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0:7-13)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유일한 길 

구약성경강해 (39) / 민수기강해 (2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20:7-13)

 

너무나 가혹한 하나님의 형벌

 

이스라엘이 광야를 방황하는 벌을 받는 중에 물이 전혀 없는 곳에 이르자 다시 모세와 아론을 붙들고 원망했습니다. 본문은 그 원망을 들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반석에서 물은 내어주었으나 백성에게 화를 낸 모세에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벌을 내리는 내용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처음에 가나안 진군명령을 거역해 광야방황의 벌을 받게 된 가데스 지역입니다.(민20:1) 시기적으로 따지면 사십 년의 방황이 거의 끝날 무렵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열두 지파로 나누기 위해 두 번째로 행한 인구조사가 2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의 영어 이름은 두 번의 인구조사를 뜻하는 Numbers입니다. 그러나 실제 주제는 이스라엘이 조금만 힘들면 곧바로 불평 원망했음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실현해나면서 당신의 백성들의 믿음을 양육 훈련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직전인데도 원망했고 이어지는 21장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해 불 뱀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입경 직전이라면 광야 방황의 벌을 받은 구세대는 거의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럼 남아 있는 소수들이 곧 죽을 때가 되었음에도 끝까지 거역한 것입니다. 어쩌면 새로 태어난 세대들도 함께 원망했을 수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믿음의 옳은 본을 보이라고 목숨을 살려주었는데도 마지막까지 거꾸로 잘못된 모습만 보여주는 참으로 비참한 이스라엘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사십 년의 광야 방황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보호 인도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신8:4) 백성들은 지금 또 다시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다고 그 충성된 종 모세에게 대들었는데 실은 하나님께 원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완악함은 끝도 없습니다. 잠시 물러서서 기도를 하지도 않았고, 최소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조금 느긋하게 기다려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순순히 물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나아가 잘못은 백성들이 범했음에도 오히려 모세를 벌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일 없는 것 같은데 그의 필생의 꿈을 무산시켰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히브리 민족끼리 마음 놓고 여호와를 경배하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으나 한순간에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총 80년간이나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제사장 나라로 세울 지도자로 예비 훈련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사실상 허사가 되지 않습니까?

 

모세는 백성들이 잘못했음에도 지금 40년 광야 방황의 벌을 함께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 전에 백성들을 진멸하겠다고 하나님이 진노하자 자기 목숨을 걸고 두 번이나 중보기도 했었는데 이 마지막 순간에 그 결실을 누리기는커녕 보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 백성에게 불평한 것으로 하나님은 너무나 가혹한 벌을, 솔직히 말해서 당신 멋대로 벌을 내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은 모세더러 반석에 명하여 즉, 말로만 지시하여서 물을 내라고 지시했습니다.(8절) 모세는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에게 물을 내주었습니다.(11절) 그것도 지금껏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사용했던 바로 그 지팡이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결과보다 그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일점도 틀리지 않게 준행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정신은 실천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따른다고 도리어 예수님께 크게 혼났지 않습니까?

 

모세가 짜증을 낸 상황도 이해해줄 여지가 많습니다. 본 사건 직전에 자기 생명의 은인인 누이 미리암이 죽었습니다.(민20:1) 틀림없이 큰 슬픔에 잠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할 수 없어서 계속 자기만 붙들고 늘어지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을 수 있습니다.

 

애굽 관원을 분에 못 이겨 쳐서 죽인 이후로 모세는 급한 성격을 지금까지 잘 자제해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고(민12:3) 칭찬했습니다. 지금은 딱 한번 짜증낸 것으로 하나님은 그가 인생을 살아왔던 의미를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께 출애굽의 소명을 받은 후로 모세는 한 번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산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동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수고했습니다. 여호와께 받은 말씀을 하나 가감 없이 선포하고 가르치며 실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지난 공로는 완전히 싹 잊어버리고 마치 너에게 더 이상 맡길 일이 없어서 용도 파기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맡은 역할은 바로 거기까지 뿐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신앙상의 의문이 들 때에는 역으로 따져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입경하여 이스라엘 건국까지 마쳤다고 가정해봅시다. 틀림없이 이스라엘은 그의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근사한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딴 장엄한 신전을 건설하여 모세 개인을 숭배할 것입니다.

