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서서 세상을 살아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어떤 일을 달성하는 데는 항상 두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 우선 정해진 목표를 이루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자연히 그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당연히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반대로 놀지만 않으면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자연히 많아지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도 “하라”와 “하지 말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을 비교적 잘 지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은 모두가 본질적으로 게으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뭔가를 하는 것은 귀찮지만 아무 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손쉽습니다. 예컨대 열심히 운동하는 것보다 굶어서 다이어트를 하는 쪽을 선호하고 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흥미롭게도 인간의 마음은 오히려 뭐라도 하기를 더 소원합니다. 뭐라도 하는 것은 자기에게 생기는 것이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씬한 외모를 지향하는 것은 같지만 운동을 통한 다이어트는 건강이 따라 오고 굶는 것은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운동을 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신자도 이웃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못해 항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마저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게으름을 바울도 소유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가 마땅히 살아야 할 자세에 관한 본문 말씀에도 ‘하라’와 ‘하지 말라’는 두 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와 단절하고 주님만 찬미하는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보지만 우리 모두 체험했듯이 너무나 자주 실패하지 않습니까?
영적인 문제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것이 손쉬울 때가 훨씬 많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좋은 이유도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사는 본보기는 찾기 힘들어도 이 세대의 사람이야 주위에서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삶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깨달아 그대로 따르지만 않아도 얼마든지 경건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 그들의 삶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습니까? 가장 본받지 않아야 할 점이 무엇입니까? 죄를 많이 짓거나 서로 사랑하지 않는 모습입니까? 그래서 신자는 선하게 살고 서로 잘 섬기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솔직히 그들이 오히려 더 선할 때도 많습니다.
체스트톤이 쓴 성 프란시스의 자서전에서 그가 아주 깊은 좌절에서 빠져나올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두운 구멍에서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 나오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 경험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이유를 “만약 인간이 나무와 탑들이 물에 비치는 것처럼 세상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으로 뒤집어놓고 본다면 한 가지 분명하게 나타나는 효과는 의존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나무나 탑이 땅에 거꾸로 매달려 있기 위해선 어떤 경우에도 붙들어 매여져 있어야 합니다. 만약 매인 끈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허공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도 이처럼 그분에게 자신을 온전히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그것도 거꾸로 달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모든 동물은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인간과 가장 닮은 원숭이는 재주를 아주 잘 넘습니다. 오히려 동물들이 세상을 거꾸로 보는 눈을 가진 셈입니다. 그래서 동물은 자신들이 자연에 부속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여 자연을 벗어날 것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유일하게 직립하는 동물입니다. 항상 땅에 곧 바로 서 있습니다. 다른 말로 자연에 달려 있는 부속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대신해서 자연을 아름답게 다스리라고 그렇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거꾸로 달리면 땅 밖에 못 보지만 바로 서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분 뜻대로 다른 모든 피조물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직립할 수 있는 특권을 오직 자신이 이룬 업적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의존해 세상 살아가는 데만 응용해버렸습니다. 인간도 하나님에게만은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하는 존재란 사실을 외면하고 부인해버렸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란 이 땅을 다스리되 하나님에게 의존하며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다스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 볼 것인지 아니면 오직 인간의 관점으로만 매사를 판단할 것인지를, 또 인생을 하나님께 거꾸로 매달려 살 것인지 이 땅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똑 바로 쳐들고 스스로 직립해서 살 것인지를 구별 짓는 능력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은 오직 직립에만 신경을 씁니다. 자기 힘만 과신하며 스스로 잘 해치워야 존경과 칭송을 받습니다. 누가 먼저 우월한 위치에 서느냐로 인간 됨됨이마저 판별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 잘난 능력에 훼방을 놓는 존재는 누구라도 혐오합니다. 부모와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마저 미워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가장 성가신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분을 인정하면 자기 기분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눈치 채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이 세대와 가장 크게 어쩌면 유일하게 달라야 하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불신자는 죽으면 죽었지 이 땅에서 직립하려고만 합니다. 신자는 때로는 이전 습성대로 직립하고픈 유혹이 있어도 사실은 항상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전과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구나무서서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시오 운행자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공중 나는 참새나 들에 핀 꽃들도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자답게 선하고 경건하게 사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우주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매달려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선해지려 해보지만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 존재일 뿐 아니라 항상 자기를 앞세워 직립하려 하기 때문에 절대로 온전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 살아야 할 삶은 응당 믿기 전과 정반대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전과 전혀 다른 시각 즉 세상을 거꾸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이 그분에게 거꾸로 매달려 있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허공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악착같이 그분께 의존하겠습니까? 또 그러면 그분의 의가 자연히 위에서부터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7/2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