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43-48) 원수까지 사랑하려면?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3-48)

 

너무 무리한 계명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불신자도 잘 알고 있으며 또 그래서 주님을 가장 고차원적인 도덕률을 가르친 인류의 스승이라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분쟁은 정도는 달라도 대부분이 쌍방에게 과실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는 모든 잘못이 전적으로 가해자에게만 귀속되는 경우입니다. 심한 학교폭력이나 강간을 당하는 바람에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인생이 파괴된 피해자로선 가해자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쉽게 용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근 한국 부산에서 성폭행을 가한 범인이 꾸준히 반성문을 썼고 가정환경이 불우했다는 이유로 판사가 항고심에서 20년의 형기에서 12년으로 감형시켜 주었습니다. 그 피해자가 마침 이번 주에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출석해 “피해자인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판사가 가해자를 용서하느냐?”라고 울분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가해자를 용서할 권한과 재량은 오직 피해자만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오래전 한국 영화 ‘밀양’에선 가해자와 피해자 둘 다 처음에는 아니었으나 나중에 기독교 신자가 되는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외아들을 유괴범에게 살해당한 홀어머니는 너무나 괴로워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겨우 안정을 얻었고 원수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수시로 슬픔과 분노가 솟구쳐 올라서 진정한 용서가 되지 않아서 신앙 양심에 찔렸습니다. 

 

결국 감옥에 갇힌 범인을 찾아가 직접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범인은 감옥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 죄를 이미 다 용서받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으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인 자기는 아직 마음의 정리가 안 되었는데 범인은 너무 평안하다 못해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니까 오히려 더 큰 갈등에 빠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크게 둘입니다. 첫째는 예수 믿는 신자들이 자기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겉으로만 가해자를 용서했다고 말하는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도무지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준 기독교의 하나님도 불합리하고 독선적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멀쩡하던 사람이 교회 나가더니 비정상이 되었다는 풍자 내지는 조소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신자들이 그런 비난에 내심 공감하고서 제대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자신부터 이웃은커녕 가족의 잘못조차 진심으로 용서해 주려면 너무 힘들기에 원수 사랑은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췬 것은 분명 신자의 잘못으로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영화의 두 메시지는 완전히 틀렸는데 진심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신자가 얼마든지 있으며 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인자는 끝이 없습니다. 그 영화의 제작자들은 추측건대 성경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서 기독교에 대한 시중의 편견만 반영했거나, 읽었어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그 문자적 의미만 주관적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성경을 바로 읽어라. 

 

문제는 항상 그러하듯이 기독교 외부가 아니라 내부입니다. 많은 신자가 마치 세상 사람들처럼 성경을 단순하게 도덕적 종교적으로 접근, 이해, 적용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판단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읽고선 똑같이 문자적으로만 적용합니다. 성경 독법이 그들과 비슷하니까 기독교도 일반적인 윤리나 종교와 크게 차이가 없어지며 신자의 신앙생활도 그들과 비슷해집니다.

 

타종교인들도 본문이 포함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가장 고차원적인 윤리라고 인정하고, 심지어 기독교 자유주의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믿고 따라야 할 진리로 꼽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다른 사람이나 이전 불신자 시절보다 죄를 덜 짓고 더 착하게 사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가끔 죄를 지어도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으로 용서받았고 신자로서 할 바를 다했다고 간주합니다. 마치 영화 밀양의 그 죄수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통치하는지에 관한 영적 진리를 완전하게 계시한 책입니다. 그 책을 읽어야 할 신자는 죄로 타락한 세상에서 영생이 보장된 천국 시민으로 이미 불려 나온 신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내 인생과 삶의 전반적인 방향과 지침에 대해서 지금 나에게 직접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야 하고 또 그 말씀을 오직 그분의 영광을 높이려는 목적과 방향으로만 실천해야 합니다. 

