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목사는 분신자살을 하지 않는가?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15:42-47)
자유 이라크 전쟁
며칠 전 Freedom Iraq 전쟁을 수행중인 미군이 반 후세인파인 쿠르드 족의 거점인 모술에 입성할 때에 독재에 시달린 이라크인들이 종려나무를 들고 나와 환영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 갈 때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12: 12, 13). 예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해 낸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그 일주일 전에 올라갔다.
폭풍우를 잠재우고, 중풍, 나병, 봉사 등 온갖 불치병을 낫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며,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그가 로마의 압제에서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수 있으리라 믿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메시야)를 이제 구원하소서(히브리어 호산나의 뜻)라고 하며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 열광적으로 맞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저히 로마를 물리칠 궁리를 하지 않고 이제껏 해 왔던 그대로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 거하면서 세리와 죄인과 교제하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논쟁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성전에서 장사치를 몰아내고, 심지어 예루살렘을 해방할 시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곧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긍심인 성전마저 돌 위에 돌이 하나라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한다. 처음의 그 열렬했던 환영 분위기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저주와 증오로 변했으며 결국 채 일주일도안 되어 모든 조롱과 수치와 고난을 받으며 유월절 전 날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주님의 마지막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일주간은 고난만 겪으시고 마감했다. 그래서 부활절 전 일주일을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주간으로 지내며 많은 행사를 한다. 그 중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은 큰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지고 걸어가는 것이며 심지어 직접 십자가에 몸을 묶고 손과 발에 못을 박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행사는 아주 못 마땅할 뿐 아니라 아예 안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형식적이라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일을 기념할 때에 이왕이면 사건을 그대로 재현해 보면 더 생생한 느낌을 줄 수 있어서 좋다. 문제는 십자가의 수난만큼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재현해 내려고 노력해도 그 고난의 본질과 의미를 훼손을 했으면 했지 절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뜻으로 육체적 고통에도 도저히 동참할 수 없다.
드라큐라 백작
드라큐라 백작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흡혈귀 뱀파이어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뜻이 아니다. 드라큐라는 어디까지 소설인데 중세 루마니아에 드라큐라 백작이라고 실존했던 아주 잔인한 폭군 성주를 모델로 삼았다. 아이들이 드라큐라라는 이름만 들어도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시사하는 이런 일화가 전해내려 온다. 회교도들이 침략해온 적이 있었는데 전쟁을 쳐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버렸다. 정말 드라큐라의 이름만 듣고도 공포에 질린 것이다. 백작이 죄수 수 백 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해서 회교도들이 쳐들어 오는 길목의 양 쪽에 늘어 세웠는데 그 죽어가는 광경이 너무 끔찍하고 처참해 싸울 생각도 못 해보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인류가 개발한 방법 가운데 최고로 고통이 심한 처형법이다. 바로 죽지 않고 며칠 달렸다죽는데 독수리가 자기 눈을 파먹는 것을 멀쩡히 보고 당해야만 한다. 덕장에서 오징어가 산 채로 꼬지에 끼여져 말려 죽어 가는 고통을 오징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십자가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가장 단순한 육신적 고통만으로도 나무 십자가를 메고 거리를 행진하는 것으로는 예수님이 당하신 것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맛 볼 수 없기에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절대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우둔하고 완악하며 치사하고 비겁한 인간이 그것도 부패한 본성에 바탕을 둔 어리석은 지혜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의 전 역사를 통틀어 단 한 번 있었던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다. 모든 사람을 짓누르고 있는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를 자신의 양 어깨에 모두 짊어지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그 심정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한 그분의 심령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안타까움의 가장자리도 우리는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 긍휼, 자비는 전 우주를 동원해도 담아낼 그릇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라도 청중에게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한다. 심지어 성경의 기록된 문자만으로도 부족하다. 오직 하나님의 속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혼의 좌소를 뒤집고 들어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킬 때만이 십자가를 알 수 있다. 정확하게는 머리로 알 수 있기보다는 우리 전 존재로 반응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성령의 간섭에 의한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의 결과일 따름이다.
