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이나 확증하셨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신자의 삶의 소망과 능력의 원천은 오직 하나,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이미 죽으셨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주님이 “내가 이렇게 의롭지 않느냐? 그러니 대속 죽음을 믿어라!”고
종교적으로 권면 내지 강요하는 식은 결코 아니다.
신자 쪽에서 그 십자가 사랑 앞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던지며 기꺼이 항복할 수밖에 없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첫째, 연약한 자를 위해서 죽으셨다.
인생살이 고초와 사람사이 상처로 인해 절망에 빠진 자들을,
특별히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신음하는 인간을 다시 살리려 하신 것이다.
둘째,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찾지도 않았고,
혹시 찾아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똑 같은 탐욕으로 가득 찼었다.
셋째,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죽으셨다.
우리는 실제로 온갖 더럽고 추한 죄를 열심히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의롭다고 자부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망령되이 일컬었다.
넷째, 기약대로 죽으셨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 약속했다.
인간은 그 약속을 까마득 잊었지만, 사실은 신경도 안 썼지만,
하나님은 때가 차매 그 약속을 완벽하게 이루셨다.
하나님이 대신 죽으신 것만으로도, 아니 약속만 해도
인간이 확신할 수 있는 차고도 넘치는 근거가 된다.
지금 그 위에다 당신의 사랑을 확증할 수 있는 근거 넷을 더 들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얼마든지 기약을 안 지켜도 될 만한 결정적 잘못을
인간이 이미 넷이나 제공했음에도 그분은 십자가로 가셨다는 것이다.
아니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더더욱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이 차고도 넘치는 사랑 앞에 어찌 저절로 엎드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때로는 우리가 다시 연약하고, 경건치 않으며, 죄 중에 빠져도
우리 삶에 다시 소망을 채우며 즐거워할 수 있는 근거를 이 외에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신자는 주님이 죽으심으로 되살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확증하셨고, 확증하고 계시며, 확증하실 사랑 가운데 있다.
신자가 죽을 때까지 그분의 생명은 신자 속에 차고 넘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바로 그 생명 때문에 신자는 환난 중에도, 끝난 후가 아니라, 얼마든지 즐거워할 수 있다.
나아가 날마다 자기 삶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마저 볼 수 있는 것이다.
7/2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