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23)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종말론에 내포된 모순
한국의 이 모 목사가 1994년 10월 28일로 기억하는데 그날 예수님이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한다고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중계차를 대기해놓고 기다렸는데도 불발로 그쳤다. 그 후 정작 본인은 그 몇년 후 만기가 되는 채권에 투자해놓은 것이 들통 났다. 본인도 믿지 않는 재림을 가지고 사기를 쳐서 기독교가 완전히 망신을 당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 단체의 이름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뜻으로 “다미 선교회”라고 근사하게 붙였다. 추종하는 교인들을 끌어 모아서 생업을 완전히 중단하고 전 재산을 처분해 헌납하게 한 후에 하루 종일 교회에 모여 회개하고 기도하며 지새게 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최초 인간 아담을 시험에 빠트림으로써 인간을 죄와 사망의 굴레로 덮어씌운 사단의 권세를 깨트리기 위해서였다. 광야에서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치신 후에 갈리리 바다 곁 가버나움을 본거지로 해서 이제 일반 대중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첫 메시지는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이 메시지가 처음 선포될 때에 예수 믿는 신자는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었고 기독교는 아직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신자를 초대하는 말씀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동일하게 바로 이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믿는 신자는 회개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쳤고 또 그렇게 한 이유는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천국을 소망하면서 회개했는가? 그랬던 기억이 별로 없는가? 그럼 다가올 미래의 심판을 준비하러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니었는가? 재산을 헌납하지는 못해도 회개의 기도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다면 큰 일 아닌가?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을 접하면 대부분의 신자는 다미선교회 식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천국은 사후에 가거나 지구의 종말이 와서 심판을 받는 것이기에 평생에 지은 죄 전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회개로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항을 잘 따져보면 의외로 모순이 더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종말론자들의 주장도 그렇다. 만약 최후의 심판이 오늘 내일 곧 닥칠 것 같으면 재산을 처분해 교회에 헌납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교회의 근본적인 역할은 구원과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심판의 도래가 날짜까지 확정되었다면 교회는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
이제 곧 영원한 구원과 심판을 받거나 둘 중 하나로 결정 될 것이다. 또 이 땅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이다. 재림하신 예수님에게 통치 자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썩어 없어질 재물이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는가? 종말론자들이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아직도 돈의 효용가치를 인정하고 있기에 그들도 절대 종말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다. 혹시라도 재림 예수님에게 잘 보여 죄를 보상받고 싶은 기대가 앞선다면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낫다. 평소 때에 잘 먹고 즐기지 못한 것을 마지막 때에라도 즐겨보라고 말이다. 사실 그것도 진짜 아무 의미가 없지만....
나아가 하루 종일 교회에 모여서 초등학교 때에 잘못한 일에 대한 반성문 쓰듯이 온갖 죄 지은 것을 줄줄 기억해내어 회개하는 것도 웃기는 짓이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는 이미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인다는 시쳇말로 살생부(殺生簿), 성경적 용어로는 하늘의 생명책을 들고 오신다.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고 모를 리 없으며 고백했다고 그 고백한 죄는 감해서 벌을 준다는 법도 없다. 또 그런 회개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면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치매 환자나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벌을 더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재림 할 때는 이미 모든 사람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자의 표로 인 쳐져 있거나 아니면 사단의 666 표시가 찍혀 있다. 돈 떼먹은 것, 술 먹고 개판 친 것, 배우자 몰래 바람피운 것들을 고백한다고 이마의 그 표시는 바뀌지 않는다.
천국은 시작이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한 천국의 개념은 이런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르다. 종말이 없다거나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천국이 세상의 종말이나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새 시대가 새롭게 출발하므로 이 땅에서부터 새로운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도 과거에 지은 죄를 전부 회상하여 고백하는 차원이 아니다. 새로운 삶을 누릴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기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기도와 금식에 열심인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고 따졌다. 그 때에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5:38)고 대답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이 비유로 해석하자면 “새 포도주를 줄 테니까 새 부대가 되어라”는 것이다.