분신하는 목사는 왜 없는가?
나무로 된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정도는 마치 수박 겉만 핥고는 수박 맛을 아는 양하는 것과 같다. 수박 껍질은 아무리 핥아야 실제 맛과는 전혀 상관없다. 십자가의 육신적 고통에 정말 동참하려면 한 번 정도는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 한 사람이 완전히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못 박혀 며칠이고 죽을 때까지 달려 있어야 한다. 그것도 9.11테러가 난 쌍둥이 빌딩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CNN 방송이 24시간 실황으로 전 세계에 중계하는 가운데 말이다. 지금 이 세대는 도덕적으로 완전히 갈 데까지 가버렸다. 서로 총을 쏴대며 죽어가는 실제 전투 장면과 피 흘려 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나뒹구는 모습이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에 공중파를 타고 있다. 십자가 처형이라고 중계 못할 것이 무엇 있겠는가?
그래서 모든 인류가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죄를 감당했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와 쾌락에 탐닉하여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려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 버림 받은 죽음이 얼마나 처참하며 하나님의 형벌의 실체를 어떠한지 깨달아야 한다. 신자들 또한 말로 기도할 때만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피 값으로 구원해 주신 은혜’가 과연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알아야 한다.
죄송한 이야기로 월남전이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여 스님은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 자살을 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왜 목사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는가? 자살이 죄이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왜 정말 피 흘려 죽기 까지 죄악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가 말이다. 기껏 나무토막 끌고 가는 것으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동참했다고 기독교인들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낮추고 주님을 우습게 만드는 꼴이다. 이 세상의 죄악과 남의 고통을 위해 실제로 대신 죽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오늘부터 고난 주간이 시작이다. 금식과 기도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동참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마음을 갖는가? 외식, 쇼핑, TV시청 등을 금하고 경건하게 몇 끼 정도 금식한다. 아주 잘 하는 일이며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겨우 한 끼를 굶었는데도 이렇게 힘든 데 주님은 십자가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고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순진하고 유치한 생각에 불과하다. 마치 우리가 주님의 고통을 염려하고 걱정해주는 양 안쓰러워하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 그 분이 우리의 고난을 염려하고 안타까워 하셔서 피가 흐르도록 기도하셨고 피를 다 쏟아 가며 우리 짐을 지고 가셨다. 겉으로 어떤 형태이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고난 주간에는 바로 이 사랑을 정말 만분의 일이라도 헤아려서 내 삶에서 확인하고 감사하며 보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가?
신자가 고난 주간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지에 관한 모범적 모델이 본문에 제시 되어 있다. 성경은 아리마대 요셉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표현했다. 고난 주간에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세로 보내야 한다. 기도하고 금식하는 신자라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지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라고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성경도 그렇게 쉽게 읽어선 안 된다.
본문에서 신자가 꼭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다. 무엇이겠는가? 43절의 ‘당돌히’다. 요셉은 존귀한 공회원이었다. 당시 산헤드린 대 공회는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을 다 행사했으며 예수님의 처형도 자기들이 투표로 결정했다. 요즘으로 치면 저명한 국회의원 아니 그 보다 훨씬 높은 직위에 있었던 자로판사 출신에 국회의원 겸직 장관이라고나 할까? 그런 자가 빌라도 로마 총독 앞에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 높은 지위에 있었으니 총독에게 대등하거나건방진 태도나 말투를 취했다는 뜻이 아니다. 식민지 속국인 유대 땅에서 로마 총독 앞에 그렇게 나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율법은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 위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2,23)고 기록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체는 오래 두지 못하고 친척더러 빨리 내려 장사 지내도록 허용해 준다. 그러나 정치범의 경우는 예외다. 로마 제국이 가장 신경을 쓰고 엄격하게 다스린 것은 제국에 대한 반란죄였다. 예수님이 처형당한 공식적인 죄명이 바로이것이었는데 요셉은 예수님의 친척도 아니면서 그 시체를 달라고 감히 요구한 것이다.
