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신년에 반드시 계획해야 할 사항은?
마태복음강해 (251)



http://youtu.be/Uc5ekqUC1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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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27:38-44)


기록자에 불과한 마태

멜깁슨은 영화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예수님의 처형사건에서 주님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에 마태는 주님의 수치를 강조했는데 오늘의 본문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로마 군병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한 바탕 마당놀이로 희롱했다. 본문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주님을 대제사장에서부터 지나가는 행인까지 조롱하는 장면이다.

마태가 제 삼자로서 주님이 느낀 육체적 고통의 정확히 알 수 없어서 기록 못한 것이며, 또 사건을 일어난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뿐이지 그분의 수치를 강조할 의도는 없었다고 반발할 수는 없다. 로마 군병이 촌극을 벌릴 때에 마태는 희롱이라는 단어를 두 번 사용했다. 본문에선 모욕(39절), 희롱(41절), 욕(44절)이라고 세 번의 동일한 단어가 나온다. 총 다섯 번이나 동일한 표현과 단어가 반복했다면 저자가 강조하며 전하려는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마태는 어디까지나 사건의 기록자일 뿐이지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은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님이 스스로 기꺼이 올라갔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 이런 모욕이 따를 줄을 주님이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고소 사유에 대해서 제대로 변론을 하면 감옥에 갇히는 한이 있어도 이런 모욕까지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주님은 이런 수치를 어쩔 수 없이 당해야만 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도하고 계획하여 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인끼리 모여 사는 인간 사회에선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으며 또 스스로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자도 아무도 없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은 더더욱 그러하기에 주님이 대신해서 모든 모욕을 대신 당하고 그마저 깨끗케 해주신 것이다.        

문제는 유대인들로선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즉, 인간이 당할 최고의 수치가 되는 죽음으로 이미 내몰았다. 또 다시 조롱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로마인들보다 더 많이 모독한 이유가 궁금하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모욕한 까닭

남을 조롱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조롱하는 자가 자신의 우월감을 과시하다 보면 자연히 그 상대는 멸시를 당하게 된다. 로마 군대 최고 졸병들이 유대 대제사장의 경쟁자였던 예수보다 자기들이 더 우월하다는 점을 과시했다. 너희를 지배하는 왕은 로마 황제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직시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조롱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이나 성품과 정체성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고 문제 삼지도 않았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의 예수 촌극의 주제는 그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두 번째 경우는 조롱당하는 자에게 허물과 잘못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이나 조국을 팔아 축재한 이완용 같은 자들에 대해선 모든 사람들이 공분(公憤)한다. 정단한 명분과 이유가 있는 조롱이다. 본문의 유대인들은 바로 그런 의식을 갖고 예수를 대했다. 자기들 잘난 것을 자랑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조롱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예수 조롱의 주제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나가는 행인이 머리를 흔든 것(39절)은 상대를 심히 멸시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적 행동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더러 성전을 허는 자라고 비방했는데(40절) 비록 와전된 오해이긴 해도 유대인들에겐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것은 죄송하지만 미친 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면 믿겠다는(42절) 말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는 주제에 그분이 보낸 메시아는 결코 될 수 없다는 반어법이었다. 로마 군병들의 희롱에 저항은커녕 한마디 항변도 못하는 것을 보고선 자기들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다. 이제 십자가 죽음으로 유대 땅을 잠시 소란케 했던 예수 메시아 소동은 가라앉을 것이라 기대했다.

“저가“이스라엘의 왕이로다”(42절)도 반어법적 조롱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른 반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지칭했다. 유대 열두 지파의 선조인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겨루며 복을 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하여 얻은 이름이다.(창32:22-28)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입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라는 의미다. 따라서 예수더러 이스라엘의 왕은커녕 아예 그 공동체에 들어올 자격도 없다고 정죄한 셈이다.