 

너무 무리해 보이는 원수 사랑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당시의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적 윤리적 가르침에 위배 되는 일들을 많이 행했습니다. 유대 장로들은 이방인과 세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죄인이므로 식사 교제를 금지했고, 안식일 준수에 관한 소소한 규정들을 제정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이 두 규정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으며 그들이 열심히 행하는 금식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포도주를 즐겼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주님은 도덕적으로 죄인이었고 종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단 중의 이단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수호할 목적이 우선이었으나, 어쨌든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하는 종교적 열심을 보태어서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덕과 종교 규범과 예수님의 그것과 둘 중 하나는 틀렸다는 뜻인데, 처형 후 3일 만에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누가 옳은지 완전히 판명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가 가르친 내용이 천국의 복음이요, 그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절대적 진리였습니다. 주님은 구약성경이 창세기에서부터 예언해 놓은 구세주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결국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이며 그분 중심으로 해석 적용 실천해야만 하나님의 뜻에 올바르게 순종하게 된다고 골고다 십자가가 만천하에 보여준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을 단순히 도덕과 종교 차원으로 접근하면 자칫 위선적 형식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답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라.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도 일반적인 윤리로 접근하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인간적인 감정이 앞서기에 순종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랑하고 미워할 대상을 이웃과 원수로 명확히 구분해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웃은 모세 율법과 장로의 유전을 잘 지키는 동족이며, 원수는 로마 편에 붙어서 민족의 이익을 해치는 세리나 이스라엘을 폭력으로 정복해 식민지로 삼은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 로마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미운 원수인 그 두 부류의 사람들과는 식사 교제도 금지 시킨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을 제정한 하나님 본체로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계시므로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어긴 적은 절대 없으며 인간이 고안한 세부 규정들만 어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친 내용도 사실은 율법 규정과 다릅니다.

 

율법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고 하므로, 분명히 원수를 미워하라는 의미는 없습니다. 이 계명을 받았을 당시로선 사백 년간 노예로 학대했고 얼마 전까지 홍해에 수장시키려 했던 원수 애굽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적용하면 로마에게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하고, 동포인 세리를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뒷전이고 자기들 윤리와 특별히 감정에 치우친 인간 유대인들로선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보다 삼천오백 년 전, 예수님보다 천오백 년 전에 현대인이 봐도 놀라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모든 족속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려는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출19:1-6) 레위기 전체 주제도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시의 세상 사람들로선 전혀 실현하지도 생각지도 못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상 숭배로 타락한 가나안 족속들 앞에서 그들의 윤리와는 차원이 다르게 유대인들이 원수를 갚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면 많이 놀라고 너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또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면서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면 반드시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이 실현되므로 그들도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레위기 서두에서 이스라엘부터 자기들 죄부터 매일 번제를 드리며 철저히 회개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구약 이스라엘은 자기 생각을 앞세우고, 특별히 맘몬 신을 함께 숭배함으로써 그 소명을 실천하지 못해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망했습니다. 신약 신자들은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제사장 소명을 이어받아서 불신자들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초대해 하나님과 화해시켜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그 소명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원수 사랑 계명의 마지막 결론을 레위기와 똑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고 내린 것입니다. 

 

하늘의 상을 바라라.

 

원수 사랑의 계명 하나만 떼어서 적용해선 안 되며 전체 문단의 의미도 함께 잘 살펴야 합니다. 우선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46절)라고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바리새인은 율법과 장로의 유전을 잘 지키는 동족들만 이웃으로 삼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그들은 굳이 사랑하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는 자들입니다. 감정적으로나 현실의 이해타산으로나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그렇다고 하늘의 큰 상급을 받기 위해서 억지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세리와 이방인도 그런 사랑을 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46,47절)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때로 세상 사람들을 향한 예리한 풍자와 냉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세리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정죄하고선 식사 교제까지 금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는 차원이 전혀 달라서 훨씬 고상하다고 자부하는 너희는 정말로 그들보다 훨씬 고상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며, 그래야만 너희들 말대로 하나님의 상을 받을 것 아니냐는 뜻입니다. 

 

