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다윗의 기도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謀叛)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15:31)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한 다윗이 급하게 피난 가는데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그의 모사 아히도벨이 반역군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의 지략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삼하16:23) 마치 하나님께 받은 지혜와 견줄 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윗으로선 염려가 안 될 수 없고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되어가는 경과를 보면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도 어리석지 않고 정말 하나님의 지혜로 볼만큼 뛰어납니다. 먼저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과 백주에 모든 백성들이 보는 데서 관계를 맺도록 하여 그가 왕권을 인수하였고 대세가 반역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음을 과시하게 했습니다. 또 다윗 일당이 황망 중에 도망갔으므로 급히 추격하여 기습 작전으로 다윗 왕만 죽이고 나머지 백성과 군사들을 항복시키자고 권했습니다. 반역도 성공시키고 백성들의 마음도 사로잡는 일석이조의 아주 영리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럼 다윗이 여호와께 한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응답이 되지 않았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다 자기 기도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결과가 선하게 나타나면 “그래도 내가 기도했으니 이런 복을 주시는가보다”라고 밖에 생각을 못합니다.
말하자면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살펴 볼 요량도 없이 단지 빨리 문제만 해결되기를 손꼽고 있습니다. 기도와 응답 사이에 있는 하나님이 역사하는 모습과 그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문제해결”이라는 너무나 간단한 등식으로만 신앙생활을 합니다. 기도라는 수단만 동원하면 문제는 자동 해결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특별 새벽, 작정, 금식, 기도원 기도 같이 더 뜨겁고 오래하는 기도에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나는 양 착각합니다.
물론 신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즉시 역사합니다. 또 그 응답은 반드시 선하게 결과 맺습니다. 기도하는 순간 이미 문제는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는 정답을 받아 쥔 셈입니다. 그리고 “기도=문제 해결”이라는 절대 원칙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한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럼 신자가 정작 신경을 쏟아야 할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그 중간 과정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여 그분 특유의 어떤 결과를 맺을 것이며 또 그런 가운데 있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신자들이 기대하는 식으로 응답을 하자면 아히도벨이 갑자기 바보 천치가 되거나 아주 엉터리 같은 모략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뚝딱 같은 기적적 방법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순리와 상식의 경로를 통해 이뤄집니다. 아히도벨더러 평소대로 아주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게끔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반역군에 숨어 들어온 다윗의 심복이자 모사인 후새의 의견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압살롬으로선 다윗 대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새를 이참에 한번 시험해볼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것도 아주 상식적인 일의 경과였습니다. 그런데 후새는 아주 그럴싸한 언변으로 기습 대신에 월등한 군사력을 정비한 후에 다윗과 그 따르는 자들을 단번에 쳐부수자고 권했습니다. 다윗이 도망갈 시간적 여유를 벌게 하자는 지략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 일당을 한꺼번에 일망타진할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이를 선하게 여기고 따랐습니다. 그 결과 다윗으로선 절대 절명의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했더라면 광야 나루터에서 지체하고 있었던 다윗은 꼼짝 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다윗이 피난 중에 잠시 드렸던 기도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신자를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기에 신자의 아주 일상적이고도 개인적인 필요를 위한 기도라도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무슨 기도든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아니 통치의 시발점이 됩니다. 그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는 시작되지 않으며 인간들끼리의 다툼과 시기로 죄악만 만연해집니다. 기도가 없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장난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 문제만 해결 받고 싶고자 기도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런 개인적 기도를 통해서도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속한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 전 우주에 확장되는 일이 비로소 시작된다는 흥분과 감격과 기대 가운데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라고 가르쳤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그 다음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꼭 그 순서를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기도의 근본 목적이 당신의 나라의 확장일 뿐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함에도 당신의 통치에 쓰임 받는다는 믿음과 헌신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자가 생각하기에 적고 일상적인 기도라도 하나님의 통치는 거룩하고 위대하게 나타납니다. 또 신자가 비록 구체적인 경과를 다 모르지만 그런 상식적인 일의 진행 가운데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면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졌으므로 대신에 어떻게 해결되어지며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영광이 무엇인지 기도한 후에 오히려 범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이 간단한 기도에도 그런 믿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히도벨” 대신에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대적인 아히도벨이 아파 눕던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모략 자체를 내지 못하도록 기도합니다. 다윗은 그의 모략이 뛰어날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반면에 그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 뛰어난 모략이 채택되지 않고 무력화 되도록 모든 것을 합력하여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절대 자신의 문제만 해결하려드는 도깨비 뚝딱 식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역사만을 사모한 기도였습니다. 이야말로 기도는 도깨비 뚝딱 식이 아닌데 응답은 도깨비 뚝딱 식으로 된 셈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된 배경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 종자들과 그와 함께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삼하15:22,23) 그 황망한 피난 길 가운데도 왕인 다윗은 오히려 백성들더러 기드론 시내를 먼저 건너게 하고 자신은 맨 뒤에 건넜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따라 온 이방인 가드 사람 잇대를 가장 먼저 건너게 했습니다. 다윗은 기도 이전에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삶에 실제로 구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하도록 실천하고 있는 자가 그 나라가 더 크게 임하도록 기도하는데 응답이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록 또는 이슬람 세계가 복음화되도록 기도하는 것만이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가 아닙니다. 신자의 아무리 적은 기도라도 세상 역사를 바꾸는 기도입니다. 신자 자신이 역사를 바꾸는 주역이기에 그 일에 기꺼이 쓰임 받기를 소원하며 그 무기는 기도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만 한다고 역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가며 어떤 환난과 죄악과도 직접 부딪혀 싸워가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컨대 북한의 김정일 독재정권에서 동포를 구원해달라고 부활절 새벽에 모든 교회가 모여서 기도하는 것보다 사실은 모든 신자가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고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켜 나가면서 그런 기도를 할 때에 더욱 빨리 응답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당신은 세상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문제만 당장 해결하려 기도하고 있습니까?
4/1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