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기도하지 말라.
창세기 강해 (77)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16:1-6)
믿음의 조상으로 결격?
아브라함은 네 몸에서 난 아들로 후계를 삼아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또 그 후손들이 비록 타국에서 사백 년간 종살이를 하지만 결국 창성하여 가나안 땅을 소유케 된다는 약속도 믿었다. 자기 인생은 물론 인류 역사를 당신의 계획대로 거룩하게 주관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그런데 그 후의 그의 행적은 잘 아시는 본문 내용대로 큰 실망을 안겨준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 소망하지 못했다. 첩 하갈에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은 아랍족속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의 선조가 되어 인류역사 내내 유대인과 서구사회와 갈등 분쟁을 야기하는 씨앗이 되었다. 아브라함 당대에도 본처와 첩 간에 또 이복형제끼리의 다툼으로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의 예에서 보듯이 죄악이 만연해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여 그분의 나라를 세울 주역인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면 후손에게 본이 안 된다. 당장에 엘리에셀을 비롯한 집에서 기르는 사병들에게 갓 뿌려진 여호와 신앙의 씨앗이 제대로 자랄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졌다고 쉽게 속단해선 안 된다. 본문에는 오히려 그의 믿음이 우리보다 훨씬 나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다고 한다.(1절)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지금 아브라함은 최하 85세로 기력이 쇠하였고 사라는 75세로 경수가 끊겼다. 죄송하지만 비아그라도 없던 시절에 노년의 부부가 아이를 가지려고 잠자리를 여러 번 시도했다는 뜻이다. 이미 폐경이 되었으니 임신 여부를 알려면 배가 불려야 한다. 상당 기간 동안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이삭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요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도 이 땅의 세속적 현실 속에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역사의 대부분은 아주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기적은 아주 드물다. 아무리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라도 당신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시고 당신의 영광도 충만하게 드러내신다. 대표적으로 인간들을, 그것도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하고 지성적으로 가장 똑똑한 자들이 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고서도 인류 구원을 완성시킨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 수 있다.
인간 세상에선 도무지 불가능했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기 위해 사래에게 난자를 재생케 하는 데까지는 하나님의 몫이었다. 그 외의 일에는 두 사람이 믿음으로 성실히 순종하는 것이 필수였다.
반면에 우리의 하나님에 대해 기대하는 바는 어떤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게 직접 약속을 받은 것도 아니다. 단순히 자기 소원과 계획을, 그것도 개인적 욕심이 알게 모르게 내포되었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데도, 이뤄달라고 간절히 뜨겁게 기도한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오케이다. 그런 기도를 한 후에는 자기는 손가락도 까닥 않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순간적으로 다 해준다고 착각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 그런 법은 결코 없다.
문자적으로 철저히 믿은 아브라함
아브라함 부부가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었다는 뜻이다. 나름 최선을 다해봤지만 잉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곰곰이 다시 따져봤을 것이다. 아브라함 “네 몸에서 날” 자라는 말씀에 착안했다.
그래서 당시에 일반화 되어서 도덕적으로도 하자가 없다고 여겨졌던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아도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수 있다. 첩에게서 낳아도 어쨌든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것은 맞다.
사라가 2절에서 어떻게 말했는가?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갈에서 날 아이를 사래는 내가 얻은 자녀라고 표현했다. 이조시대 한국에서도 본처에 자녀가 없으면 첩에서 난 아들을 본부인의 아들로 입적하고 본부인이 자기 아들처럼 길렀다.
본문에서 사래는 하갈이 단지 씨받이 역할을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나중에 오히려 아들을 구실로 권세를 부리려 한 것은 분명 하갈의 잘못이었다. 고대에서 종이 잘못하면 주인이 체벌은 물론 심하면 사형도 시켰다. 한국의 양반 집에도 형틀 같은 도구가 있었고 집안에 감옥까지 있었다.
사라로선 하나님이 자기에게 경수가 끊긴 것을 모를 리 없으니 단순히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라고 약속했을 수 있다고 지레짐작했을 수 있다. 그만큼 노력했어도 실패했다면 자칫 자신이 잉태하려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슬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수 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남편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조건 즉, 씨만 뿌린다는 전제하에 첩을 두어도 된다고 허락한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첩을 두지 않고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은 참으로 가상한 생각이었지 않는가? 그 이유는 둘뿐이다. 부부의 금술이 그만큼 좋았거나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마누라를 팔았던 사건에 고개도 못 들고 죄책감을 느껴 꿈도 꾸지 않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만큼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 부부의 시도는 하나님이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은 인간적 방식이었다. 그로 인한 부정적 영향은 관련 당사자 모두와 그 후손에게 오랫동안 미쳤다. 그러나 지금껏 살펴본 대로 그들의 믿음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 시도를 하게 된 동기도 나름대로 이해가 된다. 지나고 보니 섣부른 인간적 잘못이었지만 그런대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 믿음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정답으로는 부족하다. 더 중요한 원인은 따로 있다.