‘당돌히’의 바른 의미는 요셉 개인으로선 같은 일당으로 몰려 국가 반란죄로 몰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이다. 산헤드린과 유대 사회에선 배신자로 매도당할 수 있고, 사회적 모든 지위와 특권을 박탈당할 수 있으며, 반란죄로 십자가에 같이 처형될 가능성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자기가 죽으면 쓰려고 만들어 둔 가족 묘지를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예수님에게 제공했었고 모든 장례 절차를 손수 집행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소원한다는 것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천국 가며, 잘 믿으면 복을 받고, 설교 말씀대로 착하게 살아 나쁠 것이 없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자기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찾고 믿는 것이다. 국회의원 직이 날아가더라도, 존귀한 자라는 세상의 평판을 안 들어도,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어부와 세리와 죄인과 같은 한 통속이라는 비난과 멸시를 받더라도, 자기의 재산이 다 없어지더라도, 로마에 반역한 죄로 십자가 처형을 당할지라도 주님을 믿는 것이다. 자기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을 주님의 인도에만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다. 자기의 삶의 모든 목표와 가치와 의미와 소망을 오직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두는 것이다.
이번 일주일간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보내야 한다. 정말 한 번 뿌리가 뽑히도록 기도하셔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 나무로 만든 십자가도 지고 갈 힘과 여유와 시간이 없다. 말이 그렇지 기독교 신자가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해선 더더구나 안 된다. 대신에 내가 정말 소원하는 나라가 거룩과 의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가, 죄와 악령에 썩어져 가는 세상 나라인가 내 속을 한 번 완전히 까뒤집어 놓고 물어 보셔야 한다.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는 소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말 요셉처럼 ‘당돌하게’ 갈망하는가 아니면 종교적 의무감에 형식적으로 시시하게 찾고 있는가 점검해야 한다.
뜨거운 나라의 뜨거운 시민
예수님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내치리라"(계3:16)고 하셨다. 헌금 많이 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며 교회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종교적 태도와 성의와 열심을 뜨겁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세상 사람은 찬 나라에 사는 찬 백성과 뜨거운 나라의 뜨거운 시민 두 종류로 나눠진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 속해 있어 그분의 은혜를 소망하는 자와 사단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을 부인하고 외면하며 오직 자기 힘만 믿는 자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적으로는 이 두 나라가 분명한 경계선의 구분이 없이 이 땅에 뒤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 땅은 세상 권세 잡은 사단이 죄악과 사망으로 뒤틀고 있어 겉모양만으로는 도저히 빛을 쉽사리 분간해 낼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하게 되어 있다. 주님은 외적인 경계선이 분명치 않다는 것을 핑계로 신자가 자신의 정신적, 도덕적, 영적 신분과 위치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정해 놓은 것을 미지근하다고 야단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만홀히 여기심을 당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모호한 태도에 속아 넘어가실 리가 없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 참 신자라면 주님 앞에 핑계를 댈 수 없다. 이미 성령을 우리 안에 보혜사로 주셨기에 신자가 미지근한 것은 우리의 고의적이고 나태한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하나님의 나라가 기도하면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는 식의 외적으로 신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외적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 사단도 능력이 있어 무당도 병을 낫게 해 준다. 신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의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그 구분이 안 되는 세상 속에 서 있는가의 문제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는 죽도로 싫어하며, 하나님이 좋아 하는 것을 우리 또한 좋아 하며, 하나님이 죄라고 정해놓은 것은 우리는 모양이라도 취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이 슬퍼하는 일을 우리가 슬퍼해야 하며, 안타까워하면 같이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면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한다.