유대인이 강도는 조롱하지 않은 이유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께 너무나 큰 참람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싸다는 확신 아래 마음껏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 좌우의 죄수들은 전혀 조롱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이 예수님께만 쏠려 있는 탓이지만 나름대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본문에서 강도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절도폭력범보다 정치범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로마에 반역을 시도한 바라바 일행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말하자면 강도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을 높인 영웅으로 간주된 것이다. 문제는 그 강도들마저 예수님 조롱에 합세했다는 것이다.(44절)

예수님이 자기들과 같은 십자가 사형수이기에 아무래도 동병상련의 정이 생겼을 것이다. 또 강도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들 인생과 신세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며 비탄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지금 다른 사형수를 비난하거나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학자들 추정대로 정치범이 확실하다면 예수님과는 개혁 노선이 다르다. 숨어서 독립운동하기에 바빠 예수에 대한 소문은 혹시 들었을지 몰라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를 비방하지 않고 잠잠히 있었던 같다. 그러다 유대 행인들과 장로들이 예수에게 퍼붓는 욕들 듣고는 그 내용에 충분히 공감했던 것이다. 자기들은 비록 사형을 당해도 떳떳한 명분과 의가 있지만 예수는 로마 군병들의 희롱을 받고도 남는다고 여겨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살인범이 한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 헌병이 채찍질하고 얼굴에 침을 뱉는 등 온갖 모욕을 가한다고 가정해보라. 죄의 질이 너무 흉악해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도 일본 헌병부터 미워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최소한 일본 헌병에게 이미 당할 대로 당했기에 그 위에 또 욕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쯧쯧!” 혀만 차고 말 것이다.

지금 마태는 지나가는 행인에서 유대 대제사장과 공회원들 그리고 십자가의 죄수까지 즉,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구동성으로 비방했다고 한다. 바꿔 말해 유대인 고유의 정체성과 사고로는 예수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이스라엘 족보에서 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가 진짜로 미워서 조롱했던 것이다.  

희극과 비극은 통한다.

진정한 희극은 비극과 일맥상통한다고 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로마인은 합리적 이성으로 예수를 맘껏 희롱하면서 이왕에 갖고 있던 세계 최고의 민족이라는 자존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유대인들은 종교 사상에 따라 예수를 정죄하고 모욕주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분 대신에 형벌을 가한다는 의로움에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둘 다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에 그분의 진노 아래에서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정작 죽어야 할 자들은 예수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도 인간의 기본적 양심과 상식으로 조금만 냉정하게 판단해도 그들이 비난 받아 마땅하다.

로마인이나 유대인 즉,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예수님을 코미디의 주역으로 삼아 실컷 희롱했다. 시편2:2-4은 바로 이 현상을 두고 세상의 군왕들이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기에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시고 웃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들은 진리를 모르고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기다리는 것은 지옥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거기다 오히려 자기들이 옳다고 자부했으니 코미디 중의 코미디가 아닌가?  

시편 기자가 하늘에서 하나님이 웃으실 것이라고 한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실은, 이 또한 인간 수준에 맞춘 표현이지만, 그들을 너무나 안타깝고도 애처롭게 여기다 못해 슬퍼하신다.

신자는 그들과 반대의 위치에 서게 된 자다. 하나님이 원래 바라던 인간의 위치와 신분과 소속으로 회복된 자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슬픔이 해소된 것이다. 집 나간 탕자를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문밖에 서서 먼발치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버지가 하나님이다. 그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오면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집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기뻐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기쁨 안에 영원히 거하는 자다. 때로 넘어지고 쓰러질지라도 그분의 품안에 있기에 그분은 우리를 전혀 미워하기는커녕 싫어하지도 않으신다. 아니 심히 기뻐하신다.  

비방을 중지한 한 강도

마태는 강도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했기에(44절) 좌우의 강도 둘 다 예수를 비방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은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그와 다르다. 우편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구했고 그러자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43)고 대답했다. 그 강도는 진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다. 이는 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가장 확실한 근거 구절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마태와 누가의 기록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태에 따르면 그도 예수 비방에 분명히 동참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여섯 시간이나 달려 있었기에 얼마 시간이 흐른 후에 그의 생각이 바뀐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까닭은 두 가지일 것이다.  

