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소원과 절제

창세기 강해 (44)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7)

 

 

죄에 대한 성경 최초의 진술

 

인간이 에덴 밖에 저지른 최초의 죄는 친형제 살인이다. 에덴 밖에서 지은 최초의 죄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최초의 죄라는 뜻이다. 또 여러 죄를 지은 후가 아니라 최초의 죄라는 것은 누구나 언제든 쉽게 지을 수 있는 죄라는 뜻이다. 성경의 이 진술은 참으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데 죄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쉽게 저지르는 죄는 주로 어떤 것인가? 약속을 어기는 것, 거짓말 하는 것, 말로 남을 비난하는 정도 아니겠는가? 살인은 평생을 가도 지을 수 없는 가장 극악한 죄로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럼 성경이 인간이 범한 첫 죄를 살인이라고 기록한 것이 심하게 과장된 종교적 협박인가?

 

성경에 대한 의문은 성경 안에 해답이 있다. 오늘의 본문은 성경에서 ‘죄(罪)’라는 단어를 최초로 언급한 구절이다. 자세히 보면 특이한 사항 즉, 우리 생각과 다른 죄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했다. 죄를 스스로 행동이 가능한 독립된 존재라고 묘사하고 있다.

 

사기, 도적, 폭행, 간음, 살인 등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가? 아무리 충동적 우발적 죄라고 해도 그 출발과 최종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본문처럼 죄를 인간과 별개의 독립된 양상으로 보는 바로 이점이 타종교와 기독교가 가장 다른 점이다. 신자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사탄이 죄인가?

 

의인법으로 묘사한 그대로 본문이 말하는 죄를 일차적으로 사탄이라고 해석한다. 베드로는 본문에 근거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말했다.

 

“우는 사자”는 배가 고픈 사자다. 기세가 맹렬할 뿐 아니라 용의주도하게 무엇이든 잡아먹을 태세다. “두루 다닌다.”고 했다. 다니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목사도 포함해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먹이 감이다. “삼킬 자를” 찾는다. 죄송하지만 팔다리 한두 개 뜯어먹고서 놓아주지 않는다. 완전히 멸망시킨다. 정말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한글개역본이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고 해서 자칫 가인에게 죄의 소원이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최근의 번역본들은 물론 개역개정본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번역했다. 베드로 사도의 선언과 같이 사탄이 가인을 삼키려 노린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두루 다닌다고 했고 본문은 문에 엎드린다고 했지만 사실은 같은 뜻이다. 문(門)은 인간이 활동을 하러 집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첫 번 경계선이다. 혼자만 있던 상태를 벗어나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문 앞에 엎드리고 있다는 것은 타인과 교통하며 사회활동을 하자마자, 또 모든 일상생활에 사탄이 잠복해서 신자를 넘어뜨리려 한다는 뜻이다.

 

사탄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고 인간을 유혹에 죄에 빠트린 원흉임에는 분명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사탄이 죄 자체는 아니다. 본문에서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는데 완전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사탄을 다스릴 수 있는지 여부다. 이브가 죄에 빠질 때도 사탄은 직접 나서지 않고 가장 간교한 뱀을 사용했는데도 맥없이 넘어갔지 않는가?

 

욥기에서 보듯이 사탄은 인간을 맘껏 농락하고 죽일 수 있는 능력도 가졌다. 그러나 한 가지 갖지 못한 것이 있다. 무엇인가? 바로 권세다. 사탄도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며 사탄을 지배할 권능은 하나님만이 가졌다.

 

사도행전에 보면 귀신들린 자들을 섣부르게 축사하려다 바울과 베드로는 알지만 너희는 알지 못한다고 거꾸로 덤벼들어 크게 혼 줄이 난 경우도 있지 않는가? 사탄은 인간이 대적할,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야만 대적할 수 있지 인간의 통치가 가능한 존재는 아니다. 본문이 하나님이 가인에게 사탄을 조심하라고 당부한 뜻은 분명 있지만 가인이 주체가 되어서 다스릴 대상은 사탄이 아니라 죄다.