주님이 앞에서 하신 말씀과도 연결해서 따져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5절)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불신자에게도 생존에 필요한 모든 일반적인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 문맥상의 의미는 당장은 불의한 자일지라도, 즉 로마인과 세리라도 하나님이 구원해 줄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상이 있다는 말도 원수 사랑을 해야만 더 큰 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영생이라는 상을 이미 받은 신자라면 당연히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선 제사장 나라로서 원수를 미워하지만 않아도 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십자가 복음이라는 완전한 진리가 온 천하에 정확히 밝혀지기까지의 부분적 점진적 계시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오셨고 얼마 안 가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정신대로 신약 신자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신자의 체질이 진토 같고 죄의 본성이 살아 있기에 지키기 아주 힘든 계명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 그분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딤전4:2), 또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벧후 3:9)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현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정확히 안다면 그런 사랑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당시의 이방 로마인과 세리를 상대도 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탄에 묶여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죄는 하나님이 죽기까지 미워하나, 죄인은 하나님이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신자는 그분의 사역을 대신 맡아 불신자들을 그런 십자가 구원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한 번도 로마 당국자들을 정죄하지 않았고 우리 눈에는 도리어 고분고분 순응할 정도였습니다. 공사역 중에는 이방인과 세리가 많이 사는 변방 지역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했습니다. 세리와 이방인은 물론 유대 사회의 주류에 들지 못한 모든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절대 차별하지 않고 식사 교제하고 상담 치유 구원해 주었습니다. 

 

천국 시민의 윤리

 

영화 밀양의 마지막 결말의 구체적인 묘사가 기억나지 않지만, 여주인공이 "용서를 해도 내가 먼저 용서를 한 다음에 하나님이 용서를 해야 하는데."라는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자가 가지는 인간적인 부족한 생각과 감정으로, 신앙적으로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신자가 행하는 대로 따라 행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믿음이 좋은 당신의 종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고 당신만의 의로운 뜻을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에 따라서 행하실 뿐입니다. 예수님도 가해자인 로마와 세리에 대한 피해자인 유대인들의 미움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어도 먼저 그들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원수가 행한 악한 행동과 자기가 당한 억울한 피해를 보면 도무지 용서하기 힘들고 이가 갈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이 사랑하는 그도 신자가 사랑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보지 말고 사람만 보되, 그 성품과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장차 바뀔 신분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함께 천국까지 가서 영원히 함께 거하며 교제할 상대가 바로 이 땅의 원수가 될 수 있기에 그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대할 때 하나님이 이미 용납해 주신 자라는 오직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박해하는 자도 속히 회개하고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기를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같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가장 먼저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마6:10)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뜻도 오직 하나로 태초부터 세워진 예수 십자가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계획입니다. 주님이 승천하기 직전에 부모의 유언처럼 모든 족속으로 당신의 제자로 삼으라고 지상 소명을 주신 까닭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의 유언이라면 모든 신자는 그 소명을 첫째가는 인생 목표로 삼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레위기 율법과 똑같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원수 사랑 계명을 마무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유대 나라에선 율법을 자기들처럼 잘 지키는 동족만 이웃으로 사랑했으나, 예수님이 세우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웃을 삼는데 어떤 인간적인 기준도 적용해선 안 되며 심지어 원수마저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이 정한 규정을 잘 지켜서 자기들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만 가는 곳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는 악인과 의인의 기준이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계명을 마지막 48절을 빼고 보면 최고급의 윤리적 계명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48절도 그 앞부분과만 연결하면 자칫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니까 신자도 도덕적으로 완전한 선을 실현하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인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연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원수 사랑은 이미 천국 시민이 된 신자더러 천국을 이 땅에서부터 실현하는 차원에서 천국 윤리에 순종하라는 뜻이 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의 영적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산상수훈 전체가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천국에 관한 설교로 그 주제도 십자가 은혜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입니다. 첫 시작이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을 차지한다고 했으며(5:3), 결론 부분도 (7:13-27) 마지막 날의 구원과 심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 가르치면서(14)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형식만 강조하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22-23) 대신에 반드시 당신께서 지금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선포했습니다.(21) 신자라면 천국에 자기를 위해서 이미 마련되어 있는 아름다운 장막을 향해서만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원수 사랑 

 

최고 우등생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당연히 이방인과 세리를 정죄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만 사랑했습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 자들은 이단 중의 이단으로 하나님의 원수인지라 앞장서서 극렬히 핍박했습니다. 바울로 개명하기 전에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이었을 때, 그는 예수님의 철천지원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이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는(눅23:34) 이야기를 듣고선 틀림없이 바보거나 미친 자로 우습게 알았을 것입니다. 원수를 갚아야 의로운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고 코웃음 쳤을 것입니다.

