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소원과 절제

창세기 강해 (44)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7)

 

 

죄에 대한 성경 최초의 진술

 

인간이 에덴 밖에 저지른 최초의 죄는 친형제 살인이다. 에덴 밖에서 지은 최초의 죄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최초의 죄라는 뜻이다. 또 여러 죄를 지은 후가 아니라 최초의 죄라는 것은 누구나 언제든 쉽게 지을 수 있는 죄라는 뜻이다. 성경의 이 진술은 참으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데 죄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쉽게 저지르는 죄는 주로 어떤 것인가? 약속을 어기는 것, 거짓말 하는 것, 말로 남을 비난하는 정도 아니겠는가? 살인은 평생을 가도 지을 수 없는 가장 극악한 죄로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럼 성경이 인간이 범한 첫 죄를 살인이라고 기록한 것이 심하게 과장된 종교적 협박인가?

 

성경에 대한 의문은 성경 안에 해답이 있다. 오늘의 본문은 성경에서 ‘죄(罪)’라는 단어를 최초로 언급한 구절이다. 자세히 보면 특이한 사항 즉, 우리 생각과 다른 죄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했다. 죄를 스스로 행동이 가능한 독립된 존재라고 묘사하고 있다.

 

사기, 도적, 폭행, 간음, 살인 등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가? 아무리 충동적 우발적 죄라고 해도 그 출발과 최종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본문처럼 죄를 인간과 별개의 독립된 양상으로 보는 바로 이점이 타종교와 기독교가 가장 다른 점이다. 신자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사탄이 죄인가?

 

의인법으로 묘사한 그대로 본문이 말하는 죄를 일차적으로 사탄이라고 해석한다. 베드로는 본문에 근거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말했다.

 

“우는 사자”는 배가 고픈 사자다. 기세가 맹렬할 뿐 아니라 용의주도하게 무엇이든 잡아먹을 태세다. “두루 다닌다.”고 했다. 다니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목사도 포함해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먹이 감이다. “삼킬 자를” 찾는다. 죄송하지만 팔다리 한두 개 뜯어먹고서 놓아주지 않는다. 완전히 멸망시킨다. 정말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한글개역본이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고 해서 자칫 가인에게 죄의 소원이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최근의 번역본들은 물론 개역개정본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번역했다. 베드로 사도의 선언과 같이 사탄이 가인을 삼키려 노린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두루 다닌다고 했고 본문은 문에 엎드린다고 했지만 사실은 같은 뜻이다. 문(門)은 인간이 활동을 하러 집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첫 번 경계선이다. 혼자만 있던 상태를 벗어나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문 앞에 엎드리고 있다는 것은 타인과 교통하며 사회활동을 하자마자, 또 모든 일상생활에 사탄이 잠복해서 신자를 넘어뜨리려 한다는 뜻이다.

 

사탄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고 인간을 유혹에 죄에 빠트린 원흉임에는 분명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사탄이 죄 자체는 아니다. 본문에서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는데 완전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사탄을 다스릴 수 있는지 여부다. 이브가 죄에 빠질 때도 사탄은 직접 나서지 않고 가장 간교한 뱀을 사용했는데도 맥없이 넘어갔지 않는가?

 

욥기에서 보듯이 사탄은 인간을 맘껏 농락하고 죽일 수 있는 능력도 가졌다. 그러나 한 가지 갖지 못한 것이 있다. 무엇인가? 바로 권세다. 사탄도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며 사탄을 지배할 권능은 하나님만이 가졌다.

 

사도행전에 보면 귀신들린 자들을 섣부르게 축사하려다 바울과 베드로는 알지만 너희는 알지 못한다고 거꾸로 덤벼들어 크게 혼 줄이 난 경우도 있지 않는가? 사탄은 인간이 대적할,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야만 대적할 수 있지 인간의 통치가 가능한 존재는 아니다. 본문이 하나님이 가인에게 사탄을 조심하라고 당부한 뜻은 분명 있지만 가인이 주체가 되어서 다스릴 대상은 사탄이 아니라 죄다.

 

죄가 인간과 별개인 이유는?

 

사탄이 죄가 아님에도 하나님이 죄를 인간과 별개의 존재처럼 묘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탄은 알다시피 아담의 타락 이후에 예수님이 구세주로 초림 할 때까지 인간세상을 농락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묵인을 받은 상태다. 죄란 그래서 사탄이 인간을 갖고 놀기 위해 발휘하는 온갖 추하고 더럽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력이고 또 그것으로 인해 오염되는 모든 결과다.

