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저주와 기도의 능력

조회 수 710 추천 수 19 2009.10.25 0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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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저주와 기도의 능력
(성경문답사이트 # 46 “왜 예수님은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가?”에 대한 보충)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0-22)


간혹 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예수님이 단순히 기도의 능력만 제자들에게 보이려는 목적에서 행한 것이지 구태여 성전 제도로 대표되는 위선적 형식적 유대교와 연결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이 기도의 권능에 대해 강조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도의 능력만 나타내려면 구태여 제철도 아닌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저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라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자칫 제자들더러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무슨 일에든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심판을 구하며 저주할 수 있다는 부적절한 선례를 남기게 될 것 아닙니까?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런 유는 기도 외에는 나가는 법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당신 특유의 대적하고 꾸짖는 모습일지라도 기도하여서 귀신을 쫓는 본을 이미 많이 보였습니다. 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나, 나사로를 살릴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예수님도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바꿔 말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물어서만 행한다고 자신의 입으로 분명히 밝혔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기도의 권능에 대해 예수님께 주기도문을 비롯해 말씀으로 자주 가르침을 받았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직접 행하시는 온갖 이적을 통해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보이신 이적 중에 유일하게 부정적이며 저주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기도의 능력만을 가르치려면 생명을 죽이는 본을 통해 하실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이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마21:18) 것과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마11:13) 즉, 열매가 달려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기에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또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 맺히는 태를 완전히 닫아버렸습니다. 사람들의 영적 갈증을 유대 성전제도로는 영원토록 채울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기록된 대로 기도의 큰 능력으로만 해석하면 되지 너무 영해(靈解 -allegorical interpretation)에 치우친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더 자세히 기록한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사건의 전후 순서를 아주 정교하게 미리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우선 성전에 들어가면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지만 제자들은 단순히 그 말씀을 듣기만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11:14) 그리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야단치며 성전을 청소하고 나온 뒤에서야 제자들이 그 말라버린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막11:19-21)

아침에 뿌리로부터 마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보았던 나무가 저녁에는 말라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비로소 예수님이 저주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아침에는 제자들은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가 저녁에 우연히 다시 발견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권능을 확실히 보이려면 그 즉시로 말라버리는 모습을 제자들 눈앞에서 확인시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 아닙니까?

물론 마태복음의 기록에는 곧 바로 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자세한 마가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 주어야 합니다. 또 마가의 기록에는 뿌리부터 말랐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아마 아침에는 잎만 마른 것을 보았지만 저녁에는 완전히 뿌리까지 말라 있는 것을 새삼 발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제자들이 궁금해 한 것은 어찌하여 말랐는지 여부뿐이었습니다. 마른 것이 상징하는 영적 의미까지는 그들은 몰랐고 또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마태의 기록으로는 무화과나무에 먼저 도착하신 자는 예수님이었고 또 그 자리에서 바로 저주했습니다. 마가의 기록과 연결해 해석하면 일부 제자는 그 저주의 간구를 들었고 나머지는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래서 미처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제자들이 왜 한창 푸른 잎을 무성히 자랑해야 할 나무가, 혹은 멀리서 볼 때는 아무 이상이 없던 나무가 갑자기 말랐는지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설명이 기도의 권능만 강조하려 한 것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는 단서는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한 사건의 사이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그 둘의 중간에 있었던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마가복음이 이 사건을 결론짓는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11:25) 서서 기도한다는 것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성전에는 의자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서서 기도해야 했습니다. 또 성전에서 기도하되 남을 용서하는 즉,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기도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무화과를 저주해 죽게 만든 이적 하나로 해석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강화이지 않습니까? 이로써 성전과 연결된 의미가 있음을 충분히 암시한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가복음 11:23,24를 찬찬이 따져보면 권능보다는 순전하고 온전한 믿음을 더 강조했습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드린 기도의 결과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기사의 결론도 기도의 능력에 신경 쓰기보다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더 힘쓰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서 나무가 마르게 된 경위 즉, 그 능력이 어떻게 작용되었는지에 관심이 더 쏠려 있음을 이미 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되 특별히 죄를 사하는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자의 죄도 사해준다고 했습니다. 역으로 말해 죄가 개입되면 아무래도 기도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유대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가 바로 죄가 개입되어 있는 기도이며 또 그런 죄악들이 성전 제도를 완전히 부패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의 믿음의 기도에는 산을 바다로 던져지는 역사마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분의 권능을 이 땅에 실현하며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가장 손쉽고 빠르며 강력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의 권능이 실제로 드러나게 된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였습니다. 제자들이 기도의 가르침과 실제 응답되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듣고 보고서도 오순절 성령이 오기 전에는 그들의 기도에 별다른 권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도 수련하는 여행을 빼고는, 실은 이 경우는 예수님이 응답이 더 많이 나타나도록 했을 것임, 사실상 실패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친 내용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2-14)

십자가 구원 사역이 완성된 은혜와 권능에 힘입어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신자의 기도라면, 예컨대 산을 바다에 던져달라는, 무조건 다 응답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가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응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있을 때는 당신이 직접 일했고 이제 없으니 기도를 통해서 일하겠다는 원론적 의미도 있지만 당신이 죽으신 그 뜻에 맞는 기도를 하면 무엇이든지 응답하겠고 당신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시행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자가 자신의 죄부터 씻고 다른 이의 죄도 용서해주며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을 더 풍성하게 부어달라는 기도라면 무엇이든지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마른 까닭을 설명하면서 기도의 권능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또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는 신자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강조하셨습니다.

신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인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교회에 나와 자신과 이웃과 이 땅의 죄악을 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도무지 갖지 못하는, 아니 알지도 못하는 권세입니다. 오늘 날의 교회와 신자가 반드시 회복시켜야 할 권세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뜻하는 일차적 내용입니다.

그리고 살펴본 대로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나무 중의 하나인지라 당시 형식적, 위선적, 기복적 제사만 드린 유대교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의미도 분명 있습니다.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시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나아가 성전제사로 대표되는 율법의 효력이 끝나고 이제부턴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당신의 은혜만 바라보는 순전한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 될 것이라는 예표였습니다.

9/3/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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