 

그의 업적이 별 것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이 대체로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당장에 물이 없으니 당장에 모세를 빙자해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인간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에 따라서 당장에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여호와가 기적을 베풀면 군말 없이 따르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언제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했던 신이었는지 기억조차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거창한 신상을 만들어서 화려하고 장엄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만 겨우 두려움과 걱정을 그것도 일시적으로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모든 종교와 달리 아무런 신상도 기념물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텅 빈 무덤만 자랑합니다. 그마저도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그림이나 지도가 없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쳐선 안 됩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베들레헴에 오셔서 갈릴리에 사역하시다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십자가 형장에서 운명하셨습니다. 탄생했을 때의 마구간의 구유도, 성전에서 할례 받은 기념품도, 목수 생활을 했던 장비도, 로마 군인이 주님께 씌워서 조롱했던 가시 면류관도, 결정적으로 사형대 십자가와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 등등 기념할 물건은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제자들에게조차 당신의 메시아 되심과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비밀에 부치라고 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부할 후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한 영혼을 뒤집어서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모습으로만 당신의 당신 되심을 증명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인격적 개인적으로 대면하여 그 영혼이 완전히 뒤집힌 자들은 자신의 구원여부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증거도 따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체험하고 있고 자신을 당신의 자녀로 대해주는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누가 강요 권면하지 않아도 평생을 살아가는 목적과 기쁨을 오직 예수 그분으로 삼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거창한 건물과 목사의 현란한 설교 실력과 화려하고 감각적인 예배와 각종 활기 찬 프로그램 등만 앞세우고 막상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지면 참 생명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께서 택하여 남겨둔 순전한 교인들 개인에게선 떠나지 않으나 그런 교회 조직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집니다.

 

모세가 범한 잘못은?

 

모세가 맡은 역할은 느보 산 먼발치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다가 운명하는 데까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영웅은,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 외에 없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서 광야를 통과시키는 종으로 택함 받았고 실제로 그 일만 감당하도록 바로 궁정과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 받았습니다. 떨기나무에 임하셨을 때에 여호와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고 분명히 그런 뜻을 밝혔습니다. 가나안 입경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명도 지금 아론을 비롯한 레위지파와 각 지파의 두령들과 장로와 천부장 백부장들이 함께 도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당신의 일을 인간끼리 힘을 합쳐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행하길 원하셨습니다.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아예 각 사람마다 은사와 재능을 다 다르게 주셨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종들도 하나님의 일의 일부만 맡아서 행하고 일부의 성과만 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직무와 양떼들의 범위 내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의 계시를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보여주신 계시만으로 그분의 그분 되심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일반 신자는 잘 몰라서 때로 오버할 수 있지만 사역자는 하나님이 확실하게 계시해준 진리를 벗어나선 절대 안 됩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들이 평생토록 반드시 지켜야만 할 사역의 절대적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방식으로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자신이 빛이 나는 결과가 되면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심지어 영적인 열매를 많이 맺어도 어떤 방식이 되었던 반드시 하나님의 벌 내지 징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다시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우선 손을 높이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화나 짜증이 많이 났다는 뜻입니다. 또 자신의 특정한 의도와 강력한 의지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 이번만큼은 너희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내가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쳤다는 것도 그런 증거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두 번이나 내려치면 남들 보기에 마치 모세 개인의 능력 내지는 노력으로 물이 나온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지팡이가 요술을 부리는 마법을 지닌 양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지금껏 지팡이를 지시하는 용도로만 사용했지 이렇게 휘두르며 힘을 주어 내리친 적은 본 사건이 처음입니다.

 

심지어 모세 본인도 은연중에 자기 힘으로 물을 낸 양 착각하거나, 최소한 자신이 백성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우월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유의 은사를 지닌 종들이 나중에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오히려 그 은사가 발휘되지 않는 이유가 자신에게 공을 돌려서 하나님이 떠나버리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모세가 말씀만으로 물이 나오게 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말씀뿐이므로 물이 생기는 데에 어떤 외부적인 요소가 보태지거나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봐도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모세가 두 번이 내리친 것은 백성들에게 일차적으로 화를 낸 것이 분명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하나님께 대든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언제까지 백성들 원망만 듣고 그 뒤치다꺼리만 해야 합니까? 정말 나도 지긋지긋합니다. 도대체 나에게 돌아오는 상급이라곤 없지 않습니까?”

 

이제 하나님이 그를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않은 이유를 알겠습니까? 네가 맡을 역할과 받을 상급은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만약 가나안에서 나라를 건국하면 모세는 초대 왕이 아니라 자칫 애굽의 바로처럼 살아있는 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될 것입니다. 본인은 그럴 마음이 없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그렇게 추대할 것이고 연로해 판단력이 흐려진 그는 못 이긴척하고 맡을 것입니다. 본문의 벌은 하나님이 그런 잘못을 미리 막아주신 은혜였던 것입니다.

 

일반 신자들도 같은 유혹을 받는다.