 

죄가 인간과 별개인 이유는?

 

사탄이 죄가 아님에도 하나님이 죄를 인간과 별개의 존재처럼 묘사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탄은 알다시피 아담의 타락 이후에 예수님이 구세주로 초림 할 때까지 인간세상을 농락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묵인을 받은 상태다. 죄란 그래서 사탄이 인간을 갖고 놀기 위해 발휘하는 온갖 추하고 더럽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력이고 또 그것으로 인해 오염되는 모든 결과다.

 

사탄이 존재하고 지향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다. 인간을 질병과 환난과 타락에 빠트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더러 하나님을 등지게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부귀영화를 넘치도록 부어주고, 심지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 인간적인 선한 생각과 활동까지 하게 만든다. 그 단적이고도 역설적인 예가 바로 불신자들이 나는 하늘 우러러 부끄러운 점 하나 없기에 예수 믿을 필요 없다고 큰 소리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두렵고도 엄청난 잘못 아니 죄인 줄 모르고 떠벌리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자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왔다. 따 먹은 행위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그분의 계명을 위반한 것은 사실은 죄의 결과다. 그 이전에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지음으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죄다.

 

또 그 이전에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한 것,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거한 것이 죄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죄로 오염된 결과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의 본성에 죄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 혐오감의 모습으로 뿌리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성경이 죄가 문에 엎드렸다고 하는 데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인간을 얽어매어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세우고자 하는 끈질기고도 교묘한 사탄의 어두운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인간 세상에 단 한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 본성 안에 하나님을 믿지도 따르지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마음을 태생적으로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를 최고 우위에 세우려는 고집과 일방적 편향성이 모든 사람에게 작동된다. 모두가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니 필연적으로 인간사회에 시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인간끼리 분리를 부른다. 그렇게 되도록 사탄은 살살 부채질,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만 생기게 만든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자기 안팎에서 죄의 세력의 지배 아래에 있는 절망적이고도 비참한 상태에 빠져버렸다. 죄의 세력이 사탄은 물론 인간 본성에도 있다면 인간이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도 즉, 혼자 있을 때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꼴이다. 아니 혼자 있을 때에 더 죄를 쉽게 짓게 된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가인 즉, 인간더러 죄를 다스리라고 한 것이다.

 

인간이 죄의 세력에 지배당하는 절망적 상태라고 해서 오해는 말아야 한다. 모든 인간이 흉포한 성격을 지니고 항상 죄를 짓고 싶고 또 짓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느 누구도 사탄에게 넘어가거나 죄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그분의 도덕적 성품을 부여 받았다. 비록 모순, 왜곡, 파손되긴 했어도 양심의 형태로 누구에게나 남아 있다.

 

그렇지만 솔직히 자문해보라. 선과 악 중에 어느 쪽을 많이 행했는가?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악을 훨씬 더 많이 범했고 심지어 목사가 된 이후도 여전히 그렇다. 선은 내속의 모든 의지 시간 경비를 다 쥐어짜내어 노력해도 가뭄에 콩 나듯 행한다. 죄는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순식간에 짓게 된다. 어느 순간 죄 중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란다. 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은 죄인 줄 이미 알고서 지으면 안 되지 하면서도 짓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 줄 알고서 죄 지으면 안 되지 하면서도 죄에 넘어가면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 속의 죄는 과연 무엇인가? 결국 본문이 말하는 대로 죄는 우리와 별개로 존재하는 독립된 가공의 힘일 수밖에 없다. 본문도 선을 행치 않으면 악행을 하게 된다고 해야 논리적 의미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대신에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했다. 요컨대 죄에게 져서 악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악행을 행한 것이 죄라는 타종교와는 개념이 다르다.

 

죄를 어떻게 절제할 수 있나?