그럼 새 시대를 대비해 새 부대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고 신령해지는 것이 새 부대인가? 또 세상의 죄악과 불의가 몽땅 없어지고 다 같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 새 시대인가? 그렇게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하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신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신앙으로 초대하는 최초의 메시지를 전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새 부대가 되는 것이다.
너무 싱거운 것 같으면 이렇게 따져보자. 예수님이 오심으로 분명히 새 시대가 도래했다. 그럼 예수님 오시기 전과 후에 어떻게 달라졌는가? 세상이 깨끗해졌는가? 우리가 신령해졌는가? 먹고 사는데 힘든 일이 없어졌는가? 질병이 다 나았는가? 종말이 왔는가? 그 어느 것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 예수님이 왔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신자가 생겼다는 것 말고는 바뀐 것이라고는 없다.
B. C.(Before Christ)에서 A. D.(Anno Domino=in the year of our Lord, 우리 주님의 시대라는 뜻의 라틴어)로 세계의 역사가 바뀌는 그 중간에는 오직 골고다의 십자가 하나만 서 있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이 예수님이 살생부를 들고 와 심판을 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곧 당신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골고다 이후가 새 포도주를 주는 새 시대다. 따라서 회개도 당연히 그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예수님 이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었고 또 회개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다. 이전까지 갖고 있던 믿음으로 회개하면 새 포도주를 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지고 갈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새 믿음을 가져야 한다.
새 믿음이란?
줄타기 곡예사가 나아이가라 폭포 위에 걸친 줄을 건너가자 많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이어서 커다란 맥주 통을 어깨에 짊어지고도 아무 탈 없이 성큼성큼 잘 건넜고 더 큰 박수를 받았다. “방금 제가 어른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통을 짊어지고 건넜습니다. 그럼 제가 사람을 어깨에 태우고도 줄을 건너갈 수 있으리라고 믿으십니까?”라고 관중들에게 물었다.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누구라도 좋으니 제 어깨에 타고 건널 분은 나오시지요?”라고 요청했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당연히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방금 사람을 어깨에 태우고 건널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것은 어디 갔는가? 진짜로 믿은 것인가 믿지 않은 것인가? 만에 하나 곡예사가 실수할 것과 또 그 높은 공중에 매달리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곡예사를 온전히 믿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기독교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말하자면 믿음으로 초대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 말씀이다.
흔히들 이 말씀을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다 감당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당신의 죄를 다 사해주셨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만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소개하고 치운다. 아직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전혀 없는 불신자로선 도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실 만큼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고 그분과 원수 되어 그분을 외면, 부인, 심지어 저주하고 있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철저하게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아직은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것 같으니 성경에 나오는 한 인물을 예로 들어보자.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 했던 자였다. 본인의 표현대로 하자면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5,6)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스스로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큰소리칠만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흠이 있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오로지 착하면 상주고 악하면 벌주는 엄격한 분이었다. 어떤 죄라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단 한 시도 떠나지 않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셨다. 그러다 예수님은 드디어 유대공회의 허가증을 받아 멀리 외국에 있는 예수 믿는 자를 잡으려 가는 그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하시며 불러 세웠다. 당신과 원수가 되다 못해 당신을 믿는 자들까지 핍박하는 자를 너무나 크신 긍휼로 용서하시고 당신의 품 안으로 받아 들이셨다.
하나님은 그의 눈을 열어 새 시대가 도래 하였음을 보게 해 옛 믿음을 버리고 새로운 믿음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또 천국까지 그를 이끌고 가서 당신께서 얼마나 그를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신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은사를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했다. 그가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할 만큼 그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결국에는 그에게서 사나 죽으나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했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한 뜻은 이제 곧 십자가에 죽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온 천하에 보여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었다고 삼일 만에 부활하는 깜짝 쇼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보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기적을 보고도 너희가 너희 죄를 고백하지 않을 것인가 하고 재촉하는 뜻도 아니다.
