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믿은 뒤에 소개되어야 한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8,15)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기준에 도저히 미치지 못합니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죽음으로도 죄 값을, 하나님을 고의로 거역한 죄뿐 아니라 도덕적 죄얼도, 갚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을 부어주심은 인류에게 정말 좋은 소식(福音)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기 직전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여 구원 얻은 한 강도의 경우에서 보듯이 불신자에게 끝까지, 심지어 죽을 때에 귀에 대고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먼저 복음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주로 받아들여야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은 오히려 믿음이 먼저 생기고 복음은 나중에 전해지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로마 교인이 온 세상에 소문날 정도로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했는데 그런 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믿음이 있어도 복음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 되는데 우리가 여태 알고 있는 믿음과 복음의 구별이 잘못되었습니까? 불신자에게 전할 내용을 고쳐야 합니까?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절)고 마치 이미 믿은 자라도 다시 복음을 알아야 구원을 얻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지금껏 쉽고도 간단하게 이해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신에 복음에 대한 정의를 너무 제한적으로 다뤘습니다. 지금 이해하기 쉽도록 대조되는 두 구절만 인용했습니다만 1:8-17절의 내용을 잘 음미해보면 복음의 본격적 내용은 18절 이후의 로마서 전체라는 뜻이 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저술하고 있는 시점에선 로마에 예수 믿는 신자들의 교회는 분명 있었지만 이 편지는 아직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복음을 전해주려고 합니다. 바울의 논리대로 하자면 즉, 성경은 로마서 전체가 복음이지 예수를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내용은 믿음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혹시라도 오해는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지 않고선 구원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오심과 죽으심은 흑암의 세력에 묶여 죄의 노예가 되어 있던 인류에게 최선 최대의 아니 유일한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복음이 갖는 풍성한 내용을 완전히 다 표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싶은 이유를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1,12절) 신자 개인은 복음으로 인해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고, 또 그 공동체 안에선 복음으로 인해 피차 안위함을 얻게 하고 싶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얻게 하는 것도 복음이지만 믿은 후 자기 믿은바 내용을 정확히 깨달아 그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풍성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글을 못 읽는 할머니가 로마서를 전혀 알지 못해도 온전한 진심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자백하고 순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은 분명 생겼지만 복음은 아직 완전하게는 모르는 것입니다. 믿음이 견고케 되어 신자끼리 피차 안위하는 기쁨은 누려보지도 못한 채 천국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말입니다.
이 서신을 곧 받아볼 로마 교회 신자들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 살아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었습니다. 틀림없이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음을 분명 깨달았고 또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방향과 목적을 달리하겠다고 결심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의 권능과 은혜가 왜 이렇게 귀한지, 그래서 세상의 어떤 환난과 핍박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근거에 대한 구체적 진리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가 정작 배우고 믿어야 할 복음은 믿은 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잘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만드는 복음에만 사활을 걸다시피 집중합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일종의 보증수표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에 치중하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절대적 진리는 모든 기독교 종파들이, 심지어 어떤 이단이라도, 한 목소리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믿음을 심어주려고, 심지어 의지적으로라도 믿어 보라고, 열심히 권면 설득하다 못해 반쯤 강요까지 합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슬로건에는 모두가 일치하는데 실지로는 온갖 교묘한 방식의 행위가 동원되도록 요구합니다.
개신교 복음주의 교단들도 크게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그 믿음의 내용 즉, 이미 믿은 자에게 가르치는 복음이 다 다릅니다. 아니 구원을 얻는 믿음부터 여러 갈래로 나뉩니다. 바울이 정작 로마교회에 전해주려 했던 18절 이후의 복음은 잘 가르치지 않거나, 다르게 혹은 틀리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그러합니다. 양적 성장에만 눈이 어둡다보니 다양한 형태로 믿음을 이미 가진 기존 신자들을 다 포용하려 듭니다. 결국 구원 얻는 복음만, 그것도 아주 피상적으로 가르치고선 정작 구원 후에 자기가 믿은바 내용을 정확히 깨달아 그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복음은 가르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설교 전반부는 성경대로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고 후반부는 갑자기 다원주의 내지 포용주의 복음으로 살짝 방향을 튼다고 예리하게 지적하는 어떤 분을 최근에 만난 적도 있습니다.
나아가 이런 현상을 고쳐 보려는 반작용이 불러오는 폐해마저 생겼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음에도 온갖 형태의 행위를 추가로 요구하고 있음에 격분하여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신자에게 행사, 프로그램, 율법적 계명을 강요하는(?) 일은 일절 중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교단 교파는 마땅히 없어져야 하고 신학은 물론 교리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무교회주의를 주창하고 성수주일마저 부인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 근본 취지는 좋은데 역으로 복음 만능주의가 나타났습니다. 신앙상의 어떤 측면에도 십자가라는 간단한 단어만 갖다 붙이면 아주 좋은 신앙인양 호도합니다. 기존의 큰 교회들이 복음을 아주 가볍게 취급했다면, 이 새로운 움직임은 복음을 너무나 제한적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미 소문날 정도로 좋은 믿음을 가진 로마 교인들에게 1:18 이후부터 정작 전하고 싶은 복음은 외면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럼 바울이 정작 이미 믿어서 구원을 얻은 로마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파노라마입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는 전도용 멘트가 아닙니다. 그가 복음을 창조 이야기부터 시작함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거룩하고도 원대한 근본적 뜻을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없이는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신자는 그분의 창조의 뜻에 비추어 자신의 실상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최초 인간 아담이 그 뜻을 어기고 타락해버린 동기와 과정과 결과를 철두철미 해부했습니다. 원죄로 인해 그 후손들이 처해 있는 영적 실태를 지루할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을 완전히 발가벗겨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세워 놓은 셈입니다.
