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3편 엉덩이에 뿔난 신자들

조회 수 492 추천 수 5 2009.09.17 23: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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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에 뿔난 신자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여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이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13편)


기독교는 역설(paradox)의 종교입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대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낮아져야 높아지고, 죽어야 삽니다. 그 절정은 하나님이 인간 그것도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죽어야 사는 모습을 실제로 확증해 보이셨습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 할 수 있다고 하며(롬5:4), 또 그래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4:4, 살전5:16)고 권면하는 것도 그런 역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믿음으로 이겨내려 해도 너무 힘이 들어 완전히 탈진할 때도 많지 않습니까? 실제로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 쓰려졌고 예수님도 마지막 날 밤에는 땀이 핏 망울이 되도록 괴로워했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많은 신자가 이런 권면을 단순히 생각을 바꿔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부정적, 소극적, 비관적, 수동적인 관점과 태도(이후 부정적으로 대표함)를 긍정적, 적극적, 낙관적, 능동적인 것(마찬가지로 긍정적으로 대표)으로 바꾸어 괴롭고 슬픈 일에도 의지를 동원해서 생각을 바꿔먹고 즐겁고 기쁘게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입증하려고 가장 자주 드는 예가 바로 물이 반쯤 찬 컵의 예화입니다. “물이 벌써 반밖에 안 남았네!”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표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물이 아직도 반이나 남아있네!”로 그 생각과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이왕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의 지혜이자 어떤 고난이든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해결하려는 아주 좋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는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컵에 반(半)이 남은 물은 어차피 다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마시는 사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물을 마실 때 사람의 생각에 따라 물맛이 조금 달라지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순전히 자기 생각과 노력으로만 매사를 대하라는 권면이 됩니다.    

또 만약 그런 권면이 맞으려면 하나님은 오직 긍정적인 사람만 좋아하고 그 반대인 사람은 미워한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을 그런 두 가지 타입으로 만드시거나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신 분이 하나님인데 그래놓고 다른 한 쪽은 나 몰라라 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 복이 있다고 말한 것이나, 성경이 통회하는 자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를 가장 기뻐한다는 말은 그럼 틀렸다는 뜻입니까?

스스로 노력하여 자기의 생각과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신자들의 삶의 철학입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역설의 종교입니다. 그런 부분에도 세상 사람의 태도와는 다른 역설이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환난은 실제로 환난이라 정말로 괴롭고 힘듭니다. 기도와 말씀이 전혀 눈에 안 들어올 정도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최고조에 달한 중에 실제로 기뻐해야 합니다. 괴로움을 일부러 무시, 외면, 부인, 망각하고 긍정적이 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 사람은 괴로움을 어떻게 이깁니까?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하여 괴로운데도 일부러 괴롭지 않은 척 하거나 아니면 그 괴로움이 끝나야만 됩니다. 신자는 어떻게 하라고요? 괴로움 중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는 속담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울다가 금방 웃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워낙 괴롭다 보면 나중에는 허탈해져 웃음밖에 안 나오는 경우를 종종 겪게 되니까 이런 속담이 생긴 것입니다.  

“울다 웃으면”도 사실은 시차가 어느 정도 있습니다. 신자는 울고 있으면서도 웃고, 그 반대로 웃으면서도 울어야 합니다. 울다가 웃는 것도 엉덩이에 뿔난 새끼 도깨비인데  울면서 웃는 것은 머리에까지 뿔난 어른 도깨비가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정말 그래야 도깨비 같은 사단과 죄악과 사망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부재(不在)란 영원토록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의 독생자까지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편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처음 시작은 완전히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평, 심지어 미움까지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긍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멉니다. 그러다 어떻게 결론지어집니까? 그 분에 대한 찬양과 감사와 경배입니다. 완전히 울다가 웃는 꼴 아닙니까? 세상 사람은 울음이 완전히 끝나야만 웃음이 나옵니다. 울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우는 역설이야말로 환난이 닥칠 때에 신자가 취할 올바른 생각이자 태도입니다.