 

거기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숨이 넘어가면서도 자기 스승처럼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행7:60)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보짓을 한다고 여겼으나 바울의 심령에는 정말로 저런 원수 사랑이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가라는 의심과 당혹감은 지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자기를 만나주었는데, 사흘간 봉사로 만들 만한 능력을 갖추신 분이라면 원수인 자기를 당장 죽일 수도 있었는데 살려주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귀한 직책까지 맡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보좌에서도 당신이 가르치신 그대로 당신의 원수를 사랑했습니다. 바울로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원수를 용서했던 그 기도가 종교적 허세가 아니라 예수님 즉, 하나님의 진심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이제 주님께 그 참사랑을 받음으로써 십자가 복음에 자기 전부를 걸고서 완전히 깨어졌고, 이름도 ‘작은 자’라는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거꾸로 유대인들에게 원수가 되었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40명이나 결사대를 조직했으나 하나님이 그를 지켜 주려고 이방인 로마 당국에 의해 연금되도록 허락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갇히기 전에 이미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기는 천국의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으니 자기를 원수로 미워하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롬9:3) 

 

그도 드디어 예수님과 스데반처럼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미쳤거나 바보 같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간사회의 어떤 기준으로도 차별하지 않고 천국 시민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그런 후보자로 대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보 교인들에게 인간 사형수의 비참한 자리에까지 내려가며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빌2:5-11)

 

한국에도 오래전에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오히려 양자로 삼아서 복음으로 변화시킨 손양원 목사님이 있었으며 미국 뉴스에도 심심찮게 그런 케이스들이 보도됩니다. 감히 바울, 스데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과 비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지만, 저에게도 한국에서 젊었을 때 저의 인생을 완전히 망치게 만든 원수 같은 자가 있었습니다. 밤에 잠도 설칠 정도로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지고 미웠습니다. 

 

그러다 저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서 제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저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죄수임을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 극도의 교만에 빠져 큰 자라고 행세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저도 다른 이에게 원수였었고, 특별히 그 원수였던 자에게도 내 쪽에서 잘못한 일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불쌍해졌고, 비로소 제 심령을 계속 누르고 있던 분노와 증오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며, 그 원수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해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감정적으로 좋아하고 현실적으로 섬기는 사랑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원수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지만, 우리 모두 체험했듯이 자기를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살아 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차원의 원수사랑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보다는 아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이 예뻐하시고 기뻐하실 면모가 전혀 없었습니다. 교만과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찬 너무나 추한 존재였으나 그 모습 그대로 두고서 구원의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앞으로 당신을 닮아서 거룩하게 바뀔 신자를 기뻐하고 사랑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원수를 당장 사랑하기보다 먼저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철두철미 죄악의 덩어리로 그분의 원수였다는 체험적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주님의 십자가 긍휼함이 없으면 한 시도 온전해질 수 없는 너무나 불쌍한 존재임을 언제 어디서나 절감해야만 합니다. 정말로 범사에 주님의 긍휼만 소망하면서 영혼 구원이 인생의 첫째 목적이 되었다면 주님 같은 차별 없는 사랑을, 최소한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피해자의 억울함은?

 

그러면 피해자가 당한 억울함, 상처, 손해, 죄악을 몇 배로 혹은 그대로 갚아 주지 못하니까 신자만 손해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적 찌끼는 남아있겠지만 정말로 앞으로 주님의 은혜로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서 천국으로 함께 갈 동료로 취급한다면 복수는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레위기처럼 일차적으로 원수 갚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신자가 되었다고 당장 완전한 의인이 되라고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고 평생토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만 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신자를 대신해서 모든 억울한 사정을 갚아 주실 것이며, 끝까지 당신을 거역하며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지옥 형벌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믿지 않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최대한의 벌을 받은 것이며,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은 것으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복을 다 받은 것입니다. 복수를 하기 시작하면 끝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 수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원수는 이 땅에선 떵떵거릴지 몰라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형벌은 절대 피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따지면 그들이 오히려 불쌍하고 신자는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오히려 피해자인 신자의 심령만 더 피폐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장애가 생깁니다. 

 

솔직하게 따져볼 문제가 하나 더 남았는데 신자는 범사에 기뻐하라는 너무나 쉬운 계명도 잘 지키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계명을 두고도 하나님에게 왜 무리한 요구를 하느냐 문제 삼아야 하나 아무도 그러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원수는 사랑하지 않으면 자꾸 죄책감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기고 의롭게 원수 갚을 궁리만 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자기의 영적 실체를 먼저 발견했기에 여전히 사탄에 미혹된 다른 이들이 자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해도 자기 속의 깊은 심령에서부터, 성령이 내주하신 영혼에서부터 안타까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학폭이나 강간을 당해 인생이 파괴된 신자가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인간이 겪는 모든 수치, 상처, 슬픔, 고통까지도 대신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그 사랑을 순전히 받아들여서 이웃을 넘어서 그런 자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자라라는 무언의 간절한 호소가 이 계명입니다. 

