시려고 그런 짙은 안개를 보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살하려 했지 하나님께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기도라고는 하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 가운데 하나님은 오히려 더 큰 소망으로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당신께서 택하신 자의 경우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그 심령의 상태까지 감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단순히 신자의 기도를 통해 구원해 주는 것으로 그칠 것 같으면 구태여 그렇게 큰 절망으로 빠트리거나 묵인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신자에게 당신만의 계획과 뜻이 있어서 그것을 이루라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카우퍼도 바로 그것을 깨닫고 자기 은사와 재능을 사용해 그 후 은혜로운 찬송가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 각자에게 맡길 당신의 일이 반드시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으로 역사하십니다.
본문으로 따지면 하나님이 영혼을 소생시키는 이유와 목적은 바로 신자로 하여금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일부러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핵전쟁이 나서 인류가 당장 다 멸망해도 당신의 이름은 영원토록 고귀하며 그 영광에 한 치의 손상도 가지 않습니다. 신자로 의의 길을 가면서 당신 대신에 당신의 거룩하심을 이 땅에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 각자에게 특유의 소명을 주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붙들고 있는 신자는 절대로 개인적인 큰일이 생겨야만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지금 일상하고 있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며 또 그분이 나를 통해 이루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데 어찌 그 일을 위해 항상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개인적인 크고도 위급한 일도 그 소명에 비추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기도하지 단순히 그 환난에서 구해달라고만은 기도하지 않는 법입니다.
신자가 급한 일이 생겨야만 기도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기도할 제목이 생겨야 기도할 텐데 평소 때에는 기도할 특별한 제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숙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크고 급한 일도 전부 자기의 일일 뿐 하나님이 그 배경에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합니다. 당장 힘들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자기 힘이 모자라니까 어쩔 수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일이 많은데 기도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기도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작 기도해야 하고 또 항상 기도할 수 있는 일은 자기의 소명을 이루는 일입니다. 소명이라고 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간단한 예로 자식을 양육해도 자기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자식이라 그분의 뜻과 계획대로 키우는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 소명 의식에 철저하면 당연히 기도하게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영혼을 소생해 준 것으로 기뻐하긴 하지만 당신의 할 바를 다한 것으로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자를 반드시 당신의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신자가 항상 하나님의 정해주신 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그 영혼은 따로 소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받으실 영광이 내 잔에 넘치게 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일생이 그분의 계획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음을 확신한다면 그야말로 준비된 믿음입니다. 승리가 이미 확보된 인생입니다. 성경 말씀에 능통하고 언제 어디서든 기도를 시키면 막힘없이 기도할 줄 아는 자라고 다 준비된 신자가 아닙니다. 만약 소명이 없다면 오히려 상황적응에 재빠른 인스턴트 신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소명 앞에 확고하게 서있는 자라야 준비된 신자이자 올바른 믿음입니다.
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하는 인스턴트 신자는 하나님과 숨바꼭질만 하다가 그 평생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급한 일에 함께 하고 계신지 아닌지만 반복해서 기도로 확인하는 것만이 믿음으로 하는 가장 크고도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데도 신자는 그 이상 나아가는 것이 싫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따라나설 때까지 영혼이 괴로워지는 구렁텅이에 일부러라도 계속 밀어 넣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준비된 신자입니까? 인스턴트 신자입니까? 혹시라도 인스턴트 신자라고 여겨진다면 기도 잘하려 노력하기 이전에 내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 정말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합니다.
12/15/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