우선 예수님이 그 극심한 고통과 엄청난 모욕을 끝까지 담담하게 감수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 것이다. 같이 응수하지 않는 것은 물론 변명도 하지 않았다.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내색도 전혀 비취지 않았다. 거기다 그냥 참아 넘긴 정도를 넘어섰다. 오히려 주님은 그들을 긍휼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결정적으로는 주님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23:34)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바로 곁에서 들은 것이다. 누가는 강도의 회개(42절)보다 주님의 기도(34절)가 먼저 있었다고 그 순서를 분명히 밝혀 놓았다. 우편 강도도 바로 곁에서 예수님을 향해 심한 욕을 했었다. 어쩜 예수님과 같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소리쳤을 수도 있다.  

주님의 기도는 바로 그런 자신을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해로 보복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또 그런 관습에 익숙해져 있는 유대인 강도에게 주님이 원수와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로마 군인들과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를 얼마나 심하게 조롱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았고 자기도 똑 같이 모욕했지 않는가?

그런데도 예수님의 자기를 바라보는 눈길 속에 진정으로 따뜻하고 포근하며 자신의 그 어떤 허물과 잘못도 다 품어 주는 너무나 큰 인자를 느꼈다. 욕을 퍼부은 자신이 머쓱해졌다. 이렇게 고상한 성품과 인격을 지닌 분에게 내가 몹쓸 짓을 했다고 그 잘못을 반성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밀고 들어와 자기 존재 전부에 가득 채워지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이분은 위대한 인간 랍비가 아니라 정말 당신이 선포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전부가 하나님에 의해 완전하게 용납되어졌다는 확신이 생겼고 평생에 처음 느껴보는 감격과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전혀 다른 품격과 능력

둘째 이유는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에게 임재한 성령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것이다. 유대인들이 주님의 공사역 기간 중에 회당과 성전에서 몇 번이나 잡으려 했으나 유유히 빠져 나왔다. 처음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 곧바로 주님을 따랐다. 주님에게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권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품격과 능력을 느꼈고 무의식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다.  

강도는 예수님을 인간 사회의 법률, 관습, 윤리, 종교로 판단하고 양껏 비방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온전한 한 인격체로 일대일로 대면해주었다. 성령이 그의 속에서 강력한 어떤 역사를 일으켰고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 본체임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강도도 로마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했기에 가족과 생업을 버렸지만 순전히 자신의 판단과 계획에 의해서였다. 거기다 지금은 사랑하는 가족과 정말로 완전히 이별해야하는 순간이다. 로마 제국에서 독립시키면 이스라엘에 새 세상이 실현되리라 꿈꿨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다. 틀림없이 지난 인생 전체를 회상하는 중에 아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없어서 큰 회의와 절망 가운데 빠져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할지도 염려되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을 접하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이 생겼다. 바로 직전까지 죽음에 대해 가졌던 불안, 초조, 공포 등이 이상하리만치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지난 인생에 대한 미련, 후회, 절망, 분노마저 사라지고 온전한 평강이 대신했다. 지금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동원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얻으려고 그렇게 시도했건만 한 번도 제대로 성공 못했던 영혼의 참 안식과 평화를 예수님으로부터 얻게 된 것이다.

지금 로마 군인들은 로마가 각 나라들 간의 전쟁을 완전히 중지시키고 평화를 달성시켰기에  로마 제국이 바로 지상 천국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유대 관원들은 예수가 너무나 큰 참람 죄를 지었기에 이스라엘의 구세주는커녕 그 구성원도 될 수 없다고 추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 여기고 있다.

이 강도 또한 자기 생각과 방식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 시도했었다. 그러나 무참한 실패를 겪고 예수님과 일대일로 대면함으로써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이 선조 야곱에게 약속했던 언약공동체가 다윗 왕국처럼 사방 대적을 멸하고 이스라엘만 우뚝 서는 모습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주변 종족들에게 이스라엘 또한 또 다른 로마제국이 될 뿐이기에 그런 구원은 인간의 헛되고 잘못된 사상에 불과하다고 깨달은 것이다.    