 

원수 사랑은 바울처럼 자기야말로 하나님의 철천지원수였으나 그 모습 그대로 용서하고 사랑해 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했고 그 후 예수님의 영이 내주해 주시는 신자만이 가능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랑인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서로 도우며 사랑하라고 만드셨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일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타락 전의 상태로 되돌려진 것이라, 인간끼리 순전한 사랑을 하며 자연도 조화로웠던 에덴동산을 자기 주변에 세우려는 목표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신자가 누릴 진정한 축복입니다. 

 

성숙된 믿음이란 자기는 말씀과 기도에, 특별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에 게을러져서 예수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받지 못하면 언제든 그분의 원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할 자격과 조건이 자기에게 전혀 없다고 절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최소한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10/29/2023)


성경탐닉자

2023.10.31 00:35:47
*.23.152.191

영상이 올라온 날부터 바로 봤습니다

 

기대하던 영상이라..

 

제 댓글의 추가적인 내용까지 상세하게 초반부에 언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끝끝내 용서가 안되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자기자신에게 적용해야하는 것이지, 남에게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너는 신자이므로 끔찍한 짓을 당했지만 용서해야 마땅하다"

 

라고 타인에 대해 적용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도 언급해주시는 것도 제 생각도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일반적으로는 성화받은 성도라도 이 땅에서는 연약함으로 인해서

 

주님만나 천국가는 그 날 까지 인간적 한계로 끝끝내 그 사람을 증오하여도

 

그로 인해서

 

아 내가 성경말씀을 지키지 못하는구나

 

이런 자조감이나 자괴감은 안들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은 하되, 안되는 부분에서까지 하나님이 피해자에게 '용서강요'를 하지 않으시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다만 

 

용서를 해도 내가 먼저 용서를 한 다음에 하나님이 용서를 해야하는데, 

 

그 서순에 대해서는 따로 설교말씀에 없어서 아쉬었습니다

 

 

master

2023.10.31 02:02:27
*.115.238.98

"용서를 해도 내가 먼저 용서를 한 다음에 하나님이 용서를 해야하는데." - 이는 신자가 가지는 인간적인 부족한 생각과 감정으로, 신앙적으로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신자가 행하는 대로 따라 행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심지어 믿음이 좋은 당신의 종이라도) 영향을 받지 않고 당신만의 의로운 뜻을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에 따라서 행하실 뿐입니다. 밀양 영화의 주인공이 그런 생각까지 가졌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 원리를 보충해서 설명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서 이 내용을 상기 설교에 추가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에겐 이중잣대를 적용해야만 옳습니다. 이 문제는 금주부터 시작할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시리즈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기 설교에서도 용서의 순서에 대해선 아래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

 

"원수가 행한 악한 행동과 자기가 당한 억울한 피해를 보면 도무지 용서하기 힘들고 이가 갈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이 사랑하는 그도 신자가 사랑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보지 말고 사람만 보되, 그 성품과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장차 바뀔 신분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함께 천국까지 가서 영원히 함께 거하며 교제할 상대가 바로 이 땅의 원수가 될 수 있기에 그를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대할 때 하나님이 이미 용납해 주신 자라는 오직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탐닉자

2023.10.31 03:38:37
*.23.152.191

목사님, 너무 피해자에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예전에 제 닉이 '억울한 사람' 이었던 것 처럼 자라면서 불행한 일을 겪어서 그런지 저는 보통 이런 사건사고에서 피해자에게 굉장히 많이 이입이 되서 그런지 성경말씀이 그렇다고 한다면 억지로 따라야겠지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너무한 생각일까요.

 

인간이 먼저 용서를 한 다음에 하나님이 용서하게 된다는 생각에 대해서 "하나님이 신자에게 따라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라고 하셨는데 반대로 하나님의 용서권한만 중요하다면 성경대로라면 신자는 자유의지도 없이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따라야만되는 존재가 되어서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니까 까라면 까야하니까 그렇게 하겠는데 너무 억울하다 이겁니다.