 

사탄이 존재하고 지향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다. 인간을 질병과 환난과 타락에 빠트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더러 하나님을 등지게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부귀영화를 넘치도록 부어주고, 심지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 인간적인 선한 생각과 활동까지 하게 만든다. 그 단적이고도 역설적인 예가 바로 불신자들이 나는 하늘 우러러 부끄러운 점 하나 없기에 예수 믿을 필요 없다고 큰 소리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두렵고도 엄청난 잘못 아니 죄인 줄 모르고 떠벌리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자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왔다. 따 먹은 행위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그분의 계명을 위반한 것은 사실은 죄의 결과다. 그 이전에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지음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죄다.

 

또 그 이전에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한 것,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거한 것이 죄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죄로 오염된 결과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의 본성에 죄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 혐오감의 모습으로 뿌리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성경이 죄가 문에 엎드렸다고 하는 데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인간을 얽어매어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세우고자 하는 끈질기고도 교묘한 사탄의 어두운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인간 세상에 단 한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 본성 안에 하나님을 믿지도 따르지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마음을 태생적으로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를 최고 우위에 세우려는 고집과 일방적 편향성이 모든 사람에게 작동된다. 모두가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니 필연적으로 인간사회에 시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인간끼리 분리를 부른다. 그렇게 되도록 사탄은 살살 부채질,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만 생기게 만든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자기 안팎에서 죄의 세력의 지배 아래에 있는 절망적이고도 비참한 상태에 빠져버렸다. 죄의 세력이 사탄은 물론 인간 본성에도 있다면 인간이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도 즉, 혼자 있을 때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꼴이다. 아니 혼자 있을 때에 더 죄를 쉽게 짓게 된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가인 즉, 인간더러 죄를 다스리라고 한 것이다.

 

인간이 죄의 세력에 지배당하는 절망적 상태라고 해서 오해는 말아야 한다. 모든 인간이 흉포한 성격을 지니고 항상 죄를 짓고 싶고 또 짓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느 누구도 사탄에게 넘어가거나 죄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그분의 도덕적 성품을 부여 받았다. 비록 모순, 왜곡, 파손되긴 했어도 양심의 형태로 누구에게나 남아 있다.

 

그렇지만 솔직히 자문해보라. 선과 악 중에 어느 쪽을 많이 행했는가?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악을 훨씬 더 많이 범했고 심지어 목사가 된 이후도 여전히 그렇다. 선은 내속의 모든 의지 시간 경비를 다 쥐어짜내어 노력해도 가뭄에 콩 나듯 행한다. 죄는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순식간에 짓게 된다. 어느 순간 죄 중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란다. 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은 죄인 줄 이미 알고서 지으면 안 되지 하면서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 줄 알고서 죄 지으면 안 되지 하면서도 죄에 넘어가면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 속의 죄는 과연 무엇인가? 결국 본문이 말하는 대로 죄는 우리와 별개로 존재하는 독립된 가공의 힘일 수밖에 없다. 본문도 선을 행치 않으면 악행을 하게 된다고 해야 논리적 의미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대신에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했다. 요컨대 죄에게 져서 악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악행을 행한 것이 죄라는 타종교와는 개념이 다르다.

 

죄를 어떻게 절제할 수 있나?

 

죄의 개념이 다르면 죄의 절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성경은 지금 죄를 절제하지 못한 가인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죄에 져서 악행을 범하기에 가인이 악행을 범하기 전의 상태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살인을 범하기 전의 가인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를 했다는 점이다. 비록 첫 열매는 아니지만 자기 소산에서 정성껏 예물을 바쳤다. 그런데 하나님이 단번에 거절했다. 만약에 하나님이 가인을 아벨보다 조금 덜 사랑하는 정도라고 가인이 인식할 수 있었다면 아벨을 살인하는 지경까진 가지 않았을 수 있다.

 

말하자면 가인에게 하나님이 이번에는 첫 소산이 아니지만 다음에는 꼭 첫 소산으로 바치라고 깨우쳐주었다면 알아먹고 고칠 수 있을 텐데라는 반발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자기가 부정한 수입을 바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제사를 드렸는데 왜 아예 쳐다보지도 않느냐는 것이다.