신자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
아브라함의 잘못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하나로 간주하여 삶에 적용한 것이다. 이는 신앙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 잘 새겨들으셔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마찬가지로 그로 인한 부정적 피해가 크다. 그런데도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잘 모르고 정확히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의 뜻은 내 인생 전체가 나아갈 방향 목적 의미 등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인생의 지도(road map)이자 그 일정(schedule)이다.
중요한 점은 이 둘은 기도한다고 알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지금껏 배워온 것과 다르겠지만 분명히 그렇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이미 다 계시되어 있다. 신자 인생을 향한 그분의 뜻은 모든 신자에게 동일하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 성품과 인격을 거룩하게 가꿔라. 죄와는 피 흘리기까지 평생을 싸워 이겨라. 때를 얻든 못 얻든 예수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 전해진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하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라. 또 그들과 함께 예수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건설하라. 신자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신자가 있음으로 다른 이에게 유익이 생기게 하라. 또 그 다른 이들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을 생기게 하라.
이런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처음 듣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기도를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신자의 전체 인생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너무나 분명하다.
자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속만 썩인다. 부부가 사사건건 의견과 감정이 충돌해서 자주 싸운다. 교회와 이웃에 도무지 정이 안 가서 상대하기도 싫은 사람이 있다. 이상하게도 일 때문에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 내 혼자 일방적으로 수고하고 마음의 상처만 받고 아무 결실이 없어서 갈수록 더 괴로운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흔히 말하듯이 평생을 십자가처럼 지고가야 할 일이나 사람이 바로 내 곁에 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런 저런 고난과 문제와 상처가 끊이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저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대체 무엇인지 간절히 뜨겁게 오래 기도해도 묵묵부답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바로 그런 시련을 주신 것 자체가 그분의 뜻이다. 거기다 기도하지 않아도 신자들이 그 답을 이미 다 알고 있기에 침묵하신다.
자식이 지금 무엇을 가장 괴로워하고 있는지 살펴서 일방적으로 훈계하지 말라.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고 자식의 입장으로 내려가라. 남편은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예수님께 순복하듯이 남편에게 순복하라. 죄인끼리의 결혼임을 다시 확인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라. 싫고 미운 형제와 이웃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십자가처럼 붙여준 일과 사람은 피할 수 없다면 도리어 즐겨라. 즐기지 못하겠거든 최소한 내가 아니고는 그것을 감당할 사람이 없음을 알고 내가 그 일에 쓰임 받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순종하라. 지금 이야기들 중에도 처음 듣는 것 하나 없지 않는가? 신자라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그분의 뜻이지 않는가?
우리 모두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앞으로는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겠다고 헌신했다. 그럼 우리가 겪는 모든 시련을 만약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잠시만 생각하면 금방 해답이 나온다. 그런데도 자꾸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덤비는 까닭이 무엇인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감격에 겨워 주님을 따르기로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차츰 고달프기만 하고 솔직히 세상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혼자서 쓸쓸하기만 하다. 자기만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자꾸만 지치고 아무리 해도 즐겁고 기쁜 일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뭔가 좀 편하고 손쉽게 빨리 문제와 고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결국 안락하고 형통한 길은 없는지 하나님께 매달리게 된다.
다시 세상사람 대부분이 걸어가는 넓고 편안한 길이 그리워진 것이다. 엄밀히 말해 애굽의 노예 생활이 더 좋고 이런 광야 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애굽의 금송아지를 마음속에 다시 만들어 세운 셈이다. 하나님이 벌을 주지 않고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이 큰 다행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신자의 인생 전반이든 개별적 사건에서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이미 충분히 계시되어 있다.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온전히 실천하라는 것이다. 가장 적은 자에게 가장 적은 일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이다. 그 뜻 외에 다른 뜻은 없다.
신자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그런 하나님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계획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지 않다. 그 많은 케이스를 일일이 기록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미리 가르쳐주면 그대로 순종할 자 아무도 없고 다 도망 갈 것이라는 점을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이다.
만약 다윗에게 사울에게 계속 쫓겨 다녀야 하고, 미친 사람 흉내까지 내야하고, 부하들이 죽이려 들고, 왕이 되어서도 가장 아끼던 아들이 반역하는 바람에 피난을 가야하고, 그 아들이 자기 후궁과 백주에 사람들 앞에서 관계를 맺는 치욕을 받을 것이며, 부하의 예쁜 아내와 바람을 피워서 난 아들이 바로 죽는다고 미리 가르쳐 주었다고 가정해보라. 그 전에 골리앗 같은 천하의 거인과 일대일로 전투하게 될 것이라고 양치는 소년에게 알게 해주면 아버지가 전쟁터의 형들에게 치즈와 우유를 갖다 주라는 심부름을 과연 고분고분 순종했겠는가?