본문도 그 대표적인 역설입니다. 처음 1/2절에선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을 그대로 토설했습니다. 환난이 그치지 않고 기도 응답이 빨리 안 되어 자꾸 부정적으로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다보니 3/4절에선 실제로 염려하고 있는 내용을 늘어놓았습니다. 영육 간에  완전히 탈진하고 대적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좋아하고 설쳐댈까 불안하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사고와 태도는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4/6절에 와선 갑자기 원망에서 찬양으로 태도가 완전히 바뀝니다. 그럼 그 동안에 현실적으로 사태가 호전된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꾼 것입니까? 여전히 객관적 상황이나 자신의 성격과 관점이 바뀐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바뀐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의심하고 불평한 것은 하나님의 부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그렇다고 마지막에  하나님 얼굴을 뵌 것이라고 쉽사리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자는 단지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싱겁게도 기도했으니 구원을 기대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긍정적 사고로 돌아간 것입니까?

기자의 초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뢰했다는 그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너무 힘들어 처음에는 기도하면서도 하나님께 의심과 불평을 쏟아 놓았지만 언뜻 내가 그럼 왜 기도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부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아무리 기도해 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하나님은 무한한 긍휼로 자기와 동행하고 있음을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분께 의뢰했으니 구원이 확실하므로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환난 중에 시편 기자가 달라진 유일한 것은 하나님이 부재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생각한 것에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으로 선회한(U-turn) 것입니다. 고난에서 언제 어떤 식으로 빠져나갈지, 심지어 얼마나 더 오래 갈 것인지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확신만은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물이 반만 찬 컵의 예화로 돌아가면 그것은 단지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만 신자 스스로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불신자가 추구하는 생활철학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신자가 긍정적으로 되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역설이 적용되어집니다. 현실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여도 긍정적인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신자 본인은 여전히 부정적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긍정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인정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데에 온전히 긍정적이 되는 것이지 신자 본인의 생각, 태도, 관습, 기질 자체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만의 방법과 때에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일을 하시고야 만다는 긍정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 일에 긍정적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방법이 신자가 현실에서 실패하고 죽는 것이라 해도 긍정적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바뀌는 것은 믿기 전에는 오직 자기 일의 형통만이 삶의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일에 긍정적으로 쓰임 받으려는 긍정적인 열망이 긍정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실의 고난에서 탈출하려 형통해 보려고 기질과 성격을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의지를 동원하는 것은 믿음이 결코 아닙니다. 신자가 정말로 긍정적인 의지를 동원해서 믿음으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은 바로 이 시편기자처럼 하나님 부재의 가능성에서 절대적인 동행의 확신으로 바꾸고 또 그 동행에 긍정적으로 참여하는 데일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정말 기도할 마음조차 없어도 일단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사물을 보는 관점은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왜 물이 벌써 반밖에 남지 않게 만들었느냐?”고 의심, 불평, 투정, 미움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따지셔야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 갖고 나왔던 하나님을 향한 쓴 뿌리들이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바꿔집니다.

그러나 단지 기도했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신자는 한 가지는 절대로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단되면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4절)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슨 일이 있어도 이어가고 싶으니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영혼을 소생시켜 달라고 간절히 소원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고난에서 탈출보다는 하나님 당신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현실을 보는 생각과 관점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오직 고난 탈출 아닙니까? 그런데도 어찌 그것이 기독교적 진리이며 또 어찌해서 작금 가장 인기를 끄는 기독교 사조가 되었는지 참으로 큰일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면 교인들이 안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 목사들이 십자가를 가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 스스로 목회의 고난 탈출만을 목표로 해서 역설의 기독교를 잊어버렸거나 알고도 모른 척한 것입니다. 신자를 고난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한다는 미명 아래 신자를 오히려 더 심한 고난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신자는 고난 중에 엉덩이에 뿔난 도깨비가 되어야 합니다. 울다가 웃어야 합니다. 현실의 고난은 한없이 부정적이지만 하나님 당신을 생각하니 한없이 긍정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곧 고난을 끝내 주리라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고난으로도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 따로 있고 그래서 그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그야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긍정적 믿음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엉덩이에 뿔이 나있습니까? 아예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12/1/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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