 

본문에서 모세가 잘못을 범해 하나님께 벌 받은 것이 작금 한국 대형교회의 사역자들이 말년에 큰 잘못에 빠지는 경우에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반 신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도원이나 새벽 예배에서 사십일 작정 기도를 마치면 영적으로 아주 신령해진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집니다. 평소에 전도하려고 노력했던 주변 불신 이웃들에게 찾아가서 기도해주면 그들을 묶고 있는 사탄의 도성을 단번에 다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주일 대예배 대표기도를 며칠간 기도하면서 관련 성경구절도 인용하여 잘 준비해서 은혜가 넘치게 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예배 후에 교인들이 “오늘 장로님 기도에 너무 감동이 되어 눈물까지 났습니다. 목사님 설교보다 더 은혜 되었어요.”라는 칭찬을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셨을 뿐입니다”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부인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내가 교회 생활 짬밥이 얼마인데. 내가 기도는 조금 잘하지. 너희들하고 내 믿음의 차원이 다르지!”라는 우쭐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생기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그 진짜 속내를 몰라도 자기는 압니다. 곧바로 회개하면 다행이나 그러지 않고 정말로 그런 줄 여기고 계속 그러다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거나 교회 분란의 장본인이 되기 일쑤입니다. 목사인 저부터도 그런 시험에 수시로 들고 실제로 큰 벌도 받아 봤기에 잘 압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냉정하고 엄격하신 분입니다. 아주 사소한 잘못 때문에, 본문의 모세처럼 죄가 아니고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는 실수에도 그 충성했던 종의 평생의 소망을 단번에 깨트리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엄하게 하시는 이유가 단순히 그 종더러 정신 차리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분만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분이 행하는 일에 아무리 인간이 이해가 안 되고 괴롭기만 해도 인간은 그분에게 불평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욥기의 결론이 바로 그것이었지 않습니까? 그분 앞에선 인간은 단지 인간일 뿐입니다.

 

다시 또 강제적 폭군이라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인간이 도무지 메울 수 없고 그분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도 당신께서 먼저 적극적으로 그럴 의사를 표시하고 손을 내밀어주셔야만 인간은 그 손을 겨우 아슬아슬하게 붙들 수 있을 뿐입니다.

 

본문에서 모세를 벌한 이유도 벌을 주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인간과는 아예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러니까 인간 이성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나 사건에도 한 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스스로의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오직 한 분입니다. 이름도 문자 그대로 하나님입니다.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로운 분입니다. 당신께서 어떤 의지를 품는 순간 곧바로 인간과 인간이 사는 이 땅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그 완벽한 자유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우주에 단 하나도 없으며 모세처럼 지금 평생을 헌신한 종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마땅히 취해야 할 바도 하나뿐입니다.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인간의 인간됨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걸맞게 반응하는 것으로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서 인간으로서 끝까지 인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정이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어리석고 너무나 짧은 수명으로 단 한 번 이 땅에 살 수 있는 기회를 그분으로부터 부여 받았을 뿐입니다.

 

모세는 평생을 두고 여호와께 훈련을 받았고 그분과 동행하며 아침저녁 직통계시까지 받았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종이었고 실제로 그래 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향한 짜증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하나님까지 못마땅해졌습니다.

 

그분을 직접 거역할 생각은 당연히 전혀 없었음에도 순간적으로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각, 특별히 감정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평생을 쌓은 탑이 무너지는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그 배경에는 여전히 자기를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끈질기고도 교묘하게 모세 같은 큰 종에게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의 기분을 맞추어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만 행하시는 완전한 자유자이자 절대자로 그치면 은혜가 없습니다. 신자더러 무조건 복종하라는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의 신들은, 사실은 인간이 자기들 소원대로 만들어낸 신이니까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요구하는 대로 도움만 주는 존재입니다. 그 신자들도 그런 도움을 가능한 많이 받으려고 최대한의 정성과 치성을 바칩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절대적 자유자라는 뜻은 인간이 바치는 그런 정성과 치성에 눈곱만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바치는 것이 심지어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하고 경건한 행위 의식 업적이라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이 좋으면, 기도를 뜨겁게 간절히 하면, 교회 생활을 성실히 행하고,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나를 더 많이 도와줄 것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배워왔지만 그만큼 큰 신앙적 오류와 착각도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구교를 개혁한 계기가 바로 그런 점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어서 영적 순례 길을 떠났습니다. 로마의 한 언덕을 수백 개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서 올라갔습니다. 당연히 무릎에 피가 흘렀고 무척 아팠지만 그런 참회의 고행을 바쳐서 자기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고 더 허무해졌습니다.

 

결국 그는 오직 십자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아무 공로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 됨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주관하기에 더더욱 그분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만두면 멸망될 수밖에 없기에 예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실 뿐입니다.

