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조회 수 16 추천 수 0 2021.09.04 16:30:20

(요6:66-71) 너희 모두가 마귀니라.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4)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6:66-71)

 

 

오병이어 논쟁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열성적으로 찾아온 백성들은 물론 많은 제자들마저 주님 곁을 떠나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66절) 주님이 “진실로 진실로”라고 네 번이나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라고 가르쳤던 의미가 완전히 무색해졌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진리가 제자들에게조차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60절부터는 예수님과 대화하는 대상을 제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59절 말씀대로 가버나움 회당에 남은 것으로 봐야 하고 66절에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했으니 분명히 예수님과 계속 동행해 왔던 제자들이 떠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67절에선 열두 제자들만 남았다고 했으니 그보다 훨씬 많은 제자들이 주님을 수행했던 것으로 봐야 합니다.

 

당시의 랍비의 교육은 제자들이 스승을 항상 따라다니며 스승의 모든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럼 주님은 그런 제자들에게마저 당신의 뜻을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순히 떠나간 백성들과 제자들만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들이 떠나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논쟁의 전체 과정을 순서대로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슴에 쐐기를 박은 예수님

 

주님은 먼저 모세가 광야에서 준 만나는 썩을 양식이고 모세 본인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앞으로 주실 양식은 정반대로 영원한 생명을 주되 모세와 달리 하나님의 자격으로 준다는 뜻이 됩니다. 유대인들로선 모세만한 민족의 위인이 없으며 그와 같은 메시아가 와서 민족을 구원해주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시골 출신의 랍비가 모세보다 자기가 훨씬 우월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새벽부터 주님을 찾아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온 열정에 곧바로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칭하면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라고 했습니다. 거기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니까 아무리 비유라고 해도 무슨 뜻인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어려워서 아무도 그대로 따를 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왔기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면 너희가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주님이 처음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했을 때도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줄 빤히 알기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상징적 의미일 것이라고 여기고 참아주었습니다. 다시 정색을 하고 당신께서 내려왔던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니 과대망상 환자라고 취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다는 시도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당시 정황에선 생명을 걸어야 하는 엄청난 일입니다. 로마가 세운 분봉왕 헤롯이 엄연히 통치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면 로마에게 공식적으로 반기를 드는 너무나 위험한 모험과 도전이 됩니다. 말하자면 그들로선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만약 그 요청을 수락하면 어떤 위험도 함께 감수할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기 전에 주님이 그들의 더 깊은 속내를 아셨기에 대화는 처음부터 백성들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할 양식을 구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부응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은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어떤 일을 해야 영생할 양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이므로 당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답변하자 다시 그렇게 믿을 수 있을만한 표적을 달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이왕이면 모세가 준 만나 같은 양식을 매일 먹게 해주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표적은 이미 오병이어에서 충분히 보였기에 계속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인 당신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했고 끝까지 못 믿겠다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표적도 보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봐도 당시로선 아무도 순종은커녕 이해도 안 되는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그들의 가슴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습니다. 너희 중에 당신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64절) 거꾸로 따지면 주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로선 나름대로 목숨 건 결단을 한 셈인데 스승이 그런 점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어려운 말씀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성의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고 거룩한 율법까지 수여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재삼재사 강조합니다. 그럼 당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고 그래서 하나님도 그런 자를 외면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인 고유의 영적 자존심마저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했습니다.

 

이 모든 대화 과정을 비유하자면 일본 강점기 때에 한국인 지도자가 백성들이 독립운동을 하자고 요청했는데도 참여도 않고 도리어 잘못되었다고 꾸짖은 셈입니다. 거기다 본인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거꾸로 현실 안락만 구하는 너희는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지적한 꼴이지 않습니까?

 

그들로선 더 이상 대화를 이끌고 갈 필요도 이유도 없고 예수님이 지적한 대로 스승의 가르침은 화가 날 정도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어리석어 완악하게 고집을 피웠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은 유대교의 사상과 관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들뿐이었고 논의가 진행될수록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들만 하셨습니다.

