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60-62 매일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신자들

조회 수 319 추천 수 17 2011.03.25 05: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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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신자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0-62)


See, I told you!

성경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맨 처음 어떤 말을 했겠습니까?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일설에 의하면 “까꿍! 놀랬지? 네 나 보이나?”라고 했답니다. 똑 같은 퀴즈를 미국에서 내면 그 답은 뭐가 될 것 같습니까?  “See, I told you!” 아니겠습니까? 물론 난센스 개그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정식으로 성경 퀴즈 하나를 내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하자 아무 말씀 없이 그윽이 쳐다만 보셨습니다. 그 눈빛이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말로 왜 베드로가 예수님이 쳐다보자마자 밖으로 나가 통곡을 했을까요?

이에 대한 정답 또한 “See, I told you!”일까요? 우리말로 하면 “봐라. 내가 뭐라고 하더냐?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말했지 않았느냐?”일까요? 그래서 베드로도 “대체 왜 내가 왜 이런 나쁜 짓을 했을까? 스승이 그럴 것이라고 미리 경고까지 주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말이야.”라며 회개하고 통곡했을까요?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선포와 함께 공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기 지은 모든 죄들을 회개하고 예수를 믿습니다. 또 회개해야만 구원을 받는 것으로 압니다. 나아가 믿은 후에도 신앙생활의 초점을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더 거룩해지는 일에 맞춥니다. 아닙니다.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런 도덕적 회개와 기독교 신앙, 특별히 구원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성결해지는 모습은 어디까지나 제대로 믿고 난 이후의 결과적 모습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죄 안 짓고 불신자보다 훨씬 선하게 사는 것을 신앙의 우선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구원을 얻으려고 수도원에서 꿇어 엎드려서 그런 회개를 철저히 행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행했는가 하면 고해 성사를 들어주던 주임 신부가 듣다듣다 지쳐서 “이제 되었다. 네 엄마를 죽인 죄를 범하지 않은 이상 구원은 확보되었다.”고 했는데도 자신에겐 그런 확신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번은 반나절도 넘게 독방에서 꿇어 엎드려 생각나는 대로 회개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비유하면 초등하교 시절에 여학생들 고무줄 끊고 도망간 죄까지 다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젠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여주었다는 마음의 평화가 생겨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지금껏 회개했던 그 어떤 죄보다 더 큰 죄가 떠올라서 절망에 빠졌다고 실토했습니다.

베드로는 루터 같은 회개를 해야할 만큼 죄를 많이 지은 자의 대표가 아닙니다. 본문의 통곡도 진짜로 의리 없게 스승을 배반한 불의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 표현대로 하자면 에녹, 노아 같이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뿔뿔이 다 도망 가버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스승의 안위를 염려해 쫓아간 자는 그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따져도 그는 당시 지구상에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서있던 자였습니다.

불신자도 세상 법이나, 학교 때 배운 윤리나, 양심에 어긋난 짓을 하면 반성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통곡하며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은 여러분도 자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거나, 성도 간에 거짓말 한 죄 갖고서 통곡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솔직히 없지 않습니까? 거의 모든 이가 잘못된 행동들을 반성하는 정도로는 통곡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는 뜻도 이런저런 잘못과 나쁜 습관 등을 끄집어내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 요한의 회개입니다.

베드로 통곡의 의미

베드로가 통곡했던 심정을 곰곰이 헤아려 보십시오. 한 마디로 표현하면 틀림없이 “나라는 인간이 겨우 이 꼴밖에 안 되었는가?”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아주 순수하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겟네마네 동산에서, 아니 그 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을 때부터 스승을 보호하려 했던 그의 맹세는 분명 순수한 진심이었습니다. 실제로 동산에서 직접 칼을 들고 앞장섰지 않습니까? 여차하면 자기 생명마저 걸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절대 비겁하지 않았고 깨끗한 심령을 지녔고 열정에 넘친 자였습니다. 수시로 성급히 나서다 실수하는 바람에 주님께 꾸중들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만큼 자기가 생각하는바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말하자면 속에 음흉한 계교를 숨기고 이것저것 재는 사람이 아니라는 반증이지 않습니까?

그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가 스승을 보호하고 싶은 소원은 분명 갖고 있었지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칼과 창 같은 무기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소망과 계획을 갖고 있어도 자기 생명이 걸리는 위급한 경우가 생기면 순식간에 그 소망과 계획은 한갓 휴지 조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동산에선 주님이 큰 능력으로 보호해 주리라 기대했기에 앞장 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 대제사장의 집 뜰에선 스승이 묶여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니까 자기도 똑 같은 꼴이 될 것 같아 덜컥 겁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삼년을 따라다니며 보고 배웠지만 사흘만 굶으면 칼 들고 강도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입니다.