 

죄의 개념이 다르면 죄의 절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성경은 지금 죄를 절제하지 못한 가인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죄에 져서 악행을 범하기에 가인이 악행을 범하기 전의 상태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살인을 범하기 전의 가인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를 했다는 점이다. 비록 첫 열매는 아니지만 자기 소산에서 정성껏 예물을 바쳤다. 그런데 하나님이 단번에 거절했다. 만약에 하나님이 가인을 아벨보다 조금 덜 사랑하는 정도라고 가인이 인식할 수 있었다면 아벨을 살인하는 지경까진 가지 않았을 수 있다.

 

말하자면 가인에게 하나님이 이번에는 첫 소산이 아니지만 다음에는 꼭 첫 소산으로 바치라고 깨우쳐주었다면 알아먹고 고칠 수 있을 텐데라는 반발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자기가 부정한 수입을 바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제사를 드렸는데 왜 아예 쳐다보지도 않느냐는 것이다.

 

가인의 생각에 결정적 하자가 있다. 무엇인지 알 수 있는가? 제사라는 행위와 예물의 종류와 품질에만 모든 초점이 모여 있다. 어쨌든 제사는 정성껏 드렸지 않느냐는 것이다. 거기다 첫 열매라고 이야기만 해주었어도 제대로 바쳤을 것이라는 불만은 첫 열매이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이고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된다는 뜻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가인을 향한 뜻은 무엇이었는가? 제물을 받지 않으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공손히 물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인은 그러지 않고 안색부터 변했는데 그 변한 행위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네는 어쨌든 제사를 드렸다는 그 행위로만 네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내가 너를 보는 관점은 다르다. 네 중심에 정말로 나를 온전히 사랑하느냐? 나는 네 예물과 제사의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너를 본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은 예물과 제사가 아니라 바로 네 자신이다. 왜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너이지 예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예물보다는 마음을, 최소한 예물과 함께 네 마음을 전부 바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가인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어도 된다. 문제는 끝까지 하나님의 진심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혔다. 결국 자기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고 무시하려는 죄의 본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나님이 경고한 그대로 죄의 세력이 문에 엎드려있는데 아무 대책 없이 나가다 곧바로 넘어진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작금 기독교, 교회, 목회자, 성도 모두 도매금으로 욕을 먹고 있다.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무래도 본문 표현을 빌리자면 죄를 절제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을 행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지난 경험이 말하듯이 번번이 졌다.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죄의 본질을 모르고 있으니,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절제가 되는가? 전반부에서 죄의 본질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고자 하는 우리 속과 밖의 너무나 교묘하고 끈질기며 편향성을 지닌 강력한 세력이다. 또 사탄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우리를 넘어뜨리려 두루 다닌다.

 

그럼 죄를 어떻게 절제해야 하는가? 그 악한 힘에서 계속해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수고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눈길이라도 주어야 한다. 생각을 오직 하나님 중심에 모아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에게 올인(all-in) 해야 한다.

 

신자들도 그래서 기도, 예배, 성경공부, 큐티를 열심히 행한다. 문제는 또 실패를 연속한다는 것이다. 그럼 말씀과 기도에 게을렀나보다 다시 열심을 낸다. 그러나 여전히 그렇다. 그러니 계속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메마른 신앙생활이 반복된다. 그런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 중심인 것은 아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높이고 치장하고 자랑하려는 모든 시도와 욕심을 없애야 한다. 또 다른 딜레마는 믿음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또 번번히 실패한다는 것이다.

 

가인이 잘못한 것은 딱 하나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을 진짜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를 중심에 둔 것이다. 금주는 그렇게 된 원인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랐다. 그분의 사랑에 대해 오해했다.

 

가인이 하나님이 예물을 받지 않을 때에 안색이 변하지 않고 겸손히 그 이유를 묻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만약에 그가 “하나님 혹시 저를 사랑하지 않는가요? 저는 여전히 하나님 사랑하는데요?”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인이 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약간 변했어도 틀림없이 하나님은 다 용서해주시고 예물을 받았을 것 아닌가?