 

가인의 생각에 결정적 하자가 있다. 무엇인지 알 수 있는가? 제사라는 행위와 예물의 종류와 품질에만 모든 초점이 모여 있다. 어쨌든 제사는 정성껏 드렸지 않느냐는 것이다. 거기다 첫 열매라고 이야기만 해주었어도 제대로 바쳤을 것이라는 불만은 첫 열매이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이고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된다는 뜻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가인을 향한 뜻은 무엇이었는가? 제물을 받지 않으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공손히 물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인은 그러지 않고 안색부터 변했는데 그 변한 행위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네는 어쨌든 제사를 드렸다는 그 행위로만 네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내가 너를 보는 관점은 다르다. 네 중심에 정말로 나를 온전히 사랑하느냐? 나는 네 예물과 제사의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너를 본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은 예물과 제사가 아니라 바로 네 자신이다. 왜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너이지 예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예물보다는 마음을, 최소한 예물과 함께 네 마음을 전부 바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가인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어도 된다. 문제는 끝까지 하나님의 진심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혔다. 결국 자기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고 무시하려는 죄의 본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나님이 경고한 그대로 죄의 세력이 문에 엎드려있는데 아무 대책 없이 나가다 곧바로 넘어진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작금 기독교, 교회, 목회자, 성도 모두 도매금으로 욕을 먹고 있다.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무래도 본문 표현을 빌리자면 죄를 절제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을 행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지난 경험이 말하듯이 번번이 졌다.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죄의 본질을 모르고 있으니,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절제가 되는가? 전반부에서 죄의 본질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고자 하는 우리 속과 밖의 너무나 교묘하고 끈질기며 편향성을 지닌 강력한 세력이다. 또 사탄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우리를 넘어뜨리려 두루 다닌다.

 

그럼 죄를 어떻게 절제해야 하는가? 그 악한 힘에서 계속해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수고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눈길이라도 주어야 한다. 생각을 오직 하나님 중심에 모아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올인(all-in) 해야 한다.

 

신자들도 그래서 기도, 예배, 성경공부, 큐티를 열심히 행한다. 문제는 또 실패를 연속한다는 것이다. 그럼 말씀과 기도에 게을렀나보다 다시 열심을 낸다. 그러나 여전히 그렇다. 그러니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메마른 신앙생활이 반복된다. 그런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 중심인 것은 아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높이고 치장하고 자랑하려는 모든 시도와 욕심을 없애야 한다. 또 다른 딜레마는 믿음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또 번번히 실패한다는 것이다.

 

가인이 잘못한 것은 딱 하나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을 진짜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를 중심에 둔 것이다. 금주는 그렇게 된 원인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랐다. 그분의 사랑에 대해 오해했다.

 

가인이 하나님이 예물을 받지 않을 때에 안색이 변하지 않고 겸손히 그 이유를 묻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만약에 그가 “하나님 혹시 저를 사랑하지 않는가요? 저는 여전히 하나님 사랑하는데요?”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인이 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약간 변했어도 틀림없이 하나님은 다 용서해주시고 예물을 받았을 것 아닌가?

 

예수를 믿는다는 참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가장 근본적 의미가 무엇인가? 기독교가 가장 기독교다운 그래서 신자가 가져야만 하는 믿음의 핵심, 본질, 그 시작과 끝이 무엇인가? 죄에 묶여 비참한 절망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러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너희를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발 알라는 것이다.

 

아무런 말씀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로마와 유대 당국에 항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신자들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그래서 십자가에 온전히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을 너희가 보면 내 사랑을 알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만큼 사랑을 보장하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믿음에 대해서 아주 잘못 가르쳐지고 있다. 자꾸만 신자더러 도덕적 종교적 노력, 수고, 희생만 요구 아니 강요하고 있다. 그런 쪽에 제대로 실적이 쌓여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반대급부를 비례해서 받을 수 있다고 사기까지 친다. 목회자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신자를 변화시키려고 즉, 죄를 절제시키려고 교회생활에 묶어서 성경의 교훈과 계명을 주입식으로 교육훈련 시킨다. 물론 좋은 일이고 꼭 해야 하지만 그런다고 반드시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실제 삶에서의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친밀한 교제 동행이다. 어떤 일에서든 그분과 씨름하여 더 깊이 그분을 알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그분의 너무나 풍성하고 오묘하며 완벽하고 거룩한 진리, 선, 아름다움 앞에 진심으로 항복하는 것이다. 정말로 그분을 만나게 되면 저절로 항복하게 된다. 항복 아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말해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비해서 그분이 나를 아는 것은 비교조차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분은 나의 앉고 일어섬은 물론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 훤히 꿰뚫고 계신다는 사실을 내가 매일 확인해 나가는 작업이 믿음이다.

 

교회에 봉사 헌금 많이 했어도 고난이 닥치니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고통이 가중된다. 그럼에도 실망치 않고 그분만 소망하면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유익이요, 합력해서 선으로 바뀌어져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목도 체험하는 실적이 쌓여야 한다.