대신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당신만이 모든 인생의 삶과 죽음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으로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영원토록 죄인의 구주로 계실 것이라는 뜻이다.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진정으로 겸비하게 되어 십자가 앞에 나오는 모든 자들을 언제 어디서든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이다.
십자가란 “내가 너를 지었고 내가 너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 내가 죽는 방법 외에 더 이상 어떻게 너를 향한 내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죽음으로 그 모든 것을 다 지고 가겠다. 이제는 내 어깨에 올라타라. 천 길 낭떠러지 폭포가 너희 앞에 가로막더라도 내가 너를 어깨에 매고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는 뜻이다.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이자 절규였다.
새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껏 엄격한 공의의 하나님만 알고 있던 반쪽 믿음을 십자가에 드러난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까지 알아 완전한 믿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이런 일을 하면 하나님께 벌 받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서 비록 쓰러지고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서도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을 생각하여 그분께 되돌아서기만 하면 새 생명이 이 땅에서부터 그 죄인의 삶에 임할 수 있다. 또 그렇게 돌아서는 것이야말로 참 회개다. 스스로 반성하며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 그분이 죄와 죄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를 철저하게 깨달아 아는 것이 회개다.
문제는 오히려 신자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신자다. 예수님을 꼭 나이아가라 폭포의 곡예사처럼 대한다. 말로는 그분이 나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겨줄 분이라고 인정한다. 그분의 어깨에 올라타 어떤 절벽도 통과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막상 타라고 하면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아직도 단지 자신의 도덕적 죄악을 씻기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예수 믿는 것을 도덕적으로 선해져서 하나님 앞에 착하게 보이면 상 주겠지 정도의 신앙이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해도 아직도 상 받을 만큼 선하지 못하고 때때로 오히려 벌 받을까 전전긍긍하니까 그 삶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교리적으로는 아는데 체험적으로 그 권세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십자가에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자신을 구원해주셨다는 것은 어떻게 하든 믿는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까지 하신 이유가 너무나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부족하다. 십자가의 공로는 아는데 그 사랑에 드러난 권세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다른 말로 아직도 바른 회개를 하지 않았다. 단순히 윤리적 죄를 고백하여 하나님의 벌을 면하려는 수준의 회개만 했다. 여전히 회개가 하나님의 상을 받아 내거나 벌을 모면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것은 헌 포도주를 담은 헌 부대다. 새 시대의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 권능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분의 품 안으로 자신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죄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상태라도 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 그에 걸맞게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스스로 죽이기까지 했다. 그분의 사랑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조금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분의 사랑은 오직 그 분 자신의 죄인을 향한 안타깝고도 뜨거운 긍휼에 의해서만 통제받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뜻은 내가 너희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제발 진지하게 알아 달라는 것이다.
신자는 십자가에서 “내가 너를 떠난 적이 단 한 시도 없다. 졸거나 한 눈을 판 적도 없다. 그런데도 너희는 왜 불의와 죄악의 근처에서만 서성대고 있느냐? 왜 사단에게 너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팔아먹고 있느냐? 그곳에는 참 생명이 없다. 왜 거룩한 빛과 생명의 자리에 더 가까이 닥아 오지 않느냐?”라는 그분의 간절한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신자가 십자가의 예수의 보혈의 공로와 권능을 정말로 믿는다면 세상에서 자신 있게 살아야 한다. 사람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해져야 한다. 세상은 항상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서 외줄을 타는 것처럼 험난하다. 그 외줄을 절대로 우리 혼자서 탈 수 없다. 죄악의 유혹과 사단의 훼방과 나아가 자신 속의 탐욕이 그 줄을 쉴 새 없이 흔들고 있어서 몇 걸음 못가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 줄을 바로 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짐과 멍에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어깨에 타는 것뿐이다.
