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de In의 찬양

조회 수 1620 추천 수 205 2003.11.28 20:27:35
1/18/2002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시45:1,2)"

목청이 불편한 목사

제가 목사지만 예배 때마다 직접 오버 헤드 프로젝터로  찬양 슬라이드를 조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아직 연약한 교회라 사람이 얼마 없어 목사가 직접 봉사의 본을 보인다는 측면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다. 혀 암의 수술후유증으로 목청껏 찬양할 수 없어 다른 사람 한 분이라도 더 찬양에 몰두하게 하기 위해서다.

직접 노래 부르지 않지만 성도들이 찬양하며 은혜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겐 더 은혜가 된다.  찬양 중인 본인은 알게 모르게 자기 감정에 도취되는 경우가 많다. 남이야 은혜 받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고 혼자만 위로 받고 힘을 얻으면 그만이다. 찬양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남들의 반응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또 자연히 예배를 위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도록, 인도자들이 성령 충만하도록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그 때마다 은혜가 더 채워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은혜는 찬양의 가사를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 노래를 부르면  음정, 박자, 화음 등 음악 자체가 주는 경쾌함과 기쁨에 빠져 가사가 주는 풍성한 내용을 깊이 음미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자연히 가사에 주목하게 되고 평소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은혜가 가사 곳곳에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끔 콧노래로 가사만 묵상할 때 느꼈던 은혜를 상상해보라. 공평하신 하나님은 찬양을 잘 못하는 저에게 다른 은혜로 채워 주셨다.

그러나 저도 한 번 목청껏 찬양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해 봤으면 하는 미련은 항상 갖고 있다. 아무래도 골프경기를 갤러리로 구경하는 것과 직접 플레이하는 것의 재미는 서로 비교할 수 없지 않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제가 찬양을 못해도 다른 은혜를 받으니 오히려 감사한다는 말은 하면서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이렇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을 향한 불만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찌끼 같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팔 다리 없는 어떤 맹인
  
시카고에 팔과 다리가 없는 어떤 맹인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난 후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찼다. 소경이라 일반 성경을 읽을 수 없고 팔이 없어 맹인용 점자 성경도 짚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혀끝의 감각으로 점자 읽는 법을 터득했고 성경을 독파했다.  눈으로 보고 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혀로 만난 하나님이었고 바로 그 혀를 사용해 간증하고 성경 가르치는데 일생을 바칠 수 있었다.

이 일을 상상해보면 참 대단하다. 그 사람의 각고의 노력과 헌신만 칭찬하는 뜻이 아니다. 자기 혀 끝으로 "꿀 송이처럼 단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맛보고 그 감각이  남아있는 바로 그 혀를 사용하여 말씀을 전했으니 얼마나 살아 역사하며 은혜가 넘치는 말씀이 되었겠는가? 시편 기자의 고백 대로 그 사람의 "혀가 필객의 붓"이 되었다. 글을 읽을 눈과 글을 쓸 팔이 없음에도 혀가 두 역할을 다 감당했다.

불평과 불만은 항상 나에게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한다.  주님을 위해 드리고 싶어도 드릴 것이 모자라니 어쩔 수 없다는 그럴듯한 핑계도 따라 나온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이 나에게 아직 채워주지 않은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처럼 나만의 불만은 마음속 깊이 감춘 채 입술로만 다른 은혜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건성으로 고백한다. 그런 감사가 진정한 감사가 되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 만홀히 여김을 당할 리 있겠는가? .

신자가 하는 대부분의 감사는 어쩌면 "지금 이 정도로 그친 것만 해도 참 다행이다"를 다른 말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교통사고에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분명  다행이지만 “없어진 내 팔과 다리는 어떡하란 말입니까?”는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숨겨둔다. 병실에 누워 있는 자나 위로하러 오는 자 모두 한결 같이 "하나님의 은혜지요. 생명을 살려주신 것만도 참으로 감사해야지요"라고 말한다. “해야지요”라는 말은 의무나 책임을 뜻하며 영어로 치면 “Must”다. 진정으로 감사가 안 되더라도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뉴앙스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물론 처음에는 목숨을 건진 것만도 감사가 넘치고 눈물이 절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갈수록 남아 있는 것 보다 없어진 것이 더 커져 보이기 시작한다.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은 나에게서 없어진 것들의 그림자 뒤로 점점 희미하게 감추어진다. 영화 편집의 기법 중에 "Fade Out"이란 것이 있다. 화면이 점차 희미해지고 완전히 캄캄해지면서 다른 장면으로 바뀌는 것인데 우리의 모든 감사가 이런 것이 아닐까?  받은 복은 망각하고 없어진 것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만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와 반대되는 기법은 "Fade In"이다. 갈수록 화면 속의 대상이 뚜렷하게 보이면서 새로운 장면으로 바뀌는 것이다. 신자의 감사는 “Fade Out”이 되어선 안 되고   “Fade In”이어야 한다. 비록 부족하지만 남아 있는 것들만 자꾸 보면  점차 커지고 그 배경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차고도 넘치며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게 된다.