 

일전에 이영표가 간증을 하면서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 인생의 '주인'이라면 자신이 결정을 할 권한이 있다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는 성별도, 국가도, 인종도, 시대도, 집안의 부유하고 가난한 정도도,  심지어 평생 불릴 내 이름 조차도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 동의는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렇~게도 자유의지 자유의지 라고 하면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인간에게 불리한 것은 '결국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다' 라고 성경에서 말씀하는데, 사실 정작 뜯어보면 인간에게 불리한 부분은 자유의지를 줬으니까 네 책임이라고 하면서 ,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할 수 있는 부분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 분의 의지라고 하는 게 많이 억울합니다. 

 

정작 그렇게 자유의지가 중요하다면, 최초의 스타트점인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자신이 겪게 된 인생의 행적을 미리 보여주고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서 영혼이 생기는 그 시점부터 선택권을 줘서

 

자 이것이 네가 미래에 겪게 될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범벅된 너의 ~~년 평생의 인생길이다. 너에게 자유의지로선택권을 주겠다. 네가 원한다면 너는 수정되어서 임신될 것이고 네가 원치 않고 자유의지로 생명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뿐이다. 너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

 

라고 세상에 태어날지 아닐지 자유의지를 줘야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단'하고 천국에 가기도 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기도 '결단'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지만, 정작 모든 인생의 출발점인 정자와 난자 의 결합시점에서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이 던져진 것이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로 자라고 3살 4살이 되다 보니 자의식이 생기고 그러다보니 인생 살게 되고 인생을 살다보니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지 갈구하다가 예수를 믿는것이 인생의 옳은 길이다 라고 해서 지금 이순간에 감사히도 예수님을 믿게 된것이지..... 물론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하나님이 예정하신거라고 하지만 사실 이영표의 간증과 결합하면 ( 시간과 공간, 성별, 국적, 인종, 집안의 부유함 등 실상으로는 내 맘대로 뭐하나도 제대로 선택하지도 못하는데)

 

인간이 자유의지를 온전히 발현할 수 있는 여건은 너무 적은데 반해서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감은 무한대로 늘려놓는 것 같습니다

 

. 우리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시점부터 태어날 지 아닐지 선택도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여 졌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제가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 제 의지는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적으면 부모님에 대해서 대단히 불경적이고 불효자식이냐고 하실 수 있는데 그런 '효'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서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모든 문제의 시작점인 '생명의 탄생'에 있어서는 그 존재가 생명으로 존재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해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적다보니 울분이 좀 치솟아서 '자유의지' 라는 다른 주제로 가긴 했는데 우선 이번주에 다룰 주일 말씀도 기다리겠습니다. 목사님에 대한 분노가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느껴졌으면 죄송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울분이자 분노같네요. 이건 또 다른 주제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답변 감사드리고 이번 주 설교 방송 또 기다리겠습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master

2023.10.31 05:23:47
*.115.238.98

"인간에게 불리한 부분은 자유의지를 줬으니까 네 책임이라고 하면서 ,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할 수 있는 부분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 분의 의지라고 하는 게 많이 억울합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심정적으로 이해는 되어도 그렇게 억울한 삶을 살라고 부름 받은 것이 신자입니다. 억울한 것으로 따지자면 제 글에서도 밝혔듯이 예수님보다 더 심한 인간은 없으며 그분이 우리의 억울함까지 감당해주셨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따지면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인간에게 유리한 부분입니다.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는 것이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불리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사랑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이중잣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간단하게 "하나님이 보는 악인과 의인의 기준이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뜻입니다."라고 또  "그러지 못하면 오히려 피해자인 신자의 심령만 더 피폐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장애가 생깁니다."라고 그런 의미를 밝혔습니다. 이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신자는 위글에서 밝혀듯이 이미 천국 시민이 되었기에 이 땅에서도 성도와 이웃 사이에 천국 같은 공동체(교회)를 세우라는 목적에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는 신자는 아직은 이런 소명을 실현할 준비가 덜 된 것이거나 자꾸만 그 소명을 잊고 있는 셈입니다. 

master

2023.10.31 05:30:47
*.115.238.98

"우리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시점부터 태어날 지 아닐지 선택도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여 졌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제가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 제 의지는 아니잖습니까?"

