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따로 없다.

조회 수 2571 추천 수 250 2007.06.03 20:15:56
5.2.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따로 없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은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14:14)

미국 TV의 엽기 컨테스트
미국 TV에 일반인이 나와서 거의 스턴트맨이나 할 수 있는 묘기를 겨루는 Fear Factor라는 인기 프로가 있다. 6명의 남녀 출연자가 3 번의 게임을 하는데 두 번 째는 꼭 뱀이나 바퀴벌레가 가득찬 통에 들어가 견디거나 벌레를 산 채로 씹어먹는 것 같은 엽기 컨테스트를 한다. 그런 게임을 볼 때마다 정말 징그럽기 짝이 없고 심지어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한다.

구역질까지 유발하는 너무나 징그러운 그 감정은 그 프로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징그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인간이 먹어야 할 음식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표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이 만드신 만물 안에 인간을 배려한 은혜와 능력이 드러나게 하셨다.  

이처럼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최초의 감정 자체에는 좋고 나쁨이 적용되지 않는다. 앞에서 징그러운 감정도 좋다고 말한 것은 그 느껴지는 감각 자체가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징그럽게 여겨진 감정이 유익하게 작용되었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하면 일차적인 감정을 본인이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이차적인 감정 처리가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감정은 가치 중립적이다. 감정 자체에 좋고 나쁘다는 법은 없다. 감정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감정이 되기도 하고 나쁜 감정이 된다. 그 말은 감정에 가치는 자기가 부여하는 것인데 본인의 상태가 나쁘면 감정, 정확히는 감정의 결과도 나빠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슬픔, 분노, 시기, 질투, 짜증, 염려, 공포 등의 감정이 생기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빠지고 영적으로 침체된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유발한 사건, 사람, 환경이 안 좋은 것이지 그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운전할 때에 그 길 전방의 상황을 알려주는 경고 사인과 같다. 갑자기 급 커브가 나타남, 장마로 흙 사태가 났음, 산에서 돌이 잘 떨어짐 등의 도로 표지가 없다고 가정해보라.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그 표시판들은 생명을 지켜주는 정말 고마운 것이다. 그러나 운전자로선 흙 사태를 피하고 속도를 줄이며 조심조심 운전하려면 사실은 귀찮고 짜증난다. 그러나 귀찮고 짜증난다고 그런 표시판을 없애라고 할 수는 절대 없지 않는가? 부정적 감정이라고 억누르려고만 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눈물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

흔히 낙관적, 긍정적, 적극적, 능동적인 것은 선하고 비관적, 부정적, 소극적, 수동적인 것은 나쁜 것으로 단순하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인생살이의 난관과 고민을 해결하는 데는 전자가 일부 도움이 되는 면이 있을지 몰라도 마치 인격적, 도덕적, 심지어 영적으로 후자보다 우월한 것처럼 취급해선 안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마다 다 다른 기질과 성격의 문제일 뿐이다.  

또 그 두 상반되는 기질이 함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한 가지 일을 처리함에 있어 낙관적인 사람 못지않게 비관적인 사람도 필요하다. 낙관적인 사람은 목표나 전략을 잘 수립한다면 비관적인 사람은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발생 가능한 모든 위험 요소를 잘 지적해 낼 수 있다. 적극적인 사람은 대외적으로 판매를 담당한다면 소극적인 사람이 내부에서 뒷바라지를 잘 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상반되는 기질이 조화를 이루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협력할 때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떤 일을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너무 낙관적이기만 하면 세밀한 계획이 나오지 않는다. 또 너무 적극적이기만 하면 행동이 생각보다 앞서 자칫 일을 그르치고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성격이 판이한 부부가 오히려 더 잘 산다. 성격이 같으면 사사건건 자기가 더 옳다고 부딪히지만 다르면 아무래도 충돌할 기회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기질과 성격은 잘 아는 대로 선천적 후천적 두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부모로부터 물러 받은 것,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은사가 선천적이라면 교육, 환경, 친구, 특별한 경험으로 인한 상처 등은 후천적이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만의 특별한 기질과 성격을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은 최하 2십년 이상 수 십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두고 굳어진 것이라 거의 수정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런 기질을 선악으로 구분지을 수는 없지만 감정을 처리하는 데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낙관적인 사람은 슬프고 위급한 경우를 겪어도 슬픔과 염려를 빨리 없애고 가능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 애를 쓴다. 비관적인 사람은 그 반대로 슬픔과 염려에 오래 잠겨 다른 일을 잘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잘 절제하려면 기질과 성격을 고쳐야 한다고 가르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 중립적인 기질이 똑 같이 가치 중립적인 감정의 가치를 결정짓는 모순을 범한 셈이 된다. 또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낙관적, 적극적, 긍정적, 능동적이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누구나 앞에 나서서 대장 역할만 하겠다고 덤비면 그 사회가 어떻게 제대로 굴러가겠는가?  