신자의 자족

그 장님처럼 주님께 받은 것이 남들보다 훨씬 부족하지만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만 바라보면 감사가 넘친다. 불만이 끊이지 않을  상황에서도 그 남은 것 하나라도 주님을 위해 바치겠다는 소원이 생기며 또 그런 길이 열린다. 풍성하게 받은 것만으로 감사하고 찬양 한다면 재벌회장만 그럴 수 있다. 아니 이 세상에 진정한 찬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모자라는 것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면 항상 모자랄 뿐이다.

찬양과 감사의 근거는 우리 심령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아니냐에 있지 받은 것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빌립보서 4:11에서 바울 사도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했다. 단순하게 검소하고 청빈하고 가난한 것에 만족하라는 "가난의 미학"이나 "무소유의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비천과 풍부, 배고픔과 배부름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어 가난한 것이 무조건 좋다고 한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삶의 질적 양적 수준을 어떤 수치적 기준으로 정해 놓고 그것을 성취하면 만족한다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아파트는 목욕탕 하나에 방 두 개, 차는 국산 소나타, 월 수입은 250만원만 되면 오케이다는 식이 아니다. 그것은 불신자의 자족으로 문자 그대로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自足)이다. 자기가 정해놓은 기준으로 만족과 불만이 나눠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가 정해 놓은 기준에 도달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방 두 개 아파트를 얻으면 화장실이 두 개여야 하고 화장실이 두 개면 방이 세 개여야 한다. 인생을 살면서 자기 만족의 기준이 계속 변경된다. 세상 풍조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자신의 체면의 정도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평생 가야 참 된 평강이 없다.

신자의 자족은 내용이 전혀 다르다 불신자가 벤즈를 타면 신자는 소나타를 타야 한다는 식으로 신자의 자족이 불신자에 비해 질적, 양적으로 적게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의 자족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 의지로 결단하고 참고 스스로 만족한 척 가장하지만 신자의 자족은 그 기준이 하나님이어야 한다.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이라도 부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자란 자기 눈에 부족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는 결코  모자라지 않다고 확신하는 자다. 혀 한치만으로도 평생에 걸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그 장님처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에 단 하나의 부족함, 궁핍함, 배고픔, 불완전함이 없다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 남이 얼마를 가졌건 절대 문제가 될 수 없다. 내가 이전에 얼마를 가졌다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직 현재 “이 모습 이대로”가 하나님이 내게 가장 유익하고 합당하고 최고로 좋은 것으로 주셨다는 확신이 있는가? 하나님이 주실 만큼만 주신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하게 완전하게 주셨다는 것에 의심치 않는가?  이런 자족의 기준이 확고히 서 있는가? 아니면 이 정도로 그친 것만으로 다행이라는 마지못한 감사가 자족의 기준인가? 그럼 다행이 아니었던 부분에 관해 마음속 깊은 곳에 꼬깃꼬깃 숨겨둔 하나님에 대한 회계 장부가 있다는 말인가?

신자는 이 정도 만으로 다행이라 찬양해선 안 된다. 이 정도야말로 완전하고 전혀 부족이 없다가 되지 않는 찬양은 반 쪽 찬양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특별히 마지막 하나까지 하나님의 것으로 얼마든지 그 분의 영광을 완전하고도 충분하게 드러낼 수 있다. Fade Out의 찬양을 하면 그 감동이 얼마 지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족하는 Fade In으로 찬양해야 호흡이 있는 동안 불신자와는 다른 참 된 평강으로 맛보며 완전한 찬양을 할 수 있다.  

김순희

2010.08.16 00: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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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때에 찬양 슬라이드를 직접 만지셨군요.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찬양가사에 은혜받는 것이 훨 좋더라구요.
저도 찬양드릴 때 자주 아주 자주 그 가사 때문에 그냥
입을 꼬옥 다물고 눈물만 흘릴 때가 더 많답니다.
가슴이 터질 듯 아프고 그리고 그 아픔이 감사의 아픔임을 알기에
그 입을 다문 찬양이 저도 훨씬 더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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