 

제가 차후 시리즈에서 한 가지 주제로 삼아 초반에 강조할 내용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생명과 영혼을 주심은 물론 구원으로 택함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고 이 세상의 단 한 명도 그런 은혜와 축복을(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당연히 포함해)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를 자유의지와 연결하여서 마치 인간은 아무 잘못 없는데 식으로 사고를 이끌어 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었고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신앙 문제에서도 절대적인 전제와 범주가 있으며, 모든 논의가 그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 전제와 범주가 잘못 되었다고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그 전제와 범주를 더 명확하게 추론 설명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런 논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엄격히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이 되어서 자기 뜻대로 행하는 것(원죄) 하나 뿐입니다. 

낭여

2023.11.01 06:53:07
*.29.188.145

성경탐닉자님, 말씀하신 주제에 대해서 몇 가지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피해자가 먼저 용서를 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셔야 하지 않냐'는 생각에 대해서입니다. 

 

 밀양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피해자가 아직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본인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며 평안하고 당당하게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당연히 불합리함을 느낍니다. 목사님께서는 원수 사랑이라는 설교 주제에 맞추어 두 가지 포인트를 영화의 메시지로 잡으셨지만, 일반적으로 봤을 때 영화의 메시지는 그것이라기 보다는 (반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용서라는 개념의 부조리함 또는 (기독교적으로 하지만 기독교 비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용서의 악용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밀양에서 가해자의 모습을 보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이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가해자가 진정한 회개를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괴로워 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피해자에게 죄책감을 갖고 사죄하려고 애쓰는 것이 제대로 된 모습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 24)

 

 즉, 밀양에서 보여준 가해자가 말한 본인이 받았다고 하는 하나님의 용서는, 적어도 본인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면서 피해자에게 또 다시 상처를 주는 가해자의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전제하고 가겠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용서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십자가 징계를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면 변해야 하고, 영화는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면서 그렇게 잘못된 모습을 보이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용서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https://www.tgckorea.org/books/686?sca=%EC%84%9C%ED%8F%89 이 글도 한 번 읽어보신다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피해자가 먼저 용서한 뒤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야 하지 않냐'는 주제에는 3가지 측면에서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1) 이 생각에는 '피해 당사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왜 맘대로 용서하시냐'는 불만이 깔려 있을 것입니다. 당사자인 내가 용서 안 했는데 왜 당사자가 아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시냐는 논리이죠. 하지만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하나님 또한 당사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실 권한이 있습니다. 

 2) 인간에게 먼저 용서받지 못했다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당장 저 자신만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죄들을 지었습니다. 그렇다고 일일히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를 받지 않고 살았죠.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신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피해자의 억울함을 갚아주실 것이고 정의를 바로 세우실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만 볼 게 아니라 하나님께 억울함을 맡기시고 억울함을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의지하신다면 억울함의 문제가 좀 풀릴 것입니다. 자유게시판에 새로 올리신 글을 보면 이 부분은 깨달으신 것 같네요.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억울함을 하나님께 가져다가 토로하고 씨름해보시는건 어떨까요.

낭여

2023.11.01 06:53:42
*.29.188.145

다른 주제인 자유의지에 대해서 몇 가지 제 생각을 써보겠습니다.

 

1) 자유의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세상에 태어날지 아닐지 자유의지를 주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가? 

- 자유의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에(즉, 해당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탐닉자님께서 세상에 태어날지 아닐지 자유의지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건 아니라고 받아들이고 이야기 하겠습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날지에 대해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에 반대하고, 이는 주로 현대 저출산 문제의 핵심이 되는 세상의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통과 악이 있는) 불행한 세상에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인식이 저출산 문제의 배후 인식이고, 이 인식에서 논리적으로 '세상에 태어날지에 대한 선택권 없음에 대한 불만'이 이어진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세상에 태어날지 아닐지에 대해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찌보면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없는데 존재의 시작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존재하기 시작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하기 전에 존재의 시작을 결정할 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있고, 태어나기(존재하기) 전에는 뭘 선택을 할 수가 없죠.

 또한 지금의 나는 태어나고 자라며 형성된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당연히 지금의 나의 가치관도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시작이 태어나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즉 태어나기 전에 어떤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태어나기 전과 같지 않고, 지금의 내가 할 선택을 태어나기 전에 내가 동일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인간이 자유의지를 온전히 발현할 수 있는 여건은 너무 적은데 반해서,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감은 무한대로 늘려놓는 것 같습니다.