인간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아주 연약하고 무능합니다. 우리 앞날이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영적인 무능입니다. 우리 속에 동아리를 틀고 있는 죄의 본성이 얼마나 교묘하고 치사하며 음흉하며 강력하고 끈질긴지 모릅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자기만은 끝까지 순수하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으리라  스스로 착각했다는 점입니다. 내 꼴이 겨우 이것 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말은 그 순간에 비로소 그렇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의 실체를 정확하게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자기도 스스로 자기에게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회개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가 남들보다 의롭다는 자부심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속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가장 잘 속이는 자가 바로 자신임도 아는 것입니다.

또 그런 착각 때문에 나에게 예수님이 전혀 필요 없다고 큰소리쳤던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였음을, 사실은 죽어 마땅한 죄였음을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를 몰랐음이 자신의 참 생명을 좀 먹고 삶의 모든 면에서 실패로 이끌었던 가장 큰 원인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고달프고 덧없는 까닭이 세상은 험악하고 다른 사람이 영악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현실적으로는 풍부하게 채워나가도 여전히 갈급하고 허무한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한 데서, 또 그 자부심을 더 키우려고만 자기 자랑만 행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불신자들도 때로는 자기 의로 선한 일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절대 되지 못한다는 점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릅니다. 어쩌다 눈곱만한 선이라도 행한 후에는 스스로의 교만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커집니다. 참 회개란 바로 그런 착각 때문에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해왔고, 허공을 치는 싸움만 하여서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아왔다는 실토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 대로 밑 빠진 웅덩이에 물 붙기만 해왔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통곡의 실체

통곡은 어떤 울음입니까? 도무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정하려야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왜 우는지 구체적 이유가 없으면서도 그저 내 신세가 서럽고 한탄스러워서 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단순히 잘못한 행동 한두 가지로 절대 그런 울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통곡이란 마치 자신의 전부가 떠내려 가버리는 듯한 울음입니다. 속에서 터져 나오기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우는 울음입니다.