그 강도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교제 동행하는 데서 실현됨을 체험한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7)고 선포했던 그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 강도는 예수님에게서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다. 주님께 당신의 나라가 임하면 나를 생각해 달라고 간구한 것이 자신의 지난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차원을 넘어섰다. 자기 전부를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이스라엘 국민으로 삼아달라는 것이었다.  

강도는 지난 모든 인생과 현재 자기 존재 전부를, 비록 현실에선 십자가에서 곧 죽을 사형수 죄인의 비참한 모습이지만 있는 그대로 주님께 완전히 내어드렸다. 인간이라면 이 땅에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하나님 면전에서의 참된 겸손을 취한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불행하게도 그에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완전한 항복을 한 것이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지금 강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 경배했다는 것은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과 동일하게 조롱을 받고 이스라엘에서 파문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길과 생각이 인간의 그것과는 다름을 완전히 깨달았기에 자신이 왕따 당하는 것 정도는 전혀 두려워하지도 개의치도 않았다.

그는 비로소 인간들끼리 서로 자존심을 높이려는 싸움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킴으로서가 아니라, 죄에서 자기 영혼이 구원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의 육신은 비록 십자가에서 너무나 수치스런 모습으로 큰 고통 중에 죽어가고 있지만, 그의 심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발밑에 온전히 엎드림으로써 참되고 완전한 평강을 얻은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 공회에서 당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에 대해서, 로마 법정에서 로마 반역한 사실이 없음에 대해서 정당한 변론을 했다면 이 고통스럽고 치욕스런 골고다 십자가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이 강도가 실질적으로 이 땅에서 최초로 맛본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 실현될 수 없었다.  

무신론자들은 로마처럼 정치 군사 경제 대국이 되어서 먹고 마시는 것이 풍요롭게 되면 천국이 실현된 것으로 믿는다. 도덕적으로 조금 깨이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유신론자들 즉, 종교인들은 유대인들처럼 계명과 의식을 준행하는 습관적 종교생활이 천국인 줄 착각한다.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행한 세 번의 시험 모두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주라는 것이었지 않는가? 오늘날까지도 모든 인간들이 소망하고 옳다고 여기는 경제, 도덕, 종교의 천국을 건설하라는 것이었지 않는가? 예수님더러 제발 십자가 구원의 길만은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럼 자기가 갖고 있는 공중 권세와 영광 모두를 예수에게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세 번 모두 딱 잘라 거절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탄의 부하가 될 수는 결코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 군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도어지 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되는 모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골고다 이후에도 여전히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마수 아래에서 그 삶이 혈과 육의 싸움으로 지샐 수밖에 없다. 신자는 그렇지 않다. 십자가로 사탄의 권세가 이미 완전히 무력화 된 것을 알고 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사단을 밟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십자가 우편의 강도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그 존재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히 기뻐하심을 영원히 입을 수 있다. 세상의 어떤 것에서도 천국은 발견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예수님과 교제와 동행으로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다. 세상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때때로 흔들리지만 절대로 패배당할 수 없는 신분이다. 하나님은 신자 각자에게 고유의 영광스런 계획을 갖고 당신께서 인도 중이다.

새해 아침에 신자가 세울 계획은?  

오늘은 새해 첫 주일 예배다. 신자는 현실적인 목표는 물론 이런 저런 신앙적인 계획과 결심을 세운다. 혹시라도 뜨겁고도 열심히 믿어서 자기 삶에서 다윗 왕국 같은 현실적인 풍요를 건설하려 한다면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