물론 감정을 처리하고 절제하는 일에 기질과 성격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꾸 기질과 성격 자체를 수정하려 해선 안 된다. 심지어 교회마저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그래야 인기를 끈다. 교회에서 신자더러 낙관적 적극적 긍정적 능동적인 사람이 되어라고 하면 성격 교정소이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 아니다.  

항상 웃는 사람은 바보나 정신 이상자뿐이다. 인생은 눈물과 분노와 저주와 시기와 질투와 짜증과 염려와 공포를 요구한다. 인생에는 어쩌면 그런 감정들이 더 많이 발생하고 또 많이 겪어야 더 풍성한 인생을 누릴 수 있다.

기질을 바꾸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부정적 감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며, 비관적 소극적 부정적 수동적 기질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다. 다 각자의 필요와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다른 것을 취하고서 어떻게 그분의 축복을 받으려고 기대하는가 말이다.

나아가 인생의 슬픔과 아픔 없이 쉽게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 들어서도 안 되고 또 그렇게 해서 얻은 축복이 얼마나 큰 가치와 능력이 있겠는가? 눈물이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 설령 은혜가 되어도 너무나 값싸고 표면적, 일시적일 뿐이다. 다윗이 인구조사로 하나님께 범죄 한 후에 크게 깨닫고 속죄제를 지내려 하자 나단이 타작마당을 왕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거절하고 돈을 주고 사면서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고 고백했지 않는가?(삼하24:24)

신자의 바뀐 가치관

감정을 처리하고 절제하는 절대적 원칙은 따로 있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이 정한 원칙으로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츰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우선 감정은 가치 중립적이라 자신이 감정에 부여한 가치에 따라 선악간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특정한 감정에 가치를 부여하라고 해서 일부러 좋게 아니면 나쁘게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관에 비추어 그 감정을 분석하고 판단해 보라는 것이다.

앞에서 가치 중립적인 감정을 똑 같이 가치 중립적인 기질만 바꿔 조절하려 드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 이유는 여전히 감정에 특정한 가치를 따로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일차 발생한 초기 감정에는 좋고 나쁜 구분이 전혀 없는데, 모든 경우에 반드시 다 좋다고만 할 수 없는 낙관적인 방향으로 그 감정의 물꼬를 바꾸었다고 해서 여전히 그것이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해보라. 불신자의 가치관은 오직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풍족하고 편안해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형통하고 출세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면 그 목표와 가치관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 예를 들어 돈이 떨어지면 괜히 불안해지고 짜증만 나며 주위 가족들에게도 그런 감정이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해진다. 남에게 상처 받고 손해를 입으면 밤새도록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어떻게 하든 복수할 궁리만 한다. 낙관적, 혹은 비관적인 사람의 구분이 없다. 기질과 성격이 다 다른데도 감정의 처리에선 하나 같이 동일하다.