인간을 부끄럽게 만들거나 정죄하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고 오직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어떤 인간도 참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져 생령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선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는 살긴 살아도 시체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도무지 소망이라고는 단 한 톨도 없다는 것입니다. 장래에 기다리는 것은 영육 간의 완전한 죽음뿐이기에 당연히 이 땅의 삶도 허공을 치는 향방 없는 달음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려는 인생들이 그 밑을 막아 생수가 가득 차게 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 뿐입니다.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겸비하게 엎드리면 당신의 보혈로 더럽고 비참해진 영혼을 깨끗케 해주십니다. 과거에 지은 잘못된 행동을 끌어 모아 세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존재 전체를 완전히 죽이고 새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식적 활동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체가 실제로 죽었다 살아나게 됩니다. 골고다 십자가와 아리마대의 빈 무덤 양쪽에 다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5)
자꾸만 자신을 세상 중심에 두고 자기 의를 자랑하려는 끈질긴 습성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죽이고 또 죽여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세상의 죄악과 흑암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굴복시킨 주님의 권세에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합니다. 내 지체 속에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죄의 본성의 숨통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영원토록 살아계신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성도와 동행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천국에서의 완성될 영광은 이미 확보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으며 연단을 통해 인내를 이루며 세상 사람이 가지지도 알지도 못하는 소망을 키우며 살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은 하나님 밖에 있던 죄인이 그분의 능력으로 의인이 되어 당신 품 안으로 돌아와 이 땅에서부터 그분의 은혜와 권능에 잠겨 그분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천국행 티켓을 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왜 이 땅에 존재케 되었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 궁극적인 결말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유일한 답변입니다. 참된 인생을 살려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선 어떤 것으로도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기에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파노라마일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은 그 시작과 종말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분으로 역사가 이미 둘로 나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최초 인간이 타락할 때도 예수님이 계셨기에 당장의 심판을 고려치도 않았으며,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시기까지 당신과 원수 된 인간들을 그대로 두고 보셨으며, 예수님 오신 뒤에도 여전히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완악한 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유보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다 때가 차면 그분이 다시 오셔서 성도를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기실 것이며, 끝까지 그분을 거역한 자들은 영원한 불 못으로 보낼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지정의로 눈부신 문명의 발달을 이루어도 성경에 선포되어 있는 이 절대적 진리에는 전혀 변개가 없습니다. 때와 방법을 모를 뿐이며 그것은 그분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자신의 출발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 적용하지 않는 인생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로 인해 뒤집어진 신자더러 역사 전체에 대한 그 주인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바탕 위에서 매일의 삶을 영위케 하기에 복음입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구원은 얻었지만 구원 이후의 삶은 한 번도 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갔을 뿐입니다. 지금 마치 두 종류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는 결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어디까지나 십자가 복음 하나뿐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중생하여 참된 구원을 얻은 자는 구원 이후에도 동일한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교리를 몰라도 이전과 다른 삶을 살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전부를 주님을 위해 바치는 일생이 되려고, 비록 그 실천 여부는 더디고 또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노력합니다.
단지 작금 교계가 복음을 너무나 복음답지 않게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가벼운 복음을 싸구려로 세일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귀하며 힘 있는 것인지 진정 확신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자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광채를 주위에 비춰내지 못합니다. 세상 앞에 사망과 생명의 두 가지 중 하나의 냄새를 피우지 못합니다. 신자가 속한 공동체마저 주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채우지, 아니 소개도 못합니다. 사회는 여전히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때로는 교회가 더 그러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며 그분을 대리하여 세상을 바꿔야 할 이가 성도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요컨대 예수 안에 들어온 인생이 그 밖에 있는 인생과 얼마나 엄청나게 다른지를 그들 앞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국 가는 티켓만 확보했지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하며 가는지는 전혀 몰라서 그렇습니다. 사실은 티켓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아주 잘 봐주어야 받긴 받았으되 천국열차에 아직도 탑승하지 않고 정거장 밖에서 즐기며 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주 간략히 줄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너무나 쉽고 단순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날마다 순간마다 더럽고 추한 죄인이 엎드려서 그분의 긍휼과 인도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개인과 인류 전체를 이끄는 내용의 풍성함은 감히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합니다. 그런데도 작금 전도할 때에 불신자더러 따라 외우게 하는 사영리(四靈理) 수준으로 복음을 너무나 간략화 시켜 버렸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좋다고 온 세계에 소문난 로마 교인들에게 비로소 복음을 제대로 가르쳤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칭의의 구원에서 시작하여 성화와 영화의 구원도 합쳐져야만 비로소 완전한 복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작금 기독교는 구원을 얻는 길에서 골고다 십자가 외 일체의 군더더기를 완전히 제거시켜야 하는 개혁도 시급할 뿐 아니라, 복음의 풍성한 내용을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완성의 거대담화로 복원시키는 것도 필히 병행해야만 합니다.
12/3/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