 

복잡 미묘한 제자들의 심경

 

제자들로선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열어줄 새로운 세상에 적극 동참해보려는 소망을 품고 그동안 주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 백성들이 먼저 나서서 왕으로 모시려 하니까 자기들이 바라던 대로 되어가고 이제 그 때가 되었나보다 여기며 주님과의 논쟁에 귀 기울이며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제자인 자기들마저 믿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소망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기대가 클수록 그것이 무산되면 더 크게 실망합니다. 제자들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는 백성들보다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 하더라”(66절)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주님과 같이 다니지 아니했다는 원어의 의미는 이전의 생활로 완전히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로마와 헤롯왕의 폭정에 시달리며 경제적으로도 수탈을 당하는 식민지 백성의 고달픈 삶을 다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떠나갈 때의 심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그럼 남아 있는 열두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주님이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에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절) 언뜻 주님에 대한 믿음이 대단한 것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선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므로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바로 영생의 말씀이라고 대답했어야 합니다.

 

그는 주님과 말씀을 일치시키지 않고 단순히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정체성을 말씀을 가르치는 인간 랍비 차원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 그래서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믿고 알았다고 합니다. 주라고 번역된 것은 영어로 치면 the Lord가 아니고 단순히 스승을 부르는 이인칭 대명사 you입니다. 주가 바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알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고대 사본을 따르는 KJV와 그 계통을 이어가는 일부 영어성경들이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 중의 한 분으로 믿고 알았다고 번역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최초로 한 것은 오병이어 이적이 있었던 가버나움에서가 아니라 한참 후인 가이사랴에서의 칠병이어 기적 이후였습니다.

 

어쨌든 현재 단계에서 베드로는 스승이 영생의 말씀을 가르치는 메시아라고 믿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영생의 말씀이 어떻게 참 생명을 주실지 또 나중에 메시아로서 어떻게 그 사역을 완수할지는 몰랐고 스승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이라고는 아직은 온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정말로 믿고 따른 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완료되고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후였습니다.

 

어쩌면 자기들 열두 명을 주님이 밤새 기도해서 택하여 사도라는 별칭을 주셨기에(눅6;13) 끝까지 스승 편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인간적 의리와 책임감으로 그렇게 말했을 수 있습니다. 사도의 헬라어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지금껏 예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이루실 왕국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퉜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도 끝까지 남아서 뭔가 결말을 봐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복잡한 심경을 꿰뚫어 보신 주님이 내가 너희 열둘을 택했다고 위로해줍니다.(70절a) 지금은 내 말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를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셨기에 내가 끝까지 너희의 생명을 지키고 영생의 떡을 먹여주겠다고 다시 다짐해준 셈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예수님

 

그런데 그렇게라도 남아있는 제자들을 위로해 주셨으면 되었지 주님은 정말로 우리가 봐도 너무 심한 말씀을 그들을 향해 덧붙였습니다. 마치 많은 제자들이 당신을 떠난 것에 화가 나서 분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라고 선언했습니다.(70절b) 당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이고 진리의 영을 받기 전인데다 누구라고 밝히지 않았으니 모든 제자들이 혹시 나를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크게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로선 큰 충격을 받고 상당 기간 두려워서 어쩔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의 마귀는 주님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유다가 배반할 줄을 당신께서 아시고도 택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충격이 가라앉은 후에 스승의 뜻을 이해해보려고 온갖 복잡한 추측을 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당신을 배반할 역할로 택했다면 유다에겐 아무 죄가 없고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따지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각본을 저작하고 무대의 배경을 다 마련하고 각 배역을 정해서 연출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완벽하신 계획에 따라 각 사람이 맡을 역할을 다 정해주십니다. 유다도 모세가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의 바로나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처럼 당신을 거역하는 악역을 맡기려고 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베다니에 들러 당신이 소생시킨 나사로의 집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 나드 한 근을 주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릿결로 씻어주었습니다. 그 때 유다는 이 비싼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고 증언합니다. 그는 일찍부터 돈을 탐한 자였습니다. 이미 설명 드린 대로 초기에는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고 숙식을 함께 했으니 경비가 상당히 필요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 같은 후원자들에게 헌금을 받았고 제자들도 경비를 갹출했으니 돈궤에 돈이 꽤 많았을 것입니다.