- 자유의지를 온전히 발현할 수 있는 여건이 적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태어나는 것조차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죠. 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 또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구원에 있어서 불완전한(제한적인)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기시지 않으시겠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구원은 우리에게 달린게 되겠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선택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주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구원의 관계, 그러니까 예정이냐 자유의지냐 하는 주제는 물론 굉장히 어렵고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도로만 밝히고, 이 주제에 관해 딱히 더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탐닉자

2023.11.02 18:40:27
*.23.152.191

일단 두 분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master

2023.10.31 02:32:03
*.115.238.98

"천국가는 그 날 까지 인간적 한계로 끝끝내 그 사람을 증오하여도 그로 인해서 아 내가 성경말씀을 지키지 못하는구나 이런 자조감이나 자괴감은 안들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감정적인 찌끼가 마지막까지 조금은 남아 있을 수는 있어도 신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한 죄책감은 가져야 하고 그에 대해 회개도 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도록 최소한 용서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신자인데도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을 시인하는 의미인 자조감이나 자괴감이 안 드는 것이 마치 마땅하다는 뜻으로 말하시면 안 됩니다. 상기 글에서 신자에겐 성령이 내주하기에 원수사랑을 하지 못하면 영적으로 눌리게 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계명과 대비해서 말입니다. 

 

신자의 잘못을 (원수 사랑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임) 여전히 연약한지라 이해는 해줄 수 있고 하나님이 그것으로 심판은 하지 않아도, 잘못은 어디까지나 잘못입니다. 이 둘을 혼동하거나 어물쩡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또 신자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식으로 징계는 하십니다. 부모도 자식의 잘못을 용서는 해주어도 회초리로 벌을 주듯이 말입니다. 때로 아무일 없는 듯이 넘어가도 자식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부모는 다 알고 차후의 훈육에 참조합니다. 인간 부모도 이럴진대, 하나님은 개인적인 욕심이나 감정은 전혀 없이 완전한 의에 따라서 용서, 징계, 사랑, 구원, 심판 등을 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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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4:1-3)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6/완)

(엡4:1-3)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6/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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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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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6:5-9)상사는 부하를 위협하지 말라.-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5)

(엡6:5-9) 상사는 부하를 위협하지 말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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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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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6:1-4)부모가 자녀에게 복종하라.-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4)

(엡 6:1-4) 부모가 자녀에게 복종하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4)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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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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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5:22-33)부부는 성화의 최고 동반자이다.-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3) [1]

(엡 5:22-33) 부부는 성화의 최고 동반자이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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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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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5:15-21)성화란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2)

(엡 5:15-21) 성화란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2)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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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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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3-7)성화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1)

(빌1:3-7) 성화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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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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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4:11-16)성화의 목적도 모르는 신자-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0)

(엡4:11-16) 성화의 목적도 모르는 신자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0)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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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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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4-7)끝까지 참는 사랑의 비결-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9)

(고전13:4-7) 끝까지 참는 사랑의 비결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9)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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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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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3:1-7)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8)

(고전 13:1-7)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8)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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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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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2:34-40)이웃 사랑 없으면 성화도 없다.-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7)

(마22:34-40) 이웃 사랑 없으면 성화도 없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7)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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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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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4-10)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기려면? -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6)

(히12:4-10)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기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6)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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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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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1-4)인생관이 바뀌어야 성화가 실현된다.-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5)

(히12:1-4) 인생관이 바뀌어야 성화가 실현된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5)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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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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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1-6)성령의 법으로 죄에서 해방되려면?-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4) [5]

(롬8:1-6) 성령의 법으로 죄에서 해방되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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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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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7:21-25)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겨라.-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3)

(롬7:21-25)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겨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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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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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8-11)성화를 달성하는 간단한 방안-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2)

(롬6:8-11) 성화를 달성하는 간단한 방안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2)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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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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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2:1-2)성화의 개념부터 완전히 바꿔라.-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

(롬12:1-2) 성화의 개념부터 완전히 바꿔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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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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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30-39)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구원 얻는 믿음(12/완)

(롬8:30-39)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 구원 얻는 믿음 (12/완)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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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8
  • 조회 수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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