 

예수를 믿는다는 참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가장 근본적 의미가 무엇인가? 기독교가 가장 기독교다운 그래서 신자가 가져야만 하는 믿음의 핵심, 본질, 그 시작과 끝이 무엇인가? 죄에 묶여 비참한 절망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러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너희를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발 알라는 것이다.

 

아무런 말씀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로마와 유대 당국에 항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신자들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그래서 십자가에 온전히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을 너희가 보면 내 사랑을 알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만큼 사랑을 보장하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믿음에 대해서 아주 잘못 가르쳐지고 있다. 자꾸만 신자더러 도덕적 종교적 노력, 수고, 희생만 요구 아니 강요하고 있다. 그런 쪽에 제대로 실적이 쌓여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반대급부를 비례해서 받을 수 있다고 사기까지 친다. 목회자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신자를 변화시키려고 즉, 죄를 절제시키려고 교회생활에 묶어서 성경의 교훈과 계명을 주입식으로 교육훈련 시킨다. 물론 좋은 일이고 꼭 해야 하지만 그런다고 반드시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실제 삶에서의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친밀한 교제 동행이다. 어떤 일에서든 그분과 씨름하여 더 깊이 그분을 알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그분의 너무나 풍성하고 오묘하며 완벽하고 거룩한 진리, 선, 아름다움 앞에 진심으로 항복하는 것이다. 정말로 그분을 만나게 되면 저절로 항복하게 된다. 항복 아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말해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비해서 그분이 나를 아는 것은 비교조차 불가능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분은 나의 앉고 일어섬은 물론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까지 훤히 꿰뚫고 계신다는 사실을 내가 매일 확인해 나가는 작업이 믿음이다.

 

교회에 봉사 헌금 많이 했어도 고난이 닥치니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고통이 가중된다. 그럼에도 실망치 않고 그분만 소망하면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유익이요, 합력해서 선으로 바뀌어져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목도 체험하는 실적이 쌓여야 한다.

 

바꿔 말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바친 실적을 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가 항복한 실적이 쌓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닷가에서 모래 한 알 집어든 것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해변 전체의 모래알만큼 크고 많다는 것을 알아나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설 리는 결코 없다. 하나님의 반대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성경,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죄다. 예수를 믿고 나면 사실상 죄에 민감하고 아무래도 이전보다는 훨씬 덜 악행을 하고 더 많은 선행을 한다. 그러나 보이는 여건, 사건, 사람에 조금만 부정적 그림자가 드리우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곧바로 자기가 되살아난다. 죄를 절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는 사실상 없다. 능력을 오해하지 않으니 천일기도도 하지 않는가? 대신에 거의 다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을 오해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신자의 실패는 그분의 사랑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되고 그래서 죄를 절제할 수 없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은 정말로,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사건 어느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선하고 옳다는 사실을 숱한 체험을 통해 전혀 의심 없어져야만 죄를 절제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2/1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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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강해#45 - 창4:9-12)

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강해 (4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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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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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소원과 죄의 절제 (창세기강해 #44 - 창4:7)

죄의 소원과 절제 창세기 강해 (44)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7) 죄에 대한 성경 최초의 진술 인간이 에덴 밖에 저지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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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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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진짜 이유 (창세기강해 #43 - 창4:2-8) [1]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이유 창세기 강해 (43)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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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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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 (창세기강해 #42 - 창4:2-8)

가인은 아벨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였다. 창세기 강해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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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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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창세기강해 #41 - 창 4:1) [1]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 창세기 강해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성경이 말하는 바는?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꼭 알아야만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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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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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창세기강해 #40 - 창3:4-7)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창세기 강해 (40)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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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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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신자들 (창세기강해 #39 - 창2:15-17)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신자들 창세기 강해 (39)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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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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