 

유다도 생명의 떡에 관한 주님의 본문의 말씀들이 너무 어려운데다 유대교와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마음에 큰 걸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다른 제자들처럼 떠나가 버리면 나중에 역사상 최고 큰 죄인으로 비난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라는 책임감 외에 이미 돈 궤에 손을 대는 일에 재미를 붙여서 떠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항상 동행하며 가르침을 받고 있는 중에도 큰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처음부터 그가 돈을 탐하는 자인줄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제자로 택했습니다. 그럼 일부러 가장 사악한 자를 골라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드라마를 더 극적으로 미화시킬 희생양으로 세운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예수님에게 그럴 의도는 추호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어떤 인간적인 변명 과장 치장도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해골이라 불리는 황량한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영원토록 찬란한 하늘의 영광의 빛입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주님이 다시 너희 중 한 명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13:22)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배반자가 누구일지 궁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볼 때에 자기들 모두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내가 한 조각을 찍어주는 자가 그라고 하면서 유다에게 떡 조각을 주었고 또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었고 주님이 유다더러 명절에 쓸 것을 사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는 말씀인 줄 알았다”(28,29절)고 합니다. 아무도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나머지 제자들끼리 더 의심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인간적 기준으로 억울해 보이는 유다를 옹호해주려는 선한 의도를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영적인 시체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제자들마저 서로 의심할 상황에선 아무리 고르고 골라도 반드시 유다 같은 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유다만 돈을 탐한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모든 사람이 그러합니다. 주님은 어쩌면 너희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상 너희 모두가 마귀라고 말하고 싶었었지만 그나마 남아 있으려는 제자들을 배려해서 억지로 참았을 수 있습니다.

 

어폐가 있지만 예수님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기에 배반할 자 한 명보다 배반하지 않을 자 열한 명을 택하여 사도로 세운 것입니다. 그 열한 명도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특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모두 순교할 역할을 맡겼습니다. 또 그래서 마지막 날까지 당신이 참 생명으로 지켜주신다고 계속 다짐한 것입니다.

 

결말이 뻔히 정해진 논쟁

 

이제 주님과 오래 동안 동행했던 많은 제자들마저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성령을 통해 절감시켜주기 전에는 모든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모르고는 인간적 의의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판단하면 누구라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제가 저를 봐도 스승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였고 아주 잘 봐주어서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였습니다.

 

한마디로 오병이어 논쟁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런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도 너무나 자명하고 하나뿐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이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런 죄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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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되었습니다.(요12:5) 오병이어의 기적 때에 약 이만 명의 식사를 먹일 수 있는 비용을 빌립이 대충 이백 데나리온으로 계산했는데(요6:7) 삼백 데나리온이면 그것의 1.5배이니까 삼만 명의 가난한 자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있는 돈입니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좋겠다는 유다의 생각은 충분히 의로웠고 이해해 줄 만합니다.

 

거기다 당시에 유대인 남자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자와 교제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랍비인데도 거리낌 없이 마리아와 만나고 있습니다. 여자는 또 공개된 장소에서 머리를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머리는 여자의 가치를 상징하는 가장 귀중한 부분이지만 발은 항상 먼지를 덮어쓰기에 신체 중에 가장 천한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고 해도 공개된 장소에서 남자 랍비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또 주님의 발을 자기 머리로 씻어주고 있습니다.

 

유다로선 스승이 랍비로선 결코 행해선 안 될 일을 하고 있는데다 가난한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 없이 최고의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거기다 많은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혼자서 마리아의 섬김과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주님은 곧바로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요12:7) 즉, 마리아가 옳고 유다의 생각은 틀렸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향유를 시신에 바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본문을 포함해 여러 번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어떤 제자도 온전히 믿지 않았으나 마리아만은 순전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변 유대인 남자들이 따가운 눈총을 견뎌내면서 주님의 장례식을 자기 손으로 미리 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왜 주님이 죽으셔야 하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곧 있을 그 이별이 너무 안타깝고 슬퍼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느라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도유사건은 예수님이 인간 랍비에 불과했다면 유다의 생각이 백번 지당합니다. 예수님도 마리아도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의 말씀대로 하나님이시고 또 당신께서 십자가에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직접 죽으신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녀는 주님께 역사상 최고의 신령과 진정으로 이 땅에서부터 천국예배를 드렸고 개인적으로는 역사상 최고로 친밀한 사랑의 교제였습니다..

