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은 부활 때에 계대결혼이 어떻게 되느냐는 논쟁을 제기했던 사두개인들로 아예 대답할 수 없게끔 만드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율법사가 이번에는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가 물었습니다. 수많은 구전적, 성문적 계명에 능통한 그로선 계명에 관한한 어떤 논쟁을 벌여도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누가 더 계명을 많이 아는지 겨뤄보거나 정말 어느 것이 큰지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의하여 예수님에게 올무를 걸려고 물었습니다.(35절)
마가복음의 평행 기사(12:28)에 따르면 단순히 큰 계명 대신에 “첫 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은 마치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한테 1 더하기 1은 무엇인가 물은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로선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쉐마’(신 6:4,5)가 가장 큰 계명인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쉐마’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은 몰라도 예수님이 ‘쉐마’가 가장 크다고 대답하면 바리새인의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왜 하나님께 벌 받은 죄인, 세리, 이방인, 문둥병자들과 교제하는지 예수님께 따질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큰 계명을 아는지 물어본 것이 아니라 알면서 왜 실천하지 않는지 문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절묘합니다. 하나님 사랑만 대답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함께 대답했습니다. 그것도 “둘째는 그(첫째)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그 중요도에 있어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과 세리와 교제한다고 너희가 나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 하지 않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작정을 한 모양인데, 오히려 내가 너희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율법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나그네, 이방인, 과부, 고아 같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너희야말로 그런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느냐?”
바리새인들로선 분명 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다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이 첫째며 이웃 사랑이 둘째라고 확실하게 구분했기 때문에 도저히 반발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반발을 하던 예수님을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로 몰려다 도리어 자기들이 그렇다고 자인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시 바리새인도 대답을 못하게 했습니다.
신자라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한 크기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할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똑 같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작은 자로 취급당하는 자들에게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첫째, 둘째로 구분했듯이 그 순서는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흔히 목사님들이 권면하듯이 세상 일과 교회 일 중에 후자를 먼저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컨대 이웃에 죽어가는 환자가 있는데도 예배시간이 다 되었다고 외면하고 교회부터 가선 안 됩니다. 또 자녀가 힘든 일로 아주 괴로워하고 있는데 같이 붙들고 위로하며 기도해주기 보다는 구역모임 시간이 되었다고 외출해선 안 됩니다.
세상 일과 하나님 일 중에선 당연히 후자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일과 종교적 일과는 별개입니다. 하나님 일은 다 종교적일 수 있지만 종교적일이라고 해서 전부 하나님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가축부터 건지라고 했습니다.(눅 14:5)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종교적 일이 되어버리지만 안식일에도 생명을 귀하게 여겨 가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하나님 사랑부터 하라는 의미는 자신의 근본을 어디에 두느냐는 차원입니다. 신자의 존재, 삶, 인생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렸고 또 그 근본에서부터 모든 생각, 말, 행동이 근거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이웃도 사랑할 수 있지만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근본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그로부터 나오는 다른 모든 것도 당연히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도덕, 종교, 사상, 심지어 체면, 자존심, 가식, 이해관계, 자기 자랑 등에도 얼마든지 바탕을 둘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 신앙의 본질이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그 크기나 순수성의 차이 때문에 순서를 나눈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에 크기나 순수성에 차이가 나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 자체에는 순서가 없고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순서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신앙은 사랑에 근거하는 아니라 그 사랑을 바칠 대상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랑이 그 결과로 따라 나와야 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신자로 만들고 사랑은 그가 신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진실임을 믿으나 사랑은 그 신앙이 진실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에게는 신앙을 바쳐야 하고 이웃에게는 사랑을 바쳐야 합니다. 신앙이 자신이 하나님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사랑은 이웃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우리를 완전히 내워준다는 의미가 가진 것 다 팔아서 구제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웃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죄와 허물로 인해 차별 대우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아무도 상대하지 않던 죄인, 세리, 창녀 등을 어떤 차별도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 받아주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최소한 이웃을 차별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 둘 다 사랑하려 들면 오히려 이웃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두 가지 대상을 전심을 가지고 사랑할 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한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사랑을 이웃과 나누려니 그렇습니다. 이웃은 자신이 직접 사랑하려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한 것이 하나님 사랑을 세상으로 나눠지게 하는 통로로 삼았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가 지금 바리새인 같은 위치에 서 있지나 않은지요? 말씀에는 빠르되 그 실천에는 느린 것이 아닐까요? 또는 그 실천에는 아주 열심을 내지만 혹시 그 안에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자꾸 이웃을 온전히 사랑해야겠다고 덤비지 말고 대신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가운데 자신의 전부를 맡기십시오. 그러면 첫째 둘째 순서와도 상관없이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을 통해 주위에 아무런 차별 없이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온 강령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 둘에 있지만 그 둘은 사실 골고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0/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