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7:10 세상 근심과 하나님 근심

조회 수 3491 추천 수 27 2009.09.19 23:30:44
세상 근심과 하나님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게 하는 것이니라.”(고후7:10)


인간이 살면서 근심을 떨쳐버릴 수는 결코 없습니다. 지금 이런 권면을 하는 바울마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7:5)고 실토했습니다. “이르렀을 때에도”라고 말했으니 이미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그랬다는 뜻입니다.

근심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그 발생 요인이 너무나 다양해서 근심의 대상이 되는 일을 위주로 접근해선 해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근심이 되었던 그 대처하는 방식과 그로 인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방식으로 접근하는) 근심”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먹고 사는 현실에 관한 것은 세상 근심이고 인격과 영성을 성숙시키려는 것이면 하나님의 근심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신자가 현실 문제에 대해 근심한다고 해서 신앙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신자는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만 근심하지 인격과 영성에 대한 근심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즉 누가 어떤 근심을 하던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세상 근심이지 불신자가 한다고 세상 근심, 신자가 하면 하나님의 근심이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생긴 음행, 분쟁,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들을 세상 방식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해 치리, 회개, 용서 하라고 권했던 앞선 편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심지어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들고 나가려 한 것(고전6:1)을 바울이 말렸지 않습니까?

그럼 그 둘은 어떻게 다릅니까? 우선 물질에 관한 근심을 봅시다. 불신자는 인간은 우연히 고급한 물질로 이 땅에 와서 물질로 그 생을 마치므로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그 욕심에 끝이 없고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자존심이 채워지지 않기에 사망에 이르도록 안절부절 근심만하는 인생으로 마감합니다. 간혹 물질 문제를 해결함에 자기 능력이 모자란다고 절감하는 자도 있지만 전혀 실체가 없는 우상에다 대고 비니까 올바른 열매가 맺힐 리가 없습니다.

신자도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 근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필요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실뿐 아니라 그보다는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더 소중한 인생의 목표가 되었기에 염려의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한에는 먹고 사는 것은 그분이 책임져 주심을 확신하며 살고, 혹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풍요와 궁핍 어떤 상태가 되었든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신자의 인생의 목표가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으므로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다음은 인간관계의 상처, 까닭 모를 갈급함, 양심에 찔림 같은 정서적인 문제를 봅시다. 한 마디로 죄를 없애고자 하는 근심입니다. 불신자도 죄에서 구원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권선징악적인 신만 인정하기에 이 문제 또한 스스로 거룩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회개, 선행, 구제, 심지어 고행을 해도 자신의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죄책감은 결코 지어지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고는 죄악의 결과로 인한 고통뿐입니다. 평생을 두고 혼자서 괴로워하고 슬퍼할 뿐입니다. 그야말로 죄의 삯은 사망임에 틀림없습니다.

신자가 죄에서 구원 받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불신자처럼 단순히 범죄 한 행위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가 완전히 부패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절감합니다. 스스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그 죄를 깨끗케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나 지성에 바탕을 둔 반성이 아니라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깨닫게 됩니다. 즉 자신의 전부를 전부 발가벗겨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게 된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임을 압니다. 영원한 죽음의 진노 아래 있던 자기에게 오히려 영원한 참 생명을 허락하신 그분의 너무나 크신 긍휼 앞에 자신의 전부를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정서적 염려가 생기는 대상과 과정은 불신자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만 의지하여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 진실 된 회개를 하면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결국 근심의 대상과 발생 경위와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긍휼과 은혜만을 소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됩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아무리 영적으로 경건한 근심이라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하려 들면 사망에 이르는 세상 근심이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죄 중에 한없이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사랑과 권능으로 용서하고 치리할 생각은 않고 세상 법정에서 해결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성령의 은사가 가장 다양하고 풍성하게 나타난 교회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본문대로 반드시 회개로 이끕니다. 그러나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불신자도 자기 죄를 뉘우칩니다. 심지어 벽을 향해 앉아서 몇 년을 두고 뉘우치지 않습니까?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회개가 전혀 충분치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회개를 했더니 어떻게 변했습니까?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절) 진정으로 애통하며 회개해 동일한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는 대신에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하는 일에 매진하려고 간절히 소원하고 열심을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신의 죄에 대해선 철저하게 분노하되 하나님의 일에는, 개인의 성숙이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전도의 실현이든, 자기 전부를 바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좋고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됩니다. 반면에 세상 근심은 할수록 사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신자가 불안 염려로 초조해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믿음이 약해진 증거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들고 나가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 들면 죄입니다. 또 그럴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야말로 믿음이 약해졌거나 사단에게 미혹되어 있는 증거입니다. 세상 근심은 어떻게 하든 줄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늘릴 때에 신자는 더욱 거룩하고 신령해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근심에 휩싸여 있습니까? 내일의 먹고 사는 문제입니까? 그것은 세상 근심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아닙니다. 단지 인간의 자연스런 육신적 반응일 뿐입니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는지부터 세상과 하나님의 근심으로 나눠집니다. 영적으로 피폐되어 있는 것도 동일합니다.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 보며 노력한다고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그렇게 해야 합니다.      

12/25/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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