의와 거룩과 생명은 오직 빛의 근원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확신하기에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그 빛의 근원 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쪽으로 다가갈수록 매일 풍성한 은혜와 권능의 열매를 맛보고 우리의 삶이 살찌고 풍성해지며 평강과 자유함이 넘치게 되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가 고의든 아니든 일시적이든 당분간이든 주님을 등지는 순간, 세상의 향락과 편안함과 순간적 포만감과 남들 앞에 폼 잡고 얕보는 통쾌감과 사람들의 칭찬과 아부는 있을지언정 단 한 순간도 풍요로움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세상에서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는 잘 모를 수 있지만 자기만 혼자 있을 때 순식간에 눌림과 메임과 실패와 좌절과 갈급함과 허무함이 해일처럼 덮치거나 안개처럼 감아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기도 대신에 TV를 봐라
이번 고난 주간 만큼은 여느 때와 다르게 한 번 보내 보자. 목사의 직분을 걸고 부탁하건대 기도하고 금식 안 해도 된다. 차라리 CNN 뉴스 방송을 정신 차리고 계속해서 보면서 성경의 말씀과 한 번 비교 해보라. 종려나무를 들고 미군을 마치 메시야인 양 환영하던 이라크 국민들이 얼마나 순식간에 변하는지 보라. 벌써 자기들 끼리 서로 죽이고 약탈하고 무법천지로 바뀌었지 않은가? 잔인한 독재자 후세인이나 핍박 받던 순진하고(?) 힘없는 국민들이나 그 놈이 그놈이다. 이라크 전쟁을 기를 쓰고 반대한 불란서, 독일, 러시아가 왜 그랬는가? 이라크와 장사 거래가 가장 많았고 돈 빌려 준 것이 많아서다. 부시가 이라크 국민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부채를 탕감해 주라고 요구하자 가장 먼저 단호하게 ‘노(No)’ 한 나라가 그렇게도 인권과 반전을 외치던 불란서였다. 또 정의의 사자가 된 양 설치는 미국과 영국이 앞으로 얼마나 교묘하게 석유를 독차지 하는지 지켜보라.
이 천년 전 성경의 기록이 지금 이 땅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등장하는 사람과 나라만 다르지 하는 짓은 하나 변함없이 똑 같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병이 낫고 로마에서 해방 될 것만 잔뜩 기대해 열광적으로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이 그 기대가 무산되자 순식간에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등을 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죄 없는 그를 죽이기까지 한 것도 당연하다. 이라크 국민을 볼모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하겠는가?
멀리 이라크까지 볼 것도 없다. 우리의 살아 온 전 평생, 아니 지난 일 년 간의 삶을 심령 깊숙히 그 속을 완전히 까뒤집어서 철저하게 십자가 앞에 꺼내 놓아 보라. 인간이란 존재와 나라는 인격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가 과연 어떤 모습인지 한 번 추적해 보라. 우리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도 내 스스로 의로와질 수 있는 자 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없이 지렁이 같이 무능한 우리가 살 희망과 힘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치사하고 비겁하고 완악한 우리 심령에 갈급함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가? 허공을 치며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한 미지근한 삶 속에 참 평강과 위로가 있었는가? 과연 예수님의 은혜가 없이 바닥없는 허무함이 채워졌던가?
지금 여러분의 도덕적 죄책감을 자꾸 부채질하여 힘 빠지게 하고자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우리가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말씀 드리고 있는 중이다. 예수 십자가 밖에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길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절대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철학적, 윤리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지금 당장의 현실의 모습을 정확하게 직시해 보라. 내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인간관계,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으로 되어 질 일들의 인간적 전망과 기대, 그 모든 것들에 힘들고 지쳐 곤하지 않는 영혼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불쌍한 영혼이요 안타까운 일들 속에 있다. 호산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부르짖지 않고는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 없지 않은가?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 사건, 사람이라곤 없다. 주여 저를 도와 주세요라는 간구가 한숨과 함께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가 아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소원하고 겉으로만 하나님 나라를 찾는 미지근한 자다. 주님의 십자가마저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고 내 죄악을 숨기거나 내종교적 교양을 치장하고 뽐내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뿐이다.
이번 고난 주간만은 제발 겨우 금식 몇 끼하고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것처럼 겉으로 생색내지 말자.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내지 말자. 내가 정말 뜨거운 나라의 뜨거운 시민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지 내 지난 삶을 두고 끝까지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보낼 때에 만이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참 된 나의 고난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뜨거운 나라에 있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차가운 나라에서 그 시원함을 내심 즐기고 있으면서 단지 겉으로만 뜨거움을 찾는 자일뿐이다.
2004 종려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