 

바꿔 말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바친 실적을 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가 항복한 실적이 쌓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닷가에서 모래 한 알 집어든 것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해변 전체의 모래알만큼 크고 많다는 것을 알아나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설 리는 결코 없다. 하나님의 반대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성경,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죄다. 예수를 믿고 나면 사실상 죄에 민감하고 아무래도 이전보다는 훨씬 덜 악행을 하고 더 많은 선행을 한다. 그러나 보이는 여건, 사건, 사람에 조금만 부정적 그림자가 드리우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곧바로 자기가 되살아난다. 죄를 절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는 사실상 없다. 능력을 오해하지 않으니 천일기도도 하지 않는가? 대신에 거의 다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을 오해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신자의 실패는 그분의 사랑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되고 그래서 죄를 절제할 수 없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은 정말로,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사건 어느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다는 사실을 숱한 체험을 통해 전혀 의심 없어져야만 죄를 절제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2/14/2016

List of Articles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무지개 언약의 참 뜻 (창세기강해 #57 - 창9:8-17)

무지개 언약의 참 뜻 창세기 강해 (5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

  • master
  • 2016-06-19
  • 조회 수 3029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계명의 진짜 의미(창세기강해 #56 - 창9:1-7) [1]

피 채로 먹지 말라는 계명의 진짜 의미 창세기 강해 (56)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

  • master
  • 2016-06-12
  • 조회 수 2910

하나님 심판대의 네 가지 통과절차 (창세기강해#55 - 창8:20-22)

하나님 심판대의 네 가지 통과절차. 창세기 강해 (55)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

  • master
  • 2016-06-05
  • 조회 수 478

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4 - 창6:15,16 & &7:10-12)

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4)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찌니라.”(창6:15,16) “칠...

  • master
  • 2016-05-29
  • 조회 수 312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강해 #53 - 창6:13-17)

하나님의 눈에서 자비를 보는가? 창세기 강해 (5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

  • master
  • 2016-05-22
  • 조회 수 438

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받고 있는가? (창세기강해 #52 - 창6:8-12)

노아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 받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

  • master
  • 2016-05-15
  • 조회 수 448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강해#51-창6:5-7)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 창세기 강해 (51)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뒤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

  • master
  • 2016-05-08
  • 조회 수 346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창세기강해 #50-창6:1-4)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창세기 강해 (50)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

  • master
  • 2016-05-01
  • 조회 수 1001

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강해 #49-창4:25-5:5) [1]

기독교 원시신앙 수준에도 못 미치는 목사 창세기 강해 (49)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

  • master
  • 2016-04-10
  • 조회 수 3540

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눅22:31-34)

주님의 고난에 참으로 동참하고 있는가? 고난주간 설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

  • master
  • 2016-03-20
  • 조회 수 432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창4:16-22)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않는 교회들 창세기강해 (48)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

  • master
  • 2016-03-13
  • 조회 수 465

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강해#47-창4:15&23,24)

라멕 만큼 치사하고 사악했던 목사 창세기 강해 (4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

  • master
  • 2016-03-06
  • 조회 수 482

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강해 #46 - 창4:9-15)

믿음은 이성과 상충하는가? 창세기 강해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 master
  • 2016-02-29
  • 조회 수 412

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강해#45 - 창4:9-12)

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강해 (4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 master
  • 2016-02-21
  • 조회 수 349

죄의 소원과 죄의 절제 (창세기강해 #44 - 창4:7)

죄의 소원과 절제 창세기 강해 (44)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7) 죄에 대한 성경 최초의 진술 인간이 에덴 밖에 저지른 ...

  • master
  • 2016-02-15
  • 조회 수 641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진짜 이유 (창세기강해 #43 - 창4:2-8) [1]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이유 창세기 강해 (43)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 master
  • 2016-02-08
  • 조회 수 1135

가인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 (창세기강해 #42 - 창4:2-8)

가인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 창세기 강해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

  • master
  • 2016-01-31
  • 조회 수 654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창세기강해 #41 - 창 4:1) [1]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창세기 강해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성경이 말하는 바는?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꼭 알아야만 할...

  • master
  • 2016-01-26
  • 조회 수 2597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창세기강해 #40 - 창3:4-7)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창세기 강해 (40)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

  • master
  • 2016-01-17
  • 조회 수 425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신자들 (창세기강해 #39 - 창2:15-17)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신자들 창세기 강해 (39)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 master
  • 2016-01-10
  • 조회 수 531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