 

신자가 최선을 다하여 행하여서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기에 선하고 좋은 결실을 맺었어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만큼 처참한 실패가 없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또 그런 사실을 신자더러 깨닫게 해주시려고 고난을 계속 허용 묵인하시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 원리를 모르거나 자주 잊어버리는 신자로선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고는 그분의 의지가 본문의 모세의 경우처럼 너무 일방적 독선적으로 행해졌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다시 보면 물이 많이 솟아서 백성들과 짐승까지 마셨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너무나 유익한 결과를 안겨 주었고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물이 많아 짐승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선 너무 과했다는 뜻입니다. 아니 가장 큰 실패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의 이름과 영광이 모세에 의해서 깡그리 무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항상 결론이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본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립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다툼이라는 뜻)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13절)

 

참으로 놀라운 진술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냈는데 이스라엘 자손과 다투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을 양껏 주신 것 자체가 거룩함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툰 후에 물을 주셨으므로 다툰 것 자체가 당신의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란 알다시피 다른 것과 완전히 구별되었다는 뜻이며, 하나님에 적용될 때는 당신은 어느 것과도 비교 되지 않고 구애받지도 않는 절대적 자유자라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이해로는 이스라엘이 원망했으니 그들을 벌주어야 마땅하나 순순히 물을 주셨기에 그분은 거룩합니다. 또 인간 생각으로는 벌 받을 이유가 특별히 없는 모세를 백성들과 구별해서 벌을 줌으로써 하나님은 거룩해진 것입니다.

 

백성들은 어차피 불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들을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이끌어야 할 영적 지도자의 잘못을 더 크게 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중에도 당신께서 모세에 대해 계획하셨던 일이 이로써 당신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그분이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모세가 범한 잘못의 본질과 벌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들어내어야 할 종이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면?

 

성경은 모세 같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엄숙히 명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반드시 식사기도를 경건하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하든지라고 했으니 어떤 일을 하던 예배를 드리거나 최소한 기도를 한 후에 행해야만 합니까?

 

예컨대 예배에서 찬양을 뜨겁게 부른 후에 인도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자고 박수를 치기를 요구하는데 그러는 것이 그분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굳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높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너무나 협소하게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자칫 신자들로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로워지면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일이라고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감히 볼 수도 없고 추측 상상도 못합니다. 너무나 광대합니다. 구약 백성들마저 그분을 맞대면 하면 모든 인간이 그 자리에서 소멸된다고 믿었지 않습니까? 온 우주에 그분의 영광은 충만히 임해 있지만 그 역시 그분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당신께서 보여주시는 그 일부만으로 당신을 감사 찬양 경배하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독생자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 참 빛이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직접 비춰졌으나 자기 백성이 전혀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럼 당신께서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바로 당신을 거역하는 죄인들을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그 죄 값을 대신 감당하시고 죽으신 모습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 조차도 인간 중에는 아무도, 수제자마저도 몰라보고 다 배반했습니다.

 

그럼에도 기어이 지혜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서 그 추하게 타락하여 완악할 대로 완악한 한 죄인을 뒤집어서 새롭게 함으로써 당신의 영광의 광채를 그 영혼에 비춰주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통달할 수 있기에 하늘에 속한 자들의 영에 그분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신령한 일을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해야 그분의 영광을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0-13)

 

바울 사도가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면서 앞에 ‘그런즉’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탕에서 그래야 하는데 우상 제물을 먹는 일에도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자유에 참여한다는 뜻은 간단히 말해 인간이 그분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우상 제물도 오직 감사함으로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실존조차 않으니 제물도 실제로는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 아닌 일반고기일 뿐이므로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공로 치성 열성에 전혀 좌우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만 인간을 다스리십니다. 그것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먹든 마시든 그렇게 하라는 것은 꼭 식사가 아니라 매일의 일상적 삶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통한 거룩한 통치에 순응하라는 것입니다. 만사를 오직 그분의 은혜와 긍휼로만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기독교 변증가 C. S. Lewis는 아무리 심오하고 경건한 신학과 교리라도 사역자 개인의 유익에 사용하려 도모하는 순간 사탄에게 완전히 길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듯이 말입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분의 영광을 높여드릴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당신의 영광을 스스로 높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이 땅에 그 실체라곤 없는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로만 영광을 받습니다. 그분은 하늘 보좌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중에 좌정하시고 세상 만물과 인간 만사를 오직 당신의 뜻대로 자유롭고도 거룩하게, 신학적 용어로는 구별하여 통치하시기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

 

인간이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 하나뿐입니다. 그 일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모든 신자에게 너무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아주 쉬운 길이 하나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높여 드리려는 시도를 당장 중지하는 것입니다. 그분과 나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격을 내가 나서서 줄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연약한 모습인 상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그 이름으로 기도 찬양 예배하는 것부터 이미 엄청난 그분의 영광중에 들어와 있는 너무나 큰 은혜일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가야 합니다. 그럴수록 나라는 존재의 너무나 연약함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를 통해서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내 주변에 찬란히 비춰나갈 것입니다.

 

8/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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