베드로의 통곡 또한 자신의 전존재가 정말로 썩고 썩어서 추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실감한 울음입니다. 이제 곧 이스라엘의 회복을 책임지고 앞장 설 최고의 일군이라고 자부했지만 알고 보니 사실은 버러지 한 마리보다 못하더라는 것을 철두철미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새 이스라엘 왕국의 국무총리가 될 것이라 은근히 기대했던 천하 최고의 의인의 자리에서, 하녀의 닦달에도 겁나 스승을 배반하는 너무나 치사한 천하 최고의 죄인의 자리에까지 한 순간에 수직낙하면서 터져 나온 외마디 비명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6시간 넘게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자부했다가 일어서는 순간 너무나 큰 죄가 떠올랐을 때의 영적인 절망감을 추측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마지막으로 떠올랐던 큰 죄도 당장에 문제가 되었겠지만, 지금도 회개치 못한 더 큰 죄가 분명히 자기 속에 동아리 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서서히 감을 잡고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것 아닙니까?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뿌리가 진짜로 어디까지일까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도 속으로는 통곡했을지 모릅니다.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심지어 가톨릭까지 합쳐서 죄를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만 봅니다. 그러니까 그 범한 행동들을 다 뉘우치고 고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15:18-20a) 쉽게 말하면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썩고 또 썩어빠진 죄인이라서 죄를 태생적으로 습관적으로 짓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면 죄를 고치면 되지만 죄인이라서 죄를 짓는다면 죄인부터 뜯어 고쳐야 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통곡은 그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라는 육체, 지정의, 영혼이 다 합쳐진 전 인격체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역사입니다.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가르친 말씀의 뜻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 율법을 지켜야만, 즉 죄 된 행동을 고쳐야만 구원받는다고 믿는 니고데모로선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속을 완전히 까뒤집어서 통곡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세상 중에 그런대로 의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저주하면서까지 정죄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알다시피 바리새인, 사두개인 같은 유대 종교지도층 오직 한 부류입니다. 우상 숭배를 하는 로마인, 이방인도 대놓고는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로 그들이야말로 스스로 의인이라고 가장 크게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실제로도 선행, 구제, 금식, 기도 등에 열심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선 분명히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전 한 복판에서 하늘을 향해 떳떳하게 자신은 의롭다고 자랑하며 기도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놀랍게도 요한복음 6:44에선 그들을 곧바로 마귀의 자식이라고 야단쳤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거짓의 아비에게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4에서 바울은 불신자들의 영에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사단이 미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불신자가 신자보다 더 포악하며 죄 지을 궁리만 하거나 귀신들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해보면 “내가 왜 죄인이냐,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 설령 어쩌다 잘못한 일 있어도 다 반성하고 고치고 있다. 뒤에서 호박씨 까는 예수쟁이들보다는 낫다”고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큰소리치지 않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엔 사단의 자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분은 이 세상에 삼위 하나님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은 흔적이 남아 있기에 분명히 선해지고 싶은 소망이 있고  때로는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의 선행도 하지만 온전한 선을 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선을 행할수록 교만해지기만 합니다. 또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작은 선행 한 번 한 것 갖고 스스로 선하다고 자부합니다. 반면에 항상 죄 가운데서 악행을 즐기며 살면서도 자신만은 의롭다고 여깁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 뿐이라는 예수님의 지적이 너무나 확실한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넘어져야 할 자리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문제는 바로 신자들입니다. 예수 믿어서 회개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모릅니다. 자신의 전존재가 뒤집어지는 통곡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니까 진짜 말 그대로 믿어보려 했을 뿐입니다. 온전한 확신도 없이 밑져야 본전으로 천국 보험 드는 식으로 믿기로 결단합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아주 잘 믿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져 여전히 사단이 미혹하는 영에서 벗어나지 않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가라지와 알곡이 추수 때까지 교회 안에 섞여 있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제대로 거듭난 신자마저 큰 오류를 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하니까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되는 것만 목표로 배우고 훈련합니다. 솔직히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 너무 무리 아닙니까? 아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다. 절대로 그분의 발꿈치에도 따르지 못합니다. 동생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헤롯 아그립바를 야단치다가 목 베어 순교당한 그 의로웠던 침례 요한마저 예수님의 발등상에도 못 미친다고 자백했지 않습니까?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하여 그렇게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며 또 신자라면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과, 도무지 그럴 수 없기에 주님의 긍휼부터 구하는 것은 천양지차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들이 성화를 이루는 과정 중에도 사단에게 시험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흉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훨씬 더 교묘하고 치사합니다. 가장 많이 쓰는 수법은 바로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자신에게 속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 하나만 들어볼까요? 흔히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을 보고 삼년을 따라다닌 수제자가 어찌 저럴 수 있는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시에 살았다면 과연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다른 제자들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다 도망갔을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제사장의 선동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 속의 한 사람이거나, 스승을 은 삼십에 팔아먹은 유다 둘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배운지 삼년 밖에 안 되어 그랬지만 우리는 수십 년이 지나도 마찬가지거나 우리가 더 악하다는 말입니다.        

작금 교회 안에 설교,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온갖 프로그램을 많이 해도 왜 진정으로 변화되는 교인들이 적습니까? 여전히 죄 된 행동 몇 가지 반성해서 고치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줄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선 아무리 노력해도 성화는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도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짓는 죄가 선행, 아니 회개하는 것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솔직히 아무리 믿어도 여전히 내 꼴이 왜 이 모양인지 내가 봐도 도무지 신자답지 않다는 한탄을 얼마나 자주 합니까?

여러분 그런데 바로 그 한탄이 바로 성화의 첫걸음이자 본질인지 아십니까? 바울처럼 나에게 선을 행할 소망은 있으나 그럴 능력이 없다고 탄식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내 꼴이 왜 아직 이 꼴인지 속에서부터 통곡이 터져 나와야 비로소 의로움과 선함으로 한 걸음이라도 옮길 수 있습니다.

성경이 신자들에게 도덕적 종교적 권면을 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붙는 까닭입니다. 신자로서 선하게 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머리 둘 곳 없어도 당신이 가신 좁은 길을 따라갈 때에 비로소 참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 첫 걸음이 바로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이렇게 뜨겁게 했는데, 교회 봉사를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이웃을 이렇게까지 수고 희생하며 섬겼으니, 교회도 이만큼 부흥 성장시켰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정도 의로워졌겠지라는 바로 그 착각에부터 헤어나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 순간이라도 놓치면 곧바로 우리는 사단의 꾐에 넘어가는 너무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추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항상 절망 가운데 빠져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그 맨 밑바닥의 자리가 참 된 승리의 출발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자가 신자다워지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십자가 긍휼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여전히 스승을 부인 배반하는 자라도, 내가 주님을 붙드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그 모습 그대로 끝까지 붙드시고 사랑하시는 힘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확신이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바로 서있다고 느끼는 순간 사단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장소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렸을 때뿐입니다. 넘어지더라도 주님 안에서만 넘어지고 또 주님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1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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