 

가난한 자는 너희가 책임을 져라.

 

반면에 유다의 불평 섞인 말에 대해선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12:8)고 깨우쳐주었습니다. 가난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다고 합니다. 우선 죄로 타락한 인간들이 서로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자기만 높이려 드니까 모든 시기와 분쟁이 생겨서 필연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구제가 첫째 목적인 십일조, 안식년, 희년 등의 계명을 주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기업을 사람 숫자대로 똑같이 배분 했고 중간에 빈부격차가 생기면 희년에 원래대로 회복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백성들끼리는 서로 사랑해 가난한자가 없게 하는 것이었고 그 제도적인 장치도 마련해주었습니다. 율법의 최고 강령도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이웃도 그와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그런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가난이 생겼습니다.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더러 가난한 자를 너희가 만들었으니 너희가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주님은 유다에게 나는 항상 너희와 있지 아니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곧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 승천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한 이후로 자기만 높이려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기에 당신의 대속죽음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화해시키는 길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아무 항변도 않고 올라갔겠습니까? 지금도 네 번이나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며 가르친 절대적 진리를 이해한 사람은 수제자 베드로를 포함해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당신의 죽음만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미리 가르쳐 놓아야 나중에 성령이 영감을 줄 때에 그나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십자가에 먼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하늘의 진리를 일러주면 무슨 뜻인지 몰라 제대로 받아쓰지도 못할 것입니다.

 

유다가 도적질을 했거나 주님을 배반해서 심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으로 어떤 악행도 심판의 기준이 아니며 어떤 선행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이 유다를 도적이며 당신을 배반할 줄 알고도 택한 이유도 그것 때문에 결코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이자 끝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과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어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야만 하는 영적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당신 안에 있느냐 없느냐 하나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원수의 자리에 있던 죄인에 대한 아무런 조건과 차별 없는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드러내셨습니다.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며 주님께로 나아가면 구원을 주십니다.

 

유다는 마지막 십자가를 보기 직전에 인간적 기준으로는 스승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참지 못하고 떠났기에 구원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반면에 그와 영적 수준이 크게 다를 바 없는 베드로는 그래도 끝까지 참고 남아 있었기에 십자가 구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신자도 여전히 연약한 인간인지라 힘든 환경에 시선이 먼저 돌아가다 보면, 특별히 세상에 불의가 더 득세하는 것을 보면 종종 유다 같이 하나님에 대해 불만과 원망이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인간적 생각일 뿐입니다. 신자는 본문의 열두제자에게 하신 “내가 너를 택하지 않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이미 들었고 그 진리는 영원토록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해하기 힘들 때마다 골고다 십자가의 영광을 빛을 떠올리면 구원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다고 다시 확신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8/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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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창2:7) 타락 전 아담의 영적 상태는? master 2021-03-02 78
34 민36:1-4,12,13 인간에게 지워진 첫째가는 숙명 master 2020-01-22 10
33 (민20:12,13) 믿음이 없다고 모세를 꾸짖은 이유는? master 2019-09-13 27
32 (민16:1-3) 인간이 지닌 가장 큰 문제 master 2019-07-20 15
31 하나님의 관종(觀種)이 먼저 되어라. master 2019-07-20 10
30 게으름은 타락한 본성이다. master 2018-11-10 69
29 창세기로 되돌아가는 인류의 미래 master 2018-11-09 24
28 하나님은 왜 자유의지를 주어 타락케 했나요? master 2018-11-09 88
27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상들 master 2018-07-26 144
26 인간의 내면은 영(靈)인가 혼(魂)인가? 운영자 2014-10-22 956
25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운영자 2013-04-16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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