자기만의 종교적 자부심으로 가득 찰지는 몰라도 예수를 향해 고개를 흔들며 지나가는 행인일 뿐이다. 새해에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놀랍고도 거룩한 드라마의 주역이 결코 될 수 없다. 아니 지나가는 행인 ABC도 될 수 없다. 예수님과 아무관련이 없어 그분의 드라마에 아예 등장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간혹 절대로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살 것만 목표로 하는 신자가 있다. 또 세상의 것들은 다 헛된 것이니 오직 교회 중심으로 하늘에 보배를 쌓을 것이라고 작정하는 신자도 있다. 자칫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적 가식적 종교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십자가 우편의 강도가 변화된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자기 생각과 능력으로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 시도했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그 나라는 멀어만 갔다. 인간의 지혜가 너무나 어리석으며 영적으로 무지하고 본성이 죄에 찌들어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형수 강도를 구원하러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마저 함께 지시고 바로 곁에서 그를 위해 대신 중보하고 기도해 주었다. 최초로 믿음으로 구원 받은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영향과 결과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의 믿음은 성경공부를 통해 열심히 배워서 터득한 내용이 아니었다. 자기 전부를 던져서 체험으로 이미 익히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믿음은 자기가 가진 능력과 권세의 근거였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세상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거기다 죽음의 권세까지 이겨냈다. 예수님만이 그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올해 신자가 반드시 세워야 할 신앙 목표는, 아니 매해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아니 신자로서 이 땅에서 매일을 그렇게 실현하며 살아가는 모습 자체는, 바로 하나님의 심히 기뻐하심 속에 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완벽한 십자가 승리를 실제로 자기 것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세상을 밝게 비취고 새롭게 바꾸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이 올 한해 자신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영광스런 계획은 그분께서 책임지고 실현시킬 것이다.  
  
1/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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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어 얻은 가장 큰 축복 마태복음강해 (249) http://youtu.be/SlHawHa5DZ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온전히 믿고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8 - 마27:15-22) [1]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온전히 믿고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8) http://youtu.be/-ufaHw1PK-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때에 바라바라 ...

심히 기이한 유대인의 왕 (마태복음강해 #247 - 마27:11-14)

심히 기이한 유대인의 왕 마태복음강해 (247) http://youtu.be/RVwNg7fM8Po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 마27:1-10)

목숨까지 버린 유다가 더 의롭지 않는가? 마태복음강해 (246) http://youtu.be/qhSGponWju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

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 마26:69-75)

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http://youtu.be/ls8cu58O-R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

너무나 웃픈 대제사장의 심문 (마태복음강해 #244 - 마26:59-68)

너무나 웃픈 대제사장의 심문 마태복음강해 (244) http://youtu.be/g-aGmG0H8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 마26:57-62) [2]

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http://youtu.be/_azfFGIzNqs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

겟세마네 체포에 숨겨진 하나님의 큰 역설(마태복음강해 #242 - 마26:47-56) [2]

겟세마네 체포에 숨겨진 하나님의 큰 역설 마태복음강해 (242) http://youtu.be/H89jS1RImZg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

주님이 십자가를 주저하신 이유는? (마태복음강해 #241 - 마26:36-46) [7]

주님이 십자가를 주저하신 이유는? 마태복음강해 (241) http://youtu.be/QuOrdCUer_w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

베드로에 대한 너무나 큰 착각 (마태복음강해 #240 - 마26:30-35) [2]

베드로에 대한 너무나 큰 착각 마태복음강해 (240) http://youtu.be/wVVorENsW28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

성찬식에 대한 더 결정적인 오류 (마태복음강해 #239 - 마26:26-29)

성찬식에 대한 더 결정적인 오류 마태복음강해 (239) http://youtu.be/aa-MY4J-_i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

성찬식에 대한 몇몇 오류 (마태복음강해 #238 - 마26:26-29) [1]

성찬식에 대한 몇몇 오류 마태복음강해 (238) http://youtu.be/1u-5doP862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우리 믿음의 치명적 약점은? (마태복음강해 #237 - 마26:17-25) [3]

우리 믿음의 치명적 약점은? 마태복음강해(237) http://youtu.be/Rm2tWIIkrWc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니이까 가라사대 성...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 #236 - 마26:14-16) [3]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236) http://youtu.be/sDR9beTn-j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향유옥합을 깨트린 마리아가 칭찬받은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 #235 - 마26:6-13) [4]

향유옥합을 깨트린 마리아가 칭찬받은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 (235) http://youtu.be/Bj6R9JUxih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玉盒)을 ...

복수(複數)로 사용해선 절대 안 되는 두 단어 (마태복음강해 #234 - 마26:1-5) [5]

복수(複數)로 사용해선 절대 안 되는 두 단어 마태복음강해 (234) http://youtu.be/LaccUs1d_Z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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