바울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번만 맞아도 자칫 목숨을 잃는다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을 것이고, 여러 번 감옥에 갇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처형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온 사방을 다니며 전도했을까? 그냥 아라비아 사막에서 성경이나 연구하며 평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모세는 애굽에서 살인자로 지명수배가 되어 도피 생활 중이었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으로 쓰겠다는 구체적인 인생 계획을 언제 받았는가? 세상의 쓴 맛 단 맛 다보고 난 80세 되어서다. 그래도 세상에 미련이 남았는지 애굽이 두려웠는지 안 돌아가겠다고 다섯 번이나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마지막에 하나님께 야단까지 맞았지 않는가?
구약성경 최고의 영웅이 그랬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이 미리 가르쳐주는 Road Map을 따라가겠는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미리 알아야겠다고 덤비고 또 알게 되면 얼마든지 따를 자신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종교적 과대망상이지 않는가?
물론 성경에는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아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그것도 인류 역사를 거룩한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엄청난 일을 해야 했고 또 당연히 엄청난 위험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계획을 가르쳐 주어도 처음에는 애매모호 했다. 아브라함에게도 처음에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했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몸에서 날 자라고만 해서 본문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예수님의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베드로가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제가 단언컨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릴 것이라고 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주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제 단언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바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이 증명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한 가지 소원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소원은 딱 하나뿐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세상의 죄악과 흑암의 세력과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라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그렇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생의 구체적 계획은 신경 쓰지 말라 당신께서 알아서 이끄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세상 앞에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상천하지의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는 일이다. 그 일을 이룰 구체적 계획은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 사래의 나이 90세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현하는 모습으로 당신께서 증명해 보이시겠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범한 잘못은 하나님만이 주관하는 영역인 구체적인 계획을 자기들이 주도하려 한 것이다.
또 하나님의 네 몸에서 날 자라는 말씀에서 “네 몸”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결혼한 부부는 한 몸이라고 선언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라는 것은 그와 한 몸으로 맺어준 사라에게서 날 자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업을 물러줄 자녀로 오직 당신의 뜻과 약속 안에 들어온 자로 제한한 것이다. 실제로 나중에 아브라함이 여러 첩을 두고 자식들을 많이 낳았지만 성경에 구체적 기록이 전혀 없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 이스라엘의 선조가 된 사람들도 이삭의 손자들과 그 자부들 70명뿐이었다.
신자의 현실을 고난 혹은 형통으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하다. 부요하든 궁핍하든 당신께서 거룩하니 신자들도 거룩하라는 것 외에 하나님의 뜻은 따로 없다. 그 뜻을 이룰 인생의 구체적인 계획도 하나님은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신자 스스로 세우면 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재능과 은사와 믿음을 미리 다 주셨다.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성경도 이미 소지하고 있다. 죄악과 탐욕을 완전히는 제거 못하겠지만 최대한 없애서 하나님이 기뻐할만한 계획을 세우면 된다. 최소한 거부하지 않을 만한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성실히 후행하면 된다.
수난에 비례하는 영광
단 범사에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소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실행해야 한다. 혹시라도 내 계획에 오류나 죄와 실수가 있다면 하나님이 수정 취소할 가능성을 기꺼이 수용할 자세를 갖고 기도해야 한다. 또 죄악에 쓰러지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반드시 체험하게 된다. 기도한 대로 다 응답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처음에는 완전한 비밀에 싸여 있었지만 차츰 하나씩 하나씩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또 그 하나씩 열릴 때마다 신자의 믿음의 내용은 물론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이 하나님의 선으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고 그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자라게 되지만 모든 일이 결말을 짓고 난 후에는 그 동안에 숨겨졌던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깨닫고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 그러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자녀가 고난으로 괴로워하고 인생의 앞날을 잘 몰라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것을 보시는 것이 당신께도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길이 아니고는 신자가 자랄 길이 없기에 그러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참 은혜를 누릴 수 있고 정말로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해지는 길이기에 그렇게 이끄시는 것이다.
저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남들이 잘 겪지 못하는 큰 고난을 여러 번 겪었다. 그 고난들이 무척 괴롭고 힘들다 못해 가끔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미리 알았다면 전혀 다른 방향의 인생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인생이 절대로 더 안락하고 형통했다는 보장은 없다. 그보다 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겪은 고난의 크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제 개인은 몇 배 더 성숙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고난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도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이루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어설프고 제 욕심과 죄악까지 내포되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대로 두시고 당신의 온전한 뜻을 실현하시어 이 자리에 이르게 하셨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제가 잘나서가 결코 아니다. 그분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시고 당신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구태여 기도하지 말라. 대신에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워라. 그 뜻을 실현할 계획은 스스로 세우면 된다. 단 처음 예수 믿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그분을 따라 좁고 쓸쓸한 길을 가겠다는 결단과 헌신 위에 세워라. 쉽게 말해 주님 주시는 어떤 수난도 감수하라는 것이다. 그럼 감수하는 고난의 크기가 클수록 여러분 인생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도 반드시 그만큼 커질 것이다.
12/18/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