반대로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생의 가치관이 물질, 현실, 인간 중심에서 영혼, 하늘,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질과 현실과 인간은 무시해도 되고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전에는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일을 판단했지만 이제 판단의 우선 순위, 더 정확하게는 주종(主從) 관계가 바뀐 것이다. 우선 순위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인간을 생각해도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주종 관계란 하나님을 생각한 후에 그 바탕 위에서만 인간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자는 돈이 떨어져도 하나님이 은혜로 나중에 반드시 채워주실 것을 믿거나, 돈 대신 다른 은혜가 넘칠 것이며, 나아가 돈이 없는 바로 그 가운데도 하나님 특유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믿는 자다. 물론 신자도 돈이 떨어지면 우선 당장은 염려와 짜증이 난다. 이 감정은 여러 번 말하지만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일 뿐 아니라 경고 사인이니까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염려와 짜증을 처리해야 하는 다음 단계에선 바로 이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이 힘을 발휘해 계속해서 염려하고 짜증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주위 가족들에게도 그런 나쁜 영향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인내하고 소망을 키우는 모습을 보여서 그들의 감정마저 좋게 인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에게 상처 받고 손해를 입으면 신자도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또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가치관, 즉 그들도 똑 같이 허물과 죄가 많은 연약한 인간이며 나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자신과 그 사람의 영혼을 함께 들고 나가 눈물로 기도함으로써 분노를 삭이며 용서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 가운데도 여전히 낙관적 혹은 비관적인 기질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라면 그 기질이 바뀐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 바뀌었기에 감정의 조절과 절제도 자연히 바뀌는 것이다. 좋고 나쁜 감정이 따로 없는데 감정에 하나님 중심의 가치를 부여하여 좋게 절제할 수 있게 된다. 기질과 성격은 태도와 습관을 다스리지 가치 자체를 창출하지 못한다.

이제 감정은 나쁜 것이니까 신앙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남에게 상처 입고 손해를 입어 분노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면 십자가 앞에 나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다. 눈물과 상처가 있었기에 용서와 사랑이 따르는 것이다. 단순히 낙관적으로만 생각했다면 그를 쉽게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용서가 되지 못한다. 단순히 매너, 태도, 습관 같은 일상적 행위에 불과해진다. 이처럼 감정은 오히려 십자가 복음을 더 복음답게 꽃 피울 수 있는 지름길이자 통로이다.

따라서 기질이나 성격을 낙관적, 긍적적으로 바꾸라고 가르치는 것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기질과 성격까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 바꾸어지는 것이다. 각 개인 고유의 기질과 성격은 그 바뀐 가치관을 적용하고 실천하는데 동원되어지는 법이다.  

예를 들어 목사나 신학자의 경우도 낙관적, 비관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전자는 종말론을 다루되 새 하늘과 새 땅에 중점을 두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독려하고 후자는 최후의 심판을 강조해 죄에서 회개하라고 더 많이 선포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히 교단과 교파가 나눠지지만 서로 보완, 조화, 균형을 이루어 복음은 더 확장되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서로 상반되는 두 기질의 사람을 당신의 일을 이룸에 함께 사용한 것이다. 그것도 동일한 일에 말이다.  

감정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발생시켰다는 뜻이 된다. 물론 기질과 성격에 따라 발생하는 감정이 차이 날 수도 분명 있지만 그 기질과 성격도 하나님의 선물 내지는 섭리라는 광의의 뜻에서 보면 그렇다. 그럼 그런 감정이 생기게 한 그분의 이유와 목적을 가장 먼저 생각해 그대로 처리하면 되지 감정 자체를 부인하거나 나쁜 것이라 매도한다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감정은 심리학이나 내적치유에서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십자가 복음으로만 해석 되고 또 처리되어야 한다. 심리학이나 내적치유도 십자가 복음에 바탕을 두어야지 학술적 지식을 앞세우거나 관련 성경 구절 몇 개의 뜻만 동원해서 인간 영혼의 문제를 다루려 해선 안 된다. 인간의 영혼은, 또 그 영혼을 풍성하게 살찌우는 감정은 오직 복음만이 제대로 조절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신자의 바뀐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만이 감정을 절제하는 유일하고도 바르고도 확실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김순희

2010.10.18 12: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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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고유의 감정을 바뀐 가치관으로 조절해 내는 것이 지혜임을 배웁니다.
그동안 알고 배워왔던 것들이 하나 하나 부숴지는 순간입니다.^^
배울 것이 너무 너무 많아서
그래서
행복합니다.

저는 이 곳을 '신앙의 백과사전' 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궁금하였던 것, 미처 알려 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이처럼 빼곡이 쌓여있는 곳이기에
정말 너무 너무 좋고 행복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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