종말론에 빠진 자의 신앙이 더 좋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회개했다. 그중에는 부활을 믿는 자들이 있었고 그래서 천국도 사모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도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진노를 어떡하든 누그러뜨려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거짓 종말론을 퍼뜨리는 자에게 심판이 두려워 재산을 헌납하는 것과 사실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종말론에 빠진 자들은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전부를 걸고서 주님의 구원을 소원하니까 어쩌면 우리보다 더 나을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이 매사에 정말 별 것 아닌 축복을 받기 위해서 쥐꼬리 같은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덤비지 않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자라면 하나님을 향한 소원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다. “내 생명을 드립니다. 내 인생 전부를 바칩니다. 내 짐과 멍에도 받아 주시옵소서. 대신에 저를 낮추어 오직 당신의 일에 쓰임 받는 도구로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내 인생의 모든 키를 전부 예수님께 드리오니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비유컨대 신자의 인생은 예수님이 운전석에 앉고 신자는 뒷좌석 오른 편 자리에 허리를 깊숙이 파묻고 가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가 운전석에 앉았고 사장석에 모셔 놓은 하나님을 편하게 모시려 했다. 하나님마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끌고 가려는 진짜 속셈을 감추고 말이다. 거기다 하나님을 태웠으니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차를 세우거나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를 했다.
만약 벤즈 600을 갖고 있는 남편이 30년 무사고에 티켓 한 장 떼지 않은 아내에게 운전을 못 맡긴다면 무슨 뜻인가? 두 가지 이유밖에 없다. 벤즈 차를 너무 소중히 여겨 자기만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남이 그 차를 만지는 것은 마누라라도 싫다는 것이다. 내 차의 운전석에는 어느 누구도 앉히지 않겠다는 것이다. 수십 년을 같이 산 마누라라도 말이다. 마누라보다 차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여전히 마누라의 운전 솜씨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신자들도 자신의 인생을 이 벤즈처럼 아끼고 있다. 마누라하고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세상만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에게도 키를 맡기지 않겠다고 덤빈다. 자기 인생은 아직도 자기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운전석에 앉는 것마저 싫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 전혀 신뢰하지 못해 그 어깨에 자신을 올려놓지 못한다.
예수님이 이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는 문자 그대로 천국이 가까웠다. 삼년 후에 닥칠 일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2천 년간이나 이 땅에 천국이 실현되어 왔었다. 지금도 그분의 십자가 은혜와 권세는 아무 변함이 없다. 또 죄인들을 향해 천국으로 초대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동일하다. 회개만 하라는 것이다.
단, 죄지은 것 몇 개 꺼내서 반성하는 수준의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든 자기의 옳은 것을 증명해 보이려 할 필요가 없고 또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도 않는다. 우리의 전 인격, 전 인생을 발가벗겨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갖다 놓아야 한다. 우리 인생의 키를 전부 그분께 드려야 한다. 실제 돈이 들어가 있는 금고, 은행 구좌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만이 차고 있는 편견, 선입관, 고집, 독선 등을 그분께 드려야 하고, 내 마음의 비밀금고의 열쇠까지 드려야 한다.
따라서 구원 이후 신자의 회개란 죄지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걸쳐서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해야 한다. 범사에 그렇게 해야 한다. 죄를 지을 때 보다는 아직도 내 인생이 남에게는 도저히 키를 맡기기 싫은 벤즈 600처럼 아깝게 여겨질 때마다 해야 한다. 모든 인생은 벤즈 600이 아니라 폐차 직전의 용달차 수준 밖에 안 된다. 아니 폐차장에 쓸모없이 방치된 고철 덩어리 차다. 그런 차를 두고 그 차를 만든 분에게조차 키를 맡기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만큼 어리석은 바보가 없지 않는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심을 보이셨다. 그 사랑의 샘에 자신의 전 인생을 던져 넣는 것이 참 회개다. 또 그 샘 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누리는 것이 참 믿음이다. 천국은 지금 이 시간 바로 이 장소에 이미 충만하고도 완전하게 임해 있다. 이제 신자가 오직 할 일은 그 천국을 누리고 주위에 나누는 것뿐이다.
(나무십자가 교회 5/19/2